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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919년 3월 의왕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의왕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아시나요? "수원군의 의왕면 고천리에서는 삼월 삼십일일 밤에 다수한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 경관주재소에 대하여 폭행을 함으로 수원주둔병대가 출동하여 해산시켰다는데 주모자로 인정할 만한 자 46명을 체포하였다가 그 이튿날 41명만 태형에 처하여 방송하였다더라."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 주민 800여명(당시 의왕 주민 수는 2천여 명에 불과했다)은 의왕면사무소(현 고천동주민센터)에 모여 고천경찰관 주재소(현 고천약국 부근)와 지지대 고개까지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주민들과 함께 기독교인들과 천도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와 일본군 육군성에서 1920년 12월 30일 발행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를 보면 일제 경찰은 군대를 불러 시위..

[기억-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수필 집 문을 열며/ 마음의 고향 시골에는 폐교가 많다. 가르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인데 정말 시골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게임방에 PC방 노래방 만화방 쯤 갖춘 소읍은 나와야 학원도 보이고 아이들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그렇게 불러대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동요를 요즘은 더 이상 찾지들 않는 것도 같다. 내 어릴 적은 응원가가 바닥이 나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이어서 부르곤 했다. 고향의 정서는 결국 고향을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였을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동요의 끝머리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구절이 새삼스럽다. 그래도 내 세대는 떠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득하지 않은가 한다. 이 나라 산천이 괄목할 ..

[기억-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 늘 푸른 운동장 ) 나는 안양 초등학교 38회 출신이다. 입학하던 해가 1964년이니 우리학교는 일제 때 생긴 안양에선 제일 오래 된 학교다. 그 시절의 안양은 시흥군에 속하는 읍 소재지였으며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의 안양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동문인 셈도 된다. 지금의 안양은 과거의 논밭이나 하다못해 냇가마저도 시멘트가 덮이면서 모양을 달리 하였고 평촌과 산본이라 하는 신도시까지 생겨나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된 것이지만 당시 안양은 공설 운동장 하나 없는 여느 가난한 시골의 소읍과도 같았다. 4학년 때 배운 지리책에 안양은 아주 짤막하게 6 25때 격전지로 포도밭이 많은 어령칙한 동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우리 집 주변은 모두가 포..

[기억-조성원]무의식에 스며들었던 국민교육헌장

[조성원]죽어라 외웠던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 1968년 12월 5일 . 결혼기념일은 가물가물한데 그 날만은 까먹지를 않는다. 아침에 눈뜨면 스피커에서 국민체조 노래가 훈육처럼 흘러나오던 그 무렵. 학교 모든 교실 앞에는 붓글씨로 쓴 국민교육헌장 액자가 정성스레 놓여 있었으며, 모든 교과서 앞부분에 실려 있었고, 입학식 졸업식은 물론 모든 국가 행사 앞부분 식순에는 반드시 국민교육헌장 낭독이 있었다. 기독교 신자들이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줄줄 암송하듯이 외우고 통독한 덕분으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지금도 한 줄 빼놓지 않고 적을 수 있다. 그 시절 그렇게 외워댔던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면 달콤하기는커녕 머리 쭈뼛 서고 통증을 유발하는..

[기억-조성원]작은고추처럼 매웠던 소골안 아이들

[조성원]작은고추처럼 매웠던 소골안 아이들 (외국에 나가면 꼭 떠오르는 말) 작은 고추는 맵다. ' 참 그 속담은 우리에게 유효적절하다. 체구가 약간 작더라도 벅찬 일을 잘 치러내는 강단 있는 사람을 가리킬 때 흔히 우린 이 말을 쓴다. 어릴 적 앞줄을 벗어날 수 없던 아이로 그 말이 그 시절부터 꽤 위로가 되고 또 든든하였다. 난 그 말을 한 기억으로 꽤 실감한다. 원래 수컷들이란 자웅을 겨뤄 제일 힘이 센 자를 고르는 본능적 기질이 있지 않은가. 그 시절 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부가 지배하는 교실안과 교실 밖의 공기는 사뭇 달랐으며 서열 또한 틀렸다. 시내 쪽에 사는 아이들은 소골안쪽 보단 얼굴도 뽀얗고 행색도 괜찮았다. 타이스 양말을 신은 것 하면 가죽 가방에 운동화를 버젓이 신고 다니는 ..

