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122

[기억-조성원]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조성원]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누나) 내 어릴 적 우리 집엔 누나가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는 친누나인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3학년쯤 그 누나가 따로 나가 살 때쯤 천생 고아라는 걸 알았다. 당시엔 식모라는 게 흔했다. 그 누나는 우리 집에 식모살이하러 온 누나였다. 그 누나는 우리가 학교를 간 사이 집안 허드레 일을 도맡아 하였다. 당시 우리 집은 닭을 많이 키웠다. 부화장에서 들여온 병아리들을 겨우내 키워서 실험용 닭으로 납품을 하든지 시장에 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웬만하면 자급자족을 하던 악착같은 시대였기에 집 주변에 빈 터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앞마당엔 고추하고 토마토를 심었고 닭똥이 비료로 좋은 마늘밭은 닭 마당 바로 옆에 두었다. 집 앞 벚나무 아래 텃밭에는 감자를 다섯 고랑 심고 ..

[기억-조성원]내 살던 곳은 안양가축위생시험소 관사

[조성원]안양가축위생시험소 관사에 살던 시절 (내 살던곳은) 새 책은 으레 제목부터 훑게 된다. 낫, 문고개, 농막, 지게, 방죽 , 뚝새풀, 장구배미 촌석, 돌확 . 글 제목만 보아도 두메산골이 떠오르고 뚝배기 장맛 같은 어느 작가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온다. 도배도 안 된 흙집에 가마솥 보리밥하며 달래 냉이 쑥 된장에 보리깜부기.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고 채 여물지도 않은 수수가지랑 콩 가지를 꺾어 잿불에 구어 먹었다던 아릿한 추억들. 나는 그러한 정감 어린 목가적인 추억이 없다. 작가의 고향을 구수한 된장찌개로 표현한다면 그 시절의 안양은 아마도 당시 ‘존슨탕’이라 불리던 부대찌개 쯤 될게다. 도시도 아니고 두메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서 양념에 따라 나날이 달라지는 바로 그런 이질적인 맛이 꼭 연상된다..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2)

[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2) (안양 시내 2) 우리 집은 닭을 키우는 것 말고도 밭에 작물을 심었다. 앞마당에는 토마토 파 들깨를 심었으며 사육장 빈터에는 감자를 심고 사이사이 콩을 심었다. 나중에 사들인 땅에는 고구마를 심었는데 수건을 쓰고 호미만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엄마를 돕자고 나와 동생은 주말이면 밭에 나갔다. 몇 번인가 수확이 넘쳐나 나와 엄마는 리어카를 빌려 남부시장이라는 농산물을 취급하는 장터에 싣고 가 내다 판 기억이 있다. 댓가가 형편없다고 인상을 찌푸린 엄마의 모습이 여직 흐릿하게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감자에 대해서는 그 시절 꼼꼼이 봐둔 기억이 있다. 감자는 저장중 한쪽에 부패감자가 발생하면 건전한 감자에도 빠른 속도로 병원균이 전염되어 전체가 부패..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1)

[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1) (안양 시내 1) 안양의 중심지는 시장이었다. 두 곳의 시장, 남부시장과 중앙시장. 시내 한복판에 중앙시장이 차지하고 예전에 마부들이 일터였으며 삼영운수 종점이기도 했던 곳에 청과물을 취급하는 남부시장이란 곳이 나중에 생겨났다. 중앙시장을 그 당시는 새시장이라 불렀는데 구시장이라는 곳을 밀치고 1961년도에 새로 생겨난 시장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중앙시장은 한때 단일시장으로 전국 최고의 매상을 자랑하기도 했던 곳이다. 그 시절에는 현재의 안양 천주교성당 주변까지는 차지하지 않았는데 밀려드는 인파로 그 구역도 포함하여 지금 그곳은 특성화가 되어 최신식으로 규모가 엄청 나다. 당시 뻥튀기를 튀기려 하면 안양극장 뒤 캬바레를 지나 천주교 성당 뒤편으로 ..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 그 시절 버스(2)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 그 시절 버스(2) 동물적 본능 바탕위에 이성의 성을 쌓는 듯 이 세상은 어찌 보면 아주 단순 명백하다. 동물들 세계에서는 암컷이 있으면 수컷이 몰려오고 갖은 묘기를 다 부리며 잘 보이려고 애를 쓴다. 사람들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그 시절 명동이 붐비고 이대 앞이 번창하며 화사하였던 이유는 여성들이 주차지였기 때문이다. 여자가 몰려들면 향내 쫓아 자연 남자들은 따라가게 되어 있다. 80년도던가 마산 수출 자유공단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마산은 열 명 중 여덟 명이 여성이라고 했다. 다방 안에 그득한 여자들이어서 숫기 없는 나는 오금도 못 펴고 그냥 나온 적이 있다. 60년대 말 안양이 꼭 그러했다. 호구조사는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시대의 마산 같은 진풍경..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 그 시절 버스(1)

