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552

[자료]안양 마애종 연구 자료 모음(1)

[자료]안양 마애종 연구 자료 모음(1)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화장실 뒷쪽의 자그마한 길옆 암벽에 기와를 얹은 보호각 하나가 있다. 그 안에는 범종 하나가 조각돼 있는데 경기도유형문화재92호로 지정된 마애종(磨崖鐘, 만안구 석수동 산32)이다. “우리는 세계유일의 마애종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포럼은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안양지역사회에서는 민예총을 중심으로 지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안양세계 마애종 문화포럼’을 통해 마애종의 보물 격상 운동과 더불어 '종교 그 이상의 울림'을 지향으로 하는 영성운동이 잠사나마 전개됐었다. “마애종이 담고 있는 ‘평화와 이상향’의 마음은 어느 종교에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형식을..

[기억-정진원]의왕 덕장골 촌놈 콤플렉스

그때는 백성의 대부분이 촌놈들인 세상이었는데도 촌놈 연쇄 콤플렉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었다. 아무리 화려한 덕장골의 유년시대라 할지라도 어머니 안의 꽃궁에 대해서 그것은 콤플렉스였다. 아무리 덕장골이 꽃대궐이고, 그 안에 기화요초, 은빛 강물이 흐르고, 그 위를 쪽빛 바람이 불어도 저녁이면 스산하고, 그리움과 기다림에 겨워 골짜기의 밤이 무섭고, 싫었었다. 서울이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에 촌놈 콤플렉스가 우리들을 한없는 어리보기들로 만드는 것 같았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요물들이 밀려들어왔다. 지리가미와 시레이션, 분유와 디디티, B-29와 쌕쌕이(제트기), 탄피와 앞 논에 박힌 박격포, 인민군과 중공군, 데스까브도(철모)와 덴찌(손전등). 생소하고 신기한 것들이 주어졌을 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

[기억-정진원]한 장의 졸업사진, 덕장초교 10회

현실보다 이상이 언제나 더 화려하다. 사실보다 이미지가 더 아름답다. 현상보다 환상이 더 환상적이다. 눈으로 보는 인상보다 마음속에 박힌 인상이 더 인상적이다. 펜팔이 줄 수 있는 연면한 동경과 환상은 맞선의 자리에서 쩔쩔매게 되는 어색함과 대개의 실망보다 언제나 매력적인 것이다. 사진은 글자대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찍어낸 것이다. 거기에 시골 사진사의 에스프리가 깃들어 있으면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는가. 생긴 대로 박아낸 사진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사회심리학적 행동 유인들이 내면화 되어있고, 험산준령이나 구비치는 강 같은 개인사의 곡절들이 그 얼굴 하나하나에 박혀있는 것이다. 같은 집단의 단체사진을 비교분석해보라. 언제나 회중의 변두리에 밀려나 있는 사람은 머리만 중심부로 향해서 기울이고 있..

[기억-정진원]덕장골과 큰집골

덕장골과 큰집골 [큰집 “죄수들의 은어로, ‘교도소’를 이르는 말”]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이 서너 채 집들로 된 작은 동네였는데, 동네 이름이 ‘덕장골’이었다. ‘덕짱꿀’이라 소리 나는 대로 불렀었다. 그곳에 큰집이 있다고 해서 그런 동네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큰 ‘덕(德)’, 집 ‘장(莊)’하여 ‘덕장골’이 되었단다. ‘큰집골’이라 하면 더 좋았을 것을 딱딱한 한자식 이름이 되어 좋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그야말로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큰집골에 진짜로 ‘큰집’이 들어오게 되었다. 1987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가 의왕시 포일동 큰집골, 덕장골로 밀고 들어왔다. 국어사전에서 ‘큰집’을 찾으면 네 가지 정도의 뜻을 풀이하고..

[자료]콜롬비아로 시집간 동해급 마지막 함정 '안양함' 역사

안양시청사 1층 홀 국제·국내 자매도시 기념품 진열장 속에는 한 척의 배 모형이 있다. 해상초계 및 대공전투 임무를 띠고 1983년 취역해 28년간 바다를 지키다 2011년 9월 28일 전역식을 갖고 퇴역한 우리 해군의 동해급 마지막 초계함(PCC-755) '안양함'이다. 이 안양함이 2014년 7월30일 경남 창원시 진행군항 부두에서 양도 기념식을 갖고 콜롬비아로 시집을 갔다. 콜롬비아 해양에서 불법 마약거래 근절과 해상환경 보호 등 콜롬비아의 바다를 지키는 새 임무를 위해 우리 군이 해외에 양도하는 첫 초계함급 군함이 됐다. 이는 콜롬비아 측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콜롬비아는 6·25전쟁 당시 호위함과 병력 5천100명을 파병한 중남미 유일의 6·25참전국으로 212명의 콜롬비아 장병들이 희생됐..

