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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렬]옛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안양 미래문화유산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중앙로변에 자리한 농림축산검역본부. 안양지역민들에게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란 명칭으로 더 친숙한 곳으로 2016년 4월이면 안양시민들의 공간이 되는데 시가 어떤 공간으로 활용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앞마당 화단에 세워져 있던 축혼비부터 보아야 한다.(이곳에 있던 농림축산검역본부가 김천으로 이전하면서 가져갔다) “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히 잠드소서. 1969년 10월 20일”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동물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을 한다. 결국 이 동물들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 시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꽃 피는 철에는 붉은꽃으로 에..

[의왕]1974년 개업한 40년 전통의 오봉막걸리

40년 넘는 오봉막걸리 예전에 안양과 군포, 의왕에는 막걸리를 만드는 술도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의왕에 단 하나가 남아있다. 1974년에 개업한 오봉주조로 그곳에서 만드는 막걸리가 오봉막걸리다. 한 자리에서 술을 빚은 역사가 42년나 되는 전통의 술인데 탁주로써 맛이 순하고 마신뒤에도 머리가 아프지않아 지역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오봉막걸리는 의왕의 오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하여 의왕을 대표하는 산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지만 70년대에는 고천막걸리라 불렀다. 당시 술 맛이 좋아서 안양 중앙시장 상인들이 파주상회 건물(중앙시장 1문 입구 우측) 옥상에서 척사대회를 여는 날이면 말술을 주문해 받아 마실 정도로 안양막걸리 보다도 인기가 좋았다. 오봉주조(대표 홍순현)는 경수산업도로 의왕파출소..

