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원식]중초사지(中初寺址)
2003/11/15 안앙학연구소장
2003/11/15 안앙학연구소장
2007년 충북 제천 산업단지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으로 확인된 안양유원지 입구 소재 (주)유유산업 부지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유서 깊은 고찰 중초사의 옛터이다.
중초사지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제시대인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의하여 논바닥에 있던 중초사당간지주와 중초사3층석탑이 각각 보물 6호와 7호로 지정되면서 부터이다.
당간은 사찰입구에 불기(幢)를 메달아 두던 장대(竿)를 말하는데, 이 깃대를 걸어두던 지주가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중초사당간지주 측면에 명문으로 세겨져 있는 당간기(幢竿記)에 의하면 이 당간지주가 흥덕왕 원년에 석재를 채취하여 그 이듬해인 827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중초사의 창건연대를 최소한 826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삼층석탑의 양식과 사찰지에서 출토되는 조선시대 와편으로 미루어 이 절의 폐사시기를 조선시대 초기로 짐작케 한다.
유유산업 입구 수위실 앞에 위치한 중초사당간지주는 제작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과 그 모양이 가지는 단아한 자태로 인하여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옆의 삼층석탑 또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112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장 경내에는 그 밖에도 벤치로 사용하고 있는 이름모를 장대석들과 1950년대 후반 공장 건립당시 출토된 청동용두와 사자향로발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수 십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으며, 인근 유원지 주차장 후면에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수동 마애종(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이 위치하고 있다.
1959년에 완공된 유유산업 본관 건물도 건축가 김중업 선생이 설계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초기 현대건축의 대표적인 축조물로 소개되고 있는 작품인 바, 공장이전 후에도 보존 및 활용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장이전과 관련하여 세간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유유산업부지 활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먼저 중초사지 전역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발굴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때 출토되는 유물 한 점 한 점은 이 지역에 시대를 달리하여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얼과 숨결을 느끼게 해줄 것이고, 더하여 우리 안양시의 역사성과 도시정체성이 확립되는 계기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2005년에 완공되는 안양유원지 개발과 부합하는 유유산업 부지의 활용방안이 찾아져야 한다.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안양유원지 개발의 방향과 중초사지가 갖는 문화재적 가치나 역사성이 서로 훌륭한 보완관계를 이루면서 개발될 때 안양시는 수도권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날 것이다. 유유산업 본관 건물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활용하여 안양유원지를 찾는 시민들에게 또 하나의 관광명소를 제공하자는 일부의 제안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도 그러한 연유로 해석할 수 있다.
끝으로 보물급의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는 유유산업 부지의 민간개발은 현행 문화재보호법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안양시에서 수용·매입하여 활용하는 방안이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특히 살고 싶은 도시 안양을 추구한고 있는 안양시의 도시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도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검토가 요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0여 평 부지의 백 수십억 원에 달할 매입비용이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유유산업의 협조를 통해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면산 보존을 위해 주민들이 트러스트운동을 전개한 서울시의 사례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더하여 존경받고 있는 유유산업의 창업주인 고 유특한 선생과 그 일가족의 지역발전을 위한 기업가 정신을 기대해 본다.
중초사지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일제시대인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의하여 논바닥에 있던 중초사당간지주와 중초사3층석탑이 각각 보물 6호와 7호로 지정되면서 부터이다.
당간은 사찰입구에 불기(幢)를 메달아 두던 장대(竿)를 말하는데, 이 깃대를 걸어두던 지주가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이다. 중초사당간지주 측면에 명문으로 세겨져 있는 당간기(幢竿記)에 의하면 이 당간지주가 흥덕왕 원년에 석재를 채취하여 그 이듬해인 827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중초사의 창건연대를 최소한 826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삼층석탑의 양식과 사찰지에서 출토되는 조선시대 와편으로 미루어 이 절의 폐사시기를 조선시대 초기로 짐작케 한다.
유유산업 입구 수위실 앞에 위치한 중초사당간지주는 제작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과 그 모양이 가지는 단아한 자태로 인하여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옆의 삼층석탑 또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112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장 경내에는 그 밖에도 벤치로 사용하고 있는 이름모를 장대석들과 1950년대 후반 공장 건립당시 출토된 청동용두와 사자향로발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수 십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으며, 인근 유원지 주차장 후면에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수동 마애종(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이 위치하고 있다.
1959년에 완공된 유유산업 본관 건물도 건축가 김중업 선생이 설계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초기 현대건축의 대표적인 축조물로 소개되고 있는 작품인 바, 공장이전 후에도 보존 및 활용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장이전과 관련하여 세간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유유산업부지 활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먼저 중초사지 전역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발굴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때 출토되는 유물 한 점 한 점은 이 지역에 시대를 달리하여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얼과 숨결을 느끼게 해줄 것이고, 더하여 우리 안양시의 역사성과 도시정체성이 확립되는 계기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2005년에 완공되는 안양유원지 개발과 부합하는 유유산업 부지의 활용방안이 찾아져야 한다.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안양유원지 개발의 방향과 중초사지가 갖는 문화재적 가치나 역사성이 서로 훌륭한 보완관계를 이루면서 개발될 때 안양시는 수도권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날 것이다. 유유산업 본관 건물을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활용하여 안양유원지를 찾는 시민들에게 또 하나의 관광명소를 제공하자는 일부의 제안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도 그러한 연유로 해석할 수 있다.
끝으로 보물급의 문화재가 산재하고 있는 유유산업 부지의 민간개발은 현행 문화재보호법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안양시에서 수용·매입하여 활용하는 방안이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특히 살고 싶은 도시 안양을 추구한고 있는 안양시의 도시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도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검토가 요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0여 평 부지의 백 수십억 원에 달할 매입비용이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유유산업의 협조를 통해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면산 보존을 위해 주민들이 트러스트운동을 전개한 서울시의 사례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더하여 존경받고 있는 유유산업의 창업주인 고 유특한 선생과 그 일가족의 지역발전을 위한 기업가 정신을 기대해 본다.
2003-11-17 02: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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