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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신문]신륵사 소풍길 대참사 당한 안양 흥안초 어린이들(1963.10.24)

안양똑딱이 2022. 3. 3. 04:59

안양의 큰 아픔중 하나로 1963년 여주 신륵사 소풍길에 남한강을 건너다 숨진 안양 흥안초교생들 이야기
안양과 여주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교명이 바뀌었지만 현재의 안양 남초등학교는 1960년대 흥안국민학교로 불리웠다. 특히 노년의 졸업생들에게 여주하면 슬픈 추억이 서려 있다. 신륵사로 소풍갔다가 남한강에서 익사한 선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63년 10월 23일 안양시 흥안초등학교 5·6학년 학생과 교사, 학부모 총 158명이 여주 신룩사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귀가하던 오후 2시 50분 무렵 여주읍 연양리에서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를 건너다니던 조포나루에서 일행을 태운 나룻배가 침몰하여 학생을 포함한 교사·학부모 등 49명(남학생 15명, 여학생 22명, 교장을 포함한 학부모 12명)이 익사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사고는 강을 거의 건너 연양리 선착장 5m 전방에서 발생했는데 사고 원인은 정원 70명에 67명을 초과하여 총 137명이 승선한 나룻배를 밀어주던 모터보트가 선착장에 도달하면서 떨어지자 그 충격으로 학생들이 앞으로 몰리면서 과중한 중량을 못 이겨 배가 침몰한 것으로 비보가 전해지자 어둠에 찬 교정에는 자녀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학부형들이 몰려들어 비명과 울부짖음의 목소리가 넘쳤다고 전한다.
당시 언론 보도「소풍갔던 어린이 등 49명 익사」『동아일보』1963년 10월 24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주서 나룻배 침몰로안양 흥안교(興安校) 5·6년생, 정원 넘어 참변23일 낮 2시 30분쯤 여주 신륵사로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오던 안양 흥안국교생들이 탄나룻배가 남한강 상류 조포나루에서 침몰, 아동을 포함한 교사·학부형 등 49명(남학생15명, 여학명 22명, 교장을 비롯한 부형 12명)이 익사했다.이 근래에 보기 드문 참사는 조포나루 남안(南岸) 5m 전방에서 일어났는데 사고원인은정원(70명)을 초과(137명 승선)한 나룻배를 밀고 가던 모터보트가 멀어지자 그 충격을받아 아이들이 앞으로 밀려 몰리는 바람에 침수되기 시작, 침몰한 것으로 밝혀졌다.사고 직후 모터보트에 매달려 헤엄쳐 나온 88명은 살아났으나 흥안국민학교 유선무 씨를 비롯한 아동 49명은 익사했는데 침몰지점의 수심이 2m, 물이 차가워 대부분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날 통행인이 적다는 관계로 임검찰관(臨檢察官)이 없었다는 것이 정원초과의 원인이 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날 낮 3시 15분쯤 급보를 받은 여주서(驪州署)는관내 전체 경관과 소방대원 및 각 병원 의사를 총동원, 구출작업에 나섰으나 엄정순(11,6년 1반) 군만이 응급가료 끝에 소생했을 뿐 동일 낮 4시쯤 49명은 익사 시체로 인양되어 여주서 사무실에 일차 안치했다가 안양으로 모두 호송했다.
이날 오후 3시 15분경 급보를 받은 여주경찰서는 경찰관과 의용소방대원, 여주읍 시내 의사가 총동원되어 구조작업에 나섰으나 대부분이 심장마비로 익사하였으며, 당일 오후 4시경에 49구의 시신을 모두 인양하여 여주읍사무소 등 시설에 안치하였다가 당일 자정경에 버스 2대와 트럭 2대가 동원되어 안양으로 이송했다.
안양 흥안초등학교는 총 11개 학급 631명으로 경기도 향토교육학교로 지정되어 10월 21일부터 3일간 농번기 휴가를 끝내고 23일 신륵사로 소풍을 왔다 귀교 길에서 참변을 당한 것이다.
이 학교는 5학년 1반 65명과 2반 64명, 6학년생 611명 등 총 190명이 참가대상이었으나 이중 63명은 교통비 120원을 내지 못하여 소풍에 참가하지 못하였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시흥군(현 안양시)은 24일 오전 11시 군청 회의실에서 기관장 긴급회의를 열고 사고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29일 오전 10시 흥안초등학교 강당에서 위령제를 갖기로 하였으며, 합동장례를 하지 못하는 유족에게는 1가구당 2만원의 위로금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조포나루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川松里)에 있는 고려시대의 나루터로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나루와 함께 조선시대 4대 나루로 불렸으며 완만한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무거운 물자가 많이 운송되었다.
그 당시에는 신륵사 근처 남한강(여강이라고도 함)에 다리가 설치되지 않아 배로 강 이쪽과 저쪽 사이를 건너다녀야 했으며 신륵사 관광을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했다. 1959년 여름에도 9명이 익사한 나룻배 사고가 있었으며, 사고를 낸 나룻배는 폭 2m, 길이 20m로 3년이 지나도록 보수를 하지 않은 낡은 배라고 신문은 보도했다.
이 사고로 당시 박정희 의장은 위문담화를 발표하고 진상조사에 착수했으며 이어 정부는 1962년 5월15일에 착공한 여주대교 설치공사를 서둘러 다음해인 1964년 8월 10일에 조기 개통시키고 조포나루를 폐쇄했다.
흥안국민학교는 안양초등학교에 안양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역사가 오래된 초등학교다. 이일로 인해 학교 공동체가 큰 상처를 받았고, 얼마 뒤에 교명도 안양남국민학교로 변경하였다. 이 사고가 일어난 다음 해에 조포나루가 있는 여강(驪江)에는 대교가 건설되었다. 조포나루하면 이제 여주 사람들도 잘 모른다. 더욱이 49명의 어린 생명이 숨진 흥안초교는 더 더욱 모를터이지만 그래도 신륵사 영내로 들어서 강변 쪽으로 50m 정도 걸으면 당시 숨져간 어린 넋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위령비의 앞면에는 사고가 난 상황 설명과 함께 참사를 당한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현 안양 남초등학교 총 동문회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 위령비도 사고가 난 지 43년 뒤인 2006년 4월 15일에야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