[최병렬]안양에는 국내 최대규모 개미제국 있다

안양시 안양6동에 자리한 정부 공공기관인 농림축산검역본부. 일제 때인 1942년 이곳에 터를 잡은 조선총독부 가축위생연구소 지소에서 출발해 이름만 바뀌며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곳 정원 지하 땅밑에는 수십년간 존재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개미제국이 있다. 안양 사람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명칭이 바뀌기 이전의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라 불리우는 이곳의 정원은 수령이 50년은 넘는 듯한 아름드리 벚나무들과 가슴높이 지름이 1m가 넘는 거대한 버드나무가 있는데 정원 경계석과 경계석 사이의 수많은 틈새들을 출입구 삼아 드나드는 커다란 왕개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검역원 정원이 개미 초군체임을 처음으로 확인한 이는 ‘개미제국의 발견’이라는 책을 낸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다. 최 원장은 국립..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8)/ 안양사(安養寺)와 정덕한(鄭德漢)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8) 안양사(安養寺)와 정덕한(鄭德漢) 안양에 경사가 났다. 유유산업 부지에서 발굴된 매장유물 가운데 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발굴조사단은 수습된 기와류, 전돌류, 도자 및 도기편 조각, 철제 동물 장식들의 유물과, 하천의 돌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중문→탑→금당(부처를 모신 공간)→강당→승방으로 연결되는 건출물터와, 좌우에 회랑(복도)이 있는 구조인 점에서 하부 초석층은 통일신라 시대의 중초사터이고 상부는 안양사의 초석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는 미확인의 설(說)로만 떠돌던 안양사 터가 유유산업부지라는 것이 공인된 것이며, 이로써 ‘안양’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그 생모(生母)가 공식 확인된 것이다. 그러하니 경사가 아니겠는가. 아니 그냥 경사가 ..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7)/ '홍사영-안양예술인장'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7) ‘안양예술인장’ 지난 11월9일 이른 아침 7시에 샘안양병원에서 ‘故홍사영화백 안양예술인장’이 안양예총 주관으로 거행되었다. 이는 안양 최초의 일로서,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물론이요 지역사회 전반에 걸친 뜻 깊은 영결식이었다. 고인이 생존시에 위문을 마친 예총 및 미술협회 임원들은 상황의 위급성에 따라 작고시에 ‘안양예술인장’으로 치룰 것을 잠정 결정하고, 유족의 동의를 얻고 그대로 집행한 것이다. 한 마디로 고인이 안양지역사회에 남긴 예술적 공로에 대한 예우인 것이다. 故홍사영화백의 생전의 활동상을 여기 일일이 예거할 수는 없다. 고인은 국전 입선(1981) 이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펼쳐 7회의 개인전, 40여회의 국내외 전시회 출품, 그리고 안양예총 회장을 비롯한 한국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6)/ 박두진 시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6) 박두진 시인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혜산(兮山) 박두진 시인은 1916년 안성 출생으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시인의 유명도에 비해 안양과의 연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최근에 ‘안양시사’ 발간을 위한 자료정리와 ‘안양의 자랑거리’ 선정위원회에서 박두진 시인이 화두에 올랐던 터라 안양 관련 부분을 정리·소개해 보고자 한다. 박두진 시인은 1942년 8월에 일가족 5인이 안양으로 이주하고 금융조합의 사무원으로 취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일가족은 안양중앙교회에서 1944년 8월에 세례를 받고, 1948년에 장로에 장립되었다. “안양으로 온 뒤로 그간 이렁성 하는 중에 아직 아무 것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악 못 미처의 풍광은 매..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5)/ 안양을 ‘시의 금광’으로 만듭시다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5) 안양을 ‘시의 금광’으로 만듭시다(2009.03.20) 나는 지난 번 칼럼에서 미국의 ‘시의 달’(4월) 행사들을 소개하면서 평소 생각하고 있던 대안들을 제시해 보겠노라고 했다. 이에 앞서 먼저 전제할 것이 있다. 우선 이 글은 시를 쓰자는 것이 아니라 즐기자는 것이다. 삶의 질이란 즐거움을 많이 느끼며 살수록 증가된다. 의식주는 그 즐거움의 3대요소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밥을 먹으며, 좋은 집에서 살면 행복하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몸에 해당된다. 마음에도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밥을 먹이고, 좋은 집을 지어주면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몸의 의식주에는 돈이 많이 들지만, 마음의 옷·밥·집에는 돈이 그리 필요치 않다. 그 마음의 의식주가 바로 문화예술인데, 예술..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4)/ 삼덕공원에 박두진 시비를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4) 삼덕공원에 박두진 시비를(2008.11.07) 삼덕공원 기반공사를 위해 설치됐던 가림막이 제거되고, 옮겨 심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니, 벌써 마음은 공원길을 걷게 된다. 안양시가 근래 펼친 사업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문화예술 부문이 아닐까 한다. 이들 대부분은 전임 신중대 시장의 재임시에 선포된 ‘아트 시티’ 만들기에 따른 일련의 사업들로서 도심 간판 교체, 공공예술 프로젝트, 만안구 디자인 사업, 예술공원 조성, 문화재단 설립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삼덕공원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것 한 가지도 이의 제기없이 진행된 일이 없다. 삼덕공원이 특히 그러했다. 공원부지 제공자와의 인간적인 갈등, 지하 주차장 설치를 둘러싼 시민단체들과의 불협화음, 주변..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3)/ 내가 생각하는 ‘안양사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3) 내가 생각하는 ‘안양사람’ (2008.11.28) ‘안양사람’ 이라는 말은 곧바로 ‘안양토박이론’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내가 여기 쓰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분법적인 얘기가 아니다. ‘안양사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겠다. 첫째는 법적으로 안양시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안양시민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가운데는 주민등록만 안양시에 되어 있고, 실제로는 타지에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주민등록은 타지에 되어 있고 거처는 안양시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법적인 안양시민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법적인 안양시민은 안양에 세금을 내고, 안양에서 투표권을 행사한다. 선거때 불거지는 위장전입 문제도 투표권 때문이다. 명예시민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2)/ ‘대동문고’와 ‘전영선’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2) ‘대동문고’와 ‘전영선’ (2008.12.12) 1963년 대학 졸업반 때, 나는 안양여중고에서 아르바이트로 배구코치를 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어느날, 교문을 들어서려는데 한 젊은이가 상자 판지에 책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이때나 그때나 책을 좋아 했던지라 몇 권을 골라 샀다. 며칠 후에 또 그가 왔다. 책을 또 샀다. 그러기를 몇 차례,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우리는 곧 친한 사이가 됐다. 그가 바로 오늘날 대동문고의 전영선 사장, 그와의 교우는 그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45년 전의 일이다. 전영선 사장은 ‘자수성가’보다 ‘입지전적’이라는 말에 더 합당한 사람이다. 전남 영광 출생으로 가정 형편상 중학교 이상의 학업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자, 고학 일념으로 무조건 가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