[기억-조성원]추억의 세발자전거

[조성원]추억의 세발자전거 (세월따라 입맛도) 이제 그 자체가 그리움이 되어버린 빛바랜 사진첩. 그 안에는 백옥무하(白玉無瑕)의 작은 내가 예쁘게 들어 있다. 그 시절을 산 누구라도 그러하듯 내게도 가슴 깊이 간직하는 반쯤은 찢겨 나간 그리운 흑백 사진 몇이 있다. 사진은 지나간 때를 기억하지 못하여 멈추었던 시간의 한 모습을 보고 그때를 떠올리는 묘미로서도 괜찮지만 정작 값지고 고마운 것은 정녕 알 수없는 과거로부터 지금을 현실감 있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할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하지만 바로 보는 듯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왜 삼촌들이 여동생을 보고 할머니와 어쩌면 그렇게 꼭 빼닮았느냐 하는지 잘 이해한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닮았다. 머리에 포마드를 짙게 바르고 두꺼운 오버를..

[기억-조성원]안양읍내 하나 있던 안양목욕탕의 추억

[조성원]어렷을적 명절날 목욕탕의 추억 (묵은때) 명절맞이로 귀경을 서둘러 떠난 직장이 모처럼 한가하다. 퇴근 정시보단 조금 이른 때 거리로 나왔다. 가볼 곳이 있어서다. 누가 그곳을 들리라고 하는 것은 아닌데 이 무렵엔 꼭 찾게 된다. 기실 그제도 곳을 다녀왔으니 오늘 또 가기는 그러하다. 그럼에도 곳을 가지 않아서는 왠지 찜찜하다. 생각해보니 무릇 그 시절 이 맘 때 찾던 그 습성이 나를 잡아끄는 것일 터 이 또한 명절의 한 풍습이라 해두어야 할 것이다. 역시 생각한 대로 곳은 엄청 붐빈다. 오늘 같은 대목은 근래에 드문 일이다. 이때쯤을 상인들은 대목이라 하던데 바로 이곳이 대목이다. 찜질방인가가 생기고선 할일이 없어져 곳이 객쩍다 하였는데 모처럼 신바람이 난다. 해를 넘기기 전 묵은 때를 벗겨야 ..

[기억-조성원]어머니 품 같은 수리산의 추억

[ 조성원]어머니 품 같은 수리산의 추억 (수리산을 아시는가) 수리산은 안양중심부에 위치한 음기가 서려있다는 자그마한 육산이다. 대표적인 봉으로는 산본 신시가지에 서있는 슬기봉(475m), 안양시내 서쪽 중앙에 위치한 관모봉(426m), 그 뒷 편에 서서 넌지시 주봉임을 알리는 태을봉(488m)으로 이루어졌다. 인구 2만의 그 시절의 읍내로부터 인구 50만이 넘는 지금까지 수리산은 그들을 모두 보듬은 안양의 어머니다. 수리산을 오르는 데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같은 집에 태어났어도 서로의 삶이 다르듯 수리산은 마치 이복동생을 데리고 있는 양 가는 갈래에 따라 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느낌을 제각기 전해주며 비교적 넓게 퍼져있다. 수리산 남쪽의 산본리 버스종점 인접한 한양아파트에서 약수터를 지나..

[기억-조성원]1960-70년대 그 시절 안양의 기억

[조성원]1960-70년대 그 시절 안양의 기억 (그 시절의 안양) 오늘 새벽도 추적추적 늦은 여름비를 뿌렸지만 가는 세월은 이정표 없이 무작정 달리는 기차와도 같이 한 계절의 끝을 알리는 정거장을 이미 통과하였습니다. 창문 틈에 서린 기운이 어제 같지가 않습니다. 그 가는 속도는 얼마쯤 되는 것일까요. 덜 여문 창밖의 그림 속엔 어느새 추석이란 명절이 다가섭니다. 이때쯤이면 자연 마음은 고향을 향합니다. 나 역시도 안양을 떠난 지 햇수로 25년이 넘습니다. 흘러간 세월만큼 너무도 변한 안양! 동구 밖에 포도밭 고추밭 냇가가 그대로 있는 정감어린 안양도 아닌데 지금도 여전히 애착을 느끼는 것은 내 삶의 깊이만큼이나 골 패인 마음을 고향의 흙냄새로 치유 받고 싶은 단순한 동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영상]안양산책-김혜련작가(2015.11.14)

안양산책 Inki and Herian Play 에니메이션 김혜련 편집 홍인기 유튜브 게시일: 2015. 11. 14. 영상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4ses8jHj3Vg&t=4s 오랫동안 안양에서 거주하였지만 안양이란 지역은 학교를 다녔던 동네, 돌아와서 쉬는 잠자리 이상의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관양동에서 과천을 거쳐 서울로 오가는 생활이 반복되는 일상에 만안구는 효자동의 골목길 보다 심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한 동네의 구석구석을 걷는 일은 제가 사는 지역에 대한 관찰과 더불어 일상의 패턴에서 벗어난 짧은 여행이었다. 여러 양식들이 뒤죽박죽 섞인 원도심의 마을은 특별한 아름다움을 주진 않았지만 자연의 풍파를 함께한 세월 속에 특유의 어울림이 있었다. 한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