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118

[기억-조성원]안양천변에는 마부들이 살았다

[조성원]안양천변에는 마부들이 살았다 (마부) 동네는 물 흐름을 따라 자연 형성이 된다. 우리는 수리산 물이 그 차지였다. 물은 소골안을 지나 지금에 평촌에 해당하는 쌍개울이란 곳으로 흘러내렸으며 동네는 개울을 사이로 나뉘었다. 개울 건너편엔 마부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에게 말은 삶의 전부였다. 여물을 솥단지에 끓여 드럼통을 잘라 만든 함지박에 담아 나르는 것이 아낙의 몫이었고 그 놈들 잠자리를 보아주고 똥을 치우는 것이 아이들 할일이었다. 긴 막대기로 여물이 잘 섞이라고 휘젓고 나면 녀석은 곁눈으로 냄새를 슬쩍 훑곤 입맛을 다셨으며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고맙다는 시늉도 빼 놓지 않았다. 다 먹고는 녀석은 꼭 오줌을 누었는데 지켜보던 우린 뜻도 제대로 모르고 한마디씩 하였다. “오줌발 보니 세긴 세겠는..

[기억-조성원]아버지 닮은꼴 작은 손

[조성원]아버지 닮은꼴 작은 손 (당신의 손 ) 본디 타고나는 것이 어디 천성뿐인가. 나의 손은 무척이나 작다. 어찌나 작은지 기타 줄 C코드를 간신히 잡을 정도다. 그래서 그 언제던가 기타교본 ‘에델바이스’란 곡을 겨우 마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곡을 칠 때쯤 자연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를 맨 처음 만났을 때 손 작음을 고백하였었다. 작게 보이기는 한데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친해지자마자 덥석 내 손을 먼저 잡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의 손은 자연 아내 손에 안기는 꼴이다. 결혼반지도 조그만 손에 투박하고 무겁기 그지없어 얄팍한 실반지를 따로 맞춰 끼고 다녔었다. 술집에서는 아리따운 여인들이 오히려 내 손을 탐하여 내 손을 만지작대기 일쑤였다.그런 나의 손을 닮은 것이 또 아들들이..

[기억-조성원]삽질 잘하면 먹고 살았다

[조성원]삽질 잘하면 먹고 살았다 (삽질) 한참 동네가 새마을로 변신을 하던 그 무렵. 우리 동네는 삽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 새벽 장화를 준비하고 장갑을 끼고 신작로에 오르면 큰 트럭 한 대가 기다린다. 그 중에는 지난해까지 마부였던 사람도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도 벌터에서 소작을 했다는 사람도 끼어 있다. 웬만해선 그 무리에 끼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돈벌이가 괜찮은 만큼 서열도 있고 끼려는 사람들도 줄을 대야 했다. 우리 동네에 그런 사람이 많았던 것은 그나마 줄을 잘 선 덕분인지도 모른다. 목수나 미장이가 떼거지로 산 동네였으니 굴비 엮듯 꼬인 트럭 한차였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야말로 삽질에 도가 튼 사람들이다. 시멘트 포대를 한 손에 딱 잡..

[기억-조성원]안양은 나의 영웅본색이었다

[조성원]안양은 나의 영웅본색이었다 (Q등급을 꿈꾸며) 안양의 변천을 보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이 시대 산업의 첨병으로 자리한 안양이기 때문일 것이다. 50년대 논과 밭 그리고 포도밭이 그득하였던 안양은 서울의 위성도시답게 늘 발 빠른 변모를 하였다. 가발이 수출항목에 껴 있던 60년대 당시의 선도 산업은 방직업이나 제지업이었다. 우리 동네는 바로 그 산업의 본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후 그 산업은 보다 임금이 싼 지역으로 옮겨갔으며 70년대에 들어서는 서울에 가까운 특성을 십분 살려 우수인력들이 대거 몰려들어 경제개발 계획이란 국가 시책에 부응한 이를테면 현대양행이나 만도기계 같은 중공업의 시대로의 전환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90년대에 와서는 근교농업을 하던 비닐도 모두 걷혀지고..

[기억-조성원]세월따라 입맛도... 어렷을적 먹거리

[조성원]세월따라 입맛도... 어렷을적 먹거리 (새월따라 입맛도) 그 시절은 한 여름 온 식구가 평상에 나와 앉아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거나 로케트 배터리를 고무줄로 칭칭 감은 파나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정 중앙에 모셔두고 메르데카 배 나 킹스컵 축구 중계를 듣곤 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아나운서의 멘트는 아주 극적이라서 가슴은 늘 조마조마했다. 어머니는 채반에 포도나 소사란 동네서 나온다는 복숭아도 때론 내오기도 하였지만 우리 텃밭에서 기른 옥수수나 고구마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겨우 크림빵을 맛보았던 시절이니 줄줄이 사탕 뽀빠이과자 크라운 산도 맘보 캬라멜 해태 풍선껌 라면땅 건빵들은 알기는 해도 간식으로 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께끼 통을 둘러멘 동네 아이에게 공짜로 삼..

