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규]안양의 정체성
[09/26 안양시민신문]신문발행인. 시인
[09/26 안양시민신문]신문발행인. 시인
「안양에는 ‘정체성’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아쉬움과 안타까움, 거기에 공연한 부끄러움까지 겹친다. 안양시민으로서의 자격지심이랄까, 더구나 안양태생으로서 일종의 자존심같은 게 작용한 까닭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데 어쩔 것인가. 그런데, 과연 그 놈의 ‘정체성(正體性)’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3천 페이지가 넘는 신판 ‘국어대사전’(민중서관)에도 실려 있지 않다.
‘Identity’의 번역어인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원래 사회심리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의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이상증후를 나타내는 환자들의 공통점이 ‘자아의식’의 상실, 즉 자기자신의 ‘정체’에 대한 현실감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임상적으로 사용하게 된 말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 학술용어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에릭슨(Erikson)의 「Identity」라는 책이 번역·소개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1977)
그런 심리학 용어가, 지방자치 실시 이후, 모든 자치단체들이 ‘정체성’을 확립하자고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그러니까 안양에 정체성이 없다는 말은 곧 안양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인, 문화적인 ‘동질성’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도 출토되고, 각종 문화재도 적지 않은데, 왜 안양에는 ‘정체성’이 확립되어 오지 못했을까. 한 마디로는 대답하기 어렵다. 다만 두가지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는 그 오랜 문화전통의 맥을 이어오지 못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러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안양은 비교적 신흥성의 위성도시라는 점이다.
옛세대들은 ‘안양’이라 하면 으레 ‘포도’와 ‘안양유원지’를 떠올린다. 60년대 이후의 산업도시화나, ‘축구’를 필두로 한 스포츠도시, 또는 최근의 ‘벤쳐벨리’나 ‘아트시티’ 등은 아무래도 ‘포도’와 ‘유원지’의 유명세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포도와 유원지가 안양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아쉽게 고민해 본 사안이 하나 있다. 바로 ‘安養’이라는 지명의 문화유산적인 활용성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安養’이라는 말은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일컫는 ‘安養淨土’의 준말이다. 궁예의 설화가 깃든 ‘安養寺’의 유래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과거에, 동서남북의 안양시의 경계에 일반적인 시계(市界)표지판 대신 ‘安養門’을 세울 것을 몇 차례 제안한 바 있다. 대사찰에 가보면 극락전의 입구에는 안양문이 서있다.
어느 지역에서 오건 안양문을 들어서면, 이곳이 곧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몸을 쉬게 한다」는 지상의 극락정토인 ‘安養’이라는 것이 상징화되어 있으니 그럴 듯하지 않을까. 시명(市名) 자체가 이렇듯 문화재가 되는 도시가 또 있을까.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장애가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기독교인들의 거부감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정에 세운 단군 동상의 목을 베어낸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 문화와 종교는 별개라는 것, 누구보다도 종교인들은 더 많은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다. 더욱이 사랑과 용서와 자비는 모든 종교의 최상의 삶의 자세다.
‘정체성’에 관한 한, 이를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이미 있어온 전통을 새롭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데 어쩔 것인가. 그런데, 과연 그 놈의 ‘정체성(正體性)’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3천 페이지가 넘는 신판 ‘국어대사전’(민중서관)에도 실려 있지 않다.
‘Identity’의 번역어인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원래 사회심리학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의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이상증후를 나타내는 환자들의 공통점이 ‘자아의식’의 상실, 즉 자기자신의 ‘정체’에 대한 현실감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임상적으로 사용하게 된 말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 학술용어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에릭슨(Erikson)의 「Identity」라는 책이 번역·소개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1977)
그런 심리학 용어가, 지방자치 실시 이후, 모든 자치단체들이 ‘정체성’을 확립하자고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그러니까 안양에 정체성이 없다는 말은 곧 안양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인, 문화적인 ‘동질성’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도 출토되고, 각종 문화재도 적지 않은데, 왜 안양에는 ‘정체성’이 확립되어 오지 못했을까. 한 마디로는 대답하기 어렵다. 다만 두가지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는 그 오랜 문화전통의 맥을 이어오지 못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러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안양은 비교적 신흥성의 위성도시라는 점이다.
옛세대들은 ‘안양’이라 하면 으레 ‘포도’와 ‘안양유원지’를 떠올린다. 60년대 이후의 산업도시화나, ‘축구’를 필두로 한 스포츠도시, 또는 최근의 ‘벤쳐벨리’나 ‘아트시티’ 등은 아무래도 ‘포도’와 ‘유원지’의 유명세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포도와 유원지가 안양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아쉽게 고민해 본 사안이 하나 있다. 바로 ‘安養’이라는 지명의 문화유산적인 활용성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安養’이라는 말은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일컫는 ‘安養淨土’의 준말이다. 궁예의 설화가 깃든 ‘安養寺’의 유래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과거에, 동서남북의 안양시의 경계에 일반적인 시계(市界)표지판 대신 ‘安養門’을 세울 것을 몇 차례 제안한 바 있다. 대사찰에 가보면 극락전의 입구에는 안양문이 서있다.
어느 지역에서 오건 안양문을 들어서면, 이곳이 곧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몸을 쉬게 한다」는 지상의 극락정토인 ‘安養’이라는 것이 상징화되어 있으니 그럴 듯하지 않을까. 시명(市名) 자체가 이렇듯 문화재가 되는 도시가 또 있을까.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장애가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기독교인들의 거부감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정에 세운 단군 동상의 목을 베어낸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 문화와 종교는 별개라는 것, 누구보다도 종교인들은 더 많은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다. 더욱이 사랑과 용서와 자비는 모든 종교의 최상의 삶의 자세다.
‘정체성’에 관한 한, 이를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이미 있어온 전통을 새롭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자 한다.
2003-09-26 17: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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