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1960년대 안양 영화관의 추억
( 그 시절 영화)
이윤복 학생은 살 길이 아득했다. 온 집안이 그의 구두 통에 목숨을 기대어 살아야 했다. 하루도 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손엔 책가방 또 한 손엔 구두 통. 비오는 날엔 껌팔이. 여름내 보리 이삭을 줍던 동생 순나는 집을 나갔다. 배고파 눈이 휭휭 할 땐 아버지 약 살돈을 참지 못하여 수제비를 사먹고 울곤 하였다.
그래도 그의 가슴엔 질긴 삶의 예울 소리가 한없이 퍼진다. “ 껌 사이소 , 마 예 껌.” ‘저 하늘에도 슬픔이’ 아마도 이 영화가 내가 본 최초의 영화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너무도 많은 눈물을 짜 낸 덕분으로 여전히 기억이 생생한 무연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애처롭고 불쌍하여 울었고 엄마를 찾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팠다.
나를 데리고 화단극장이란 곳을 데리고 갔던 누나도 원 없이 울었다. 대구에 살았다던 그 영화의 주인공은 지금은 어찌 살까. 그 시절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모를 리 없다. 이후 나는 그 영화관을 몇 번인가 더 찾을 기회가 있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몰려가 보는 영화가 빨간마후라 같은 반공을 주제로 한 영화거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부응한 팔도강산 같은 계몽영화였다.
충무공 이순신 영화는 모형 거북선을 안양 유원지 풀에 띠워 촬영을 한 영화다. 촬영을 한다기에 동네 아이들이 벌떼같이 몰려 가 김진규도 보고 최은희도 보았다. 생각과는 달리 촬영은 꽤 싱거웠는데 영상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중후하게 다가와 속는 기분도 들었다. 역 근처 구석진 곳에 위치한 그 영화관은 이내 없어지고 안양 중심 한복판에 읍민관이란 곳이 들어섰고 훗날 삼원극장이란 곳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황금박쥐에 황금철인이란 만화영화를 보고 ㅇㅇ7도 이소룡에 왕유가 나오는 협객 영화도 그때 보았다. 이후 즐겨 보았던 것이 중국 무술영화다. 사실일리 없다 하면서도 붕붕 나르는 신출귀몰에 빠져 열댓 편 이상 보지 않았나 싶다. 즐겨 보다보니 나중엔 저 정도는 연마를 하면 실제로 나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명(武名)을 떨치는 무림의 고수, 그들이 실감나게 존재한다. ‘한 수(手)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란 말이 절로 나온다. 빨려들다 보면 밖으로 보이는 기예(技藝) 뿐만 아니라 정심한 무술철학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을 절감하리란 생각도 든다. 정말 자질을 타고나 평생을 무술 연공에 바쳐 절세 신공(神功)을 터득한 기인(奇人)들은 붕붕 나르지 않을까. 난 지금도 시공을 초월한 고수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영화가 끝이 나면 주인공의 신출귀몰한 무술 솜씨는 금세 다 까먹고 사부가 더 오랜 기억을 차지한다. 영화에 나오는 사부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고수는 은둔의 세상을 살며 마음을 닦는다. 심산에 터를 잡고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살다가 어느 날 쓸 만한 녀석이 나타나면 아낌없이 고수의 그 모든 것을 다 전수한다.
감추고 기피하지 않으며 마음까지 다 전한다. 그런 사부는 무술의 강인함과는 달리 부드럽고 소박하며 온화한 인품으로 곧잘 등장한다. 연약한 구석과 정이 있으며 여유가 있다. 의지의 주인공은 갈 길을 떠날 쯤 적은 또 적을 낳는다는 사부의 말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음을 넌지시 가르쳐 주는 듯도 하고 고수란 마음이 우선한다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같다.
고수는 죽음의 운명 앞에서도 여유가 있으며 가르친 보람에 늘 훈훈하고 따스하다. 그런 무술영화를 즐겨본 탓인지 나는 영화 속 다정다감한 고수가 마음에 든다. 이는 아마도 훈훈한 마음이 녹아나야 진정한 고수란 느낌을 내게 주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남자는 그런 무술 영화를 많이 보아야 한다고 떠들었지만 실은 내가 감명 깊게 본 첫 영화는 사랑은 결코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사가 나오는 러브스토리란 영화이다. 당시 여중생 아이들과 같이 있다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단체관람 덕분에 단발머리 나풀대는 그 아이를 그 속에서 발견하여 더욱 그러했던 것 같기도 하다.
참 문명의 혜택은 좋은 것이다. 단 6년의 사이 나는 많은 문명의 홍수를 만났다. 4학년 때 금성사에서 나온 선풍기를 하나 샀으며 5학년 때 전화를 놓았고 RCA 미제 TV를 6학년 여름 쯤 들여 놓았다. 나는 전화기가 하도 신기해서 수화기를 잡고 후후 하며 괜스레 말을 청하곤 했다. TV는 그야말로 상상도 못한 세상 탈바꿈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5시에 하는 송승환이 나오는 어린이 시간 라디오방송은 팽개치고 TV에 빠져들었다. 일요일 낮에 재방송으로 다시 보여주는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신문에 나온 예고프로를 콕콕 찍어가며 달 착륙 실황중계도 김일의 레슬링도 그 시절 유독 많았던 권투시합까지도 빠트리지 않고 보았다. 그래도 재밌는 프로는 외화였다.
주말 토요일 오후 타잔이란 프로를 보고 월요일에는 보난자란 프로를 보았다. 우리나라 드라마와는 달리 대부분 야외촬영이었으며 권선징악만이 아닌 다양한 소재에 뜻이 있으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렇게 TV에 반정신이 팔린 무렵 어른들이 으레 하던 말은 이제 그만 보고 공부 하라 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 때 뿐인 생각이 되고 말았지만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공부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영화 덕분으로 깊이 한 적이 있다. 마부란 영화이다. 말 한 필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는 홀아비인 마부는 말을 끌고 서울 거리를 헤매지만 빚 때문에 말을 마주한테 빼앗기기도 한다. 그 때 말이 얼마나 초롱초롱 서글픈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보던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중앙청 앞 가로수에 마차를 세워놓고 자식의 고시발표를 지켜보는 마부의 그 애틋한 장면은 나를 꽤 울렸다. 서울에 오르면 104번 안양 가는 버스를 중앙청 앞에서 타게 되는데 젊은 시절 그로 그곳에 서 있을 때면 특유의 말투로 감격하는 마부의 김승호 얼굴이 부스스 떠올랐다. 그런 때는 부모님에 대해 또 송구한 마음이 들곤 했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 수필가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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