[조성원]1960년대 안양, 그 시절 버스(1) 안양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엽부터이다. 이를 객관적으로 말할 만한 게 있다. 바로 버스 종점의 위치가 해마다 달라진다. 서울이 급팽창하면서 덩달아 신흥개발지였던 시흥 안양 화곡동까지 물밀듯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영동 잠실 천호동 상계 면목 미아 불광은 이미 고질적인 교통난이 발생했다고 했다. 안양은 당시는 미군부대가 있었던 석수동과 시흥쪽에 박미를 경계로 해서 서울과 경기도로 나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안양 시내는 이미 70년대 초 더 이상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바람에 경사가 진 언덕배기인 안양국민학교 하고 전화국 근처인 곳(현재 남부시장 바로 못미친 곳)에 버스종점이 생겨났다. 그곳이 당초는 마부들의 터전이었는데 엉겁결 그..

[기억-조성원]1960년대 그시절, 호마이까 전축

[조성원]1960년대 그시절, 호마이까 전축 (호마이까 전축) 사람들은 집에 그들만의 특질을 갖추고 또 나름의 정서를 만들어내며 산다. 물론 선뜻 비추어지는 것들이 그 집의 전체가 될 수는 없겠지만 분위기는 금세 와 닿는다. 운동기구가 즐비 한 집엔 우람찬 근육의 사내가 있고 책이 꽉 차 있으면 공부벌레가 있다고 보아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교 입시에서 낙오가 되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아이들의 등교가 끝난 후에 학원을 다닐 정도로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 무렵 고등학교에 들어간 친구네 집을 어쩌다가 간 적이 있었다. 당시엔 고등학생이라면 서클도 들고 취미도 가꾸고 하였는데 라디오로만 듣던 팝송LP판이 친구 집엔 방안 그득했다. 1년 차가 그리 달리 보일 수가 없었다. 느낌을 스스로 갖고 산..

[기억-조성원]1960년대 끔찍했던 연탄가스의 기억

[조성원의 기억속 안양]1960년대 끔찍했던 연탄가스의 기억 (연탄 가스) 연탄하면 떠오르는 안도현의 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그 시절 연탄만한 가치도 많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소외된 이들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지는'사랑의 연탄 나누기' 행사,' 연탄 배달의 봉사 이야기' 돈 몇 푼에 찾는 따스함이 어디 흔하였던가. 하지만 요즘 연탄은 사는게 구차하거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때 연탄을 피워놓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잠재우거나,남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할 악의 형태로 연탄이 이용되기도 한다. 생을 연탄으로 마감한다니 정말 가슴 아픈일이다. 스스로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죽음 , ..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과 신작로 길

[조성원의기억속 안양]60년대 안양과 신작로 길 2-1 신작로 길 1 언덕너머에 신작로(新作路) 길이 생겼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신작로라 불러서 나는 그 길 이름이 신작로인 줄 알고 지냈다. 우리 동네는 신작로 말고도 아래엔 아스팔트로 포장된 국도가 가로질러 있었다. 수원과 서울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해마다 개나리 필 무렵 수원에 모 심으러 박대통령이 행차하는 날엔 우리는 그 길 변에 늘어서 박수를 쳤다. 그때는 그가 수원으로 향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는데 후일 그가 간 곳은 농촌진흥청이고 권농일이라는 날짜에 맞춰 해마다 그곳을 향했다는 사실도 자연 알게 되었다. 안양에 유명한 갈비 집으로 ‘화진정’이란 곳이 역전에 있었는데 그는 당시 박통이 수원에 오면 으레 들리던 갈비집에 주방장 출신이라고 ..

[기억-조성원]1960년대 그 시절 안양과 복부인

[조성원의 기억속 안양]1960년대 그 시절 안양과 복부인 (그 시절 안양과 복부인) 가는 세월은 이정표 없이 무작정 달리는 기차와도 같다. 창문 틈에 비치는 풍경이 어제와 또 다르다. 가는 속도는 얼마쯤 되는 것일까. 안양을 떠난 지 햇수로 35년이 넘는다. 흘러간 세월만큼 너무도 변한 안양! 동구 밖에 포도밭 고추밭 냇가가 그대로 있는 정감어린 안양도 아닌데 지금도 여전히 애착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내 삶의 깊이만큼이나 골 패인 마음, 어쩌면 고향 땅의 흙냄새, 그 순진함으로서 비로소 치유가 가능하다고 여겨서일지 모른다. 동심의 고향은 엄마의 품속 같고 따스한 정감을 지녔다. 하지만 잡다하다 싶은 작은 기억들은 그림자조차도 너무도 희미해 자꾸 맘속으로만 숨는다. 그러기에 잊을 건 잊혀지고 조용히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