[기억-조성원]안양유원지의 추억

[조성원]안양유원지의 추억 그 시절을 말할 때 꼭 필요하다 싶은데 표준어에서 이탈이 되었다든지 지금은 사용하지를 않아 들이밀기가 애매한 말들이 더러 있다. 국민학교라고 해야 내 경우 실감이 나는데 이 말이 초등학교로 바뀌어 영 느낌이 안 산다 싶고 얼마전에 되찾은 짜장면이란 말도 한 동안 자장면으로 표기를 하는 바람에 영 꺼림칙하였다. 촌뜨기들이 서울말을 쓰다 같은 고향사람들을 만나면 어느새 사투리가 툭하고 튀하고 나오듯이 그 시절은 그때 그대로 느껴야 제 맛이다. 그 시절을 회상한다는 게 무릇 그런 물성들이 아닐까. 나는 그 시절 아이들하고 안양유원지를 곧잘 찾았다. 야! 저기 깔치 데리고 간다. 그러면 우리는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새끼 손가락으로 표시를 하며 깔치라는 말을 음흉한 말투로 내뱉곤 ..

[기억-조성원]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조성원]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누나) 내 어릴 적 우리 집엔 누나가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는 친누나인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3학년쯤 그 누나가 따로 나가 살 때쯤 천생 고아라는 걸 알았다. 당시엔 식모라는 게 흔했다. 그 누나는 우리 집에 식모살이하러 온 누나였다. 그 누나는 우리가 학교를 간 사이 집안 허드레 일을 도맡아 하였다. 당시 우리 집은 닭을 많이 키웠다. 부화장에서 들여온 병아리들을 겨우내 키워서 실험용 닭으로 납품을 하든지 시장에 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웬만하면 자급자족을 하던 악착같은 시대였기에 집 주변에 빈 터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앞마당엔 고추하고 토마토를 심었고 닭똥이 비료로 좋은 마늘밭은 닭 마당 바로 옆에 두었다. 집 앞 벚나무 아래 텃밭에는 감자를 다섯 고랑 심고 ..

[기억-조성원]내 살던 곳은 안양가축위생시험소 관사

[조성원]안양가축위생시험소 관사에 살던 시절 (내 살던곳은) 새 책은 으레 제목부터 훑게 된다. 낫, 문고개, 농막, 지게, 방죽 , 뚝새풀, 장구배미 촌석, 돌확 . 글 제목만 보아도 두메산골이 떠오르고 뚝배기 장맛 같은 어느 작가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온다. 도배도 안 된 흙집에 가마솥 보리밥하며 달래 냉이 쑥 된장에 보리깜부기.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고 채 여물지도 않은 수수가지랑 콩 가지를 꺾어 잿불에 구어 먹었다던 아릿한 추억들. 나는 그러한 정감 어린 목가적인 추억이 없다. 작가의 고향을 구수한 된장찌개로 표현한다면 그 시절의 안양은 아마도 당시 ‘존슨탕’이라 불리던 부대찌개 쯤 될게다. 도시도 아니고 두메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서 양념에 따라 나날이 달라지는 바로 그런 이질적인 맛이 꼭 연상된다..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2)

[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2) (안양 시내 2) 우리 집은 닭을 키우는 것 말고도 밭에 작물을 심었다. 앞마당에는 토마토 파 들깨를 심었으며 사육장 빈터에는 감자를 심고 사이사이 콩을 심었다. 나중에 사들인 땅에는 고구마를 심었는데 수건을 쓰고 호미만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엄마를 돕자고 나와 동생은 주말이면 밭에 나갔다. 몇 번인가 수확이 넘쳐나 나와 엄마는 리어카를 빌려 남부시장이라는 농산물을 취급하는 장터에 싣고 가 내다 판 기억이 있다. 댓가가 형편없다고 인상을 찌푸린 엄마의 모습이 여직 흐릿하게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감자에 대해서는 그 시절 꼼꼼이 봐둔 기억이 있다. 감자는 저장중 한쪽에 부패감자가 발생하면 건전한 감자에도 빠른 속도로 병원균이 전염되어 전체가 부패..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1)

[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1) (안양 시내 1) 안양의 중심지는 시장이었다. 두 곳의 시장, 남부시장과 중앙시장. 시내 한복판에 중앙시장이 차지하고 예전에 마부들이 일터였으며 삼영운수 종점이기도 했던 곳에 청과물을 취급하는 남부시장이란 곳이 나중에 생겨났다. 중앙시장을 그 당시는 새시장이라 불렀는데 구시장이라는 곳을 밀치고 1961년도에 새로 생겨난 시장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중앙시장은 한때 단일시장으로 전국 최고의 매상을 자랑하기도 했던 곳이다. 그 시절에는 현재의 안양 천주교성당 주변까지는 차지하지 않았는데 밀려드는 인파로 그 구역도 포함하여 지금 그곳은 특성화가 되어 최신식으로 규모가 엄청 나다. 당시 뻥튀기를 튀기려 하면 안양극장 뒤 캬바레를 지나 천주교 성당 뒤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