[기억-정진원]1950년대 용어 기브미 껌과 갓댐

기브미 껌과 갓댐 6ㆍ25전쟁 직후에 우리 마을에 이러한 말들이 어떻게 해서 들어왔는지 잘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헬로우, 기브미’와 ‘갓댐’과 ‘사나나베치’ 등 당시로서는 아주 낯선 방언들이었다. 내 나이 예닐곱 살 때였으니까 누구들이 하는 말이 하도 이상해서 마음속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모국어도 제대로 다 하지 못하는 형편에 듣도 보도 못한 말들이 골짜기 안에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미군이 우리 동네까지 진주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맥아더 장군이나 된 것처럼 자랑삼아 인천상륙작전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해병대 출신 동네 아저씨가 전해준 것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헬로우), 손 벌려 달라 하다가(기브미), 못된 놈(갓댐)이라 욕먹는 ..

[기억-정진원]검둥이와 독구

검둥이와 독구 우리집 개 이름은 검둥이였다. 옛날 어린애를 낳으면 1 년이나 2 년 기다려봐서 호적에 올렸었다. 면사무소에 가는 사람 편에 부탁하면 가는 사람 마음대로 즉물적(卽物的)으로 작명해서 호적에 넣었던 시절도 있었다. ‘검둥이’란 이름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냥 부를 때는 ‘워리 워리’ 하였는데, 지금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있다. 검기 때문에 검둥이였다. 고유명사이기에는 싱거운 이름이었으나 검둥이라 부르면 꼬리를 치고, 잘 따랐으므로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토종 잡견이었다. 잡견이란 말이 개에게 조금 미안하므로 보통개라고나 해 두자. 얼굴이 넓적하고, 귀는 아래로 덮여 있고,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온순하게 생긴 개였다. 아무 것이나 잘 먹었다. 특별한 볼 일 없는 개여서 밤이 되면 달보고..

[기억-정진원]의식과 지평의 끝선이었던 의왕 하우고개

하우고개 ‘하우고개’ 란 고개 이름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다고 한다. 경기도 부천시에도 있다. 왜 하우고개라 하였을까? 넘기 어려운 고개를 힘겹게 오를 때 ‘하우 하우’ 가쁜 숨소리에서, 아니면 고개 마루에 올라앉아서 내쉬는 ‘하아― 하아―’ 소리에서, 또는 산적이나 귀신을 만난 두려움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온 외마디 소리에 따른 의성어일 듯싶다. 학고개(鶴峴)가 음운 변화를 거쳐서 하우고개가 되었다고도 한다. 여우가 출몰하는 여우고개(狐峴)를 좋게 말해서 소가 드러누운 모양(蝸牛)의 고개, ‘여우(如牛)’로 하고, 그 ‘여우’를 훈차해서 다시 ‘여우고개(狐峴)→하우고개’로 되었는지? 어색한 억지 해석은 고개에서 일어난 돌발 사건에서 숨을 구석이 어디인가? ‘하우(何隅)’인데 현학적이기만 하지, 가당치 ..

[기억-정진원]어릴 적 제비울@꿈속고향.사이버허공

제비울@꿈속고향.사이버허공 어릴 적 제비울은 꿈속에 있었던 동네였다. 하늘가 어디엔가 있었을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다. 가끔 어른들의 이야기 결에 들려오곤 했던 동네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조금은 특이해서 일찍이 어린 아이 뇌엽에 끼어들게 되었나보다. 시골 동네 이름들이 대개 새터, 양지편, 벌말, 논골 등 사실적인 것들이 대부분인데, 제비울이란 이름은 이색적이다. 아름다운 지명이다. 그곳 이야기는 무슨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었다. 고향 마을 덕장골의 작은 분점이 어느 산 구석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왜 제비울이라 하였는지 모른다. 봄날에 제비들이 먼저 찾아와 울안으로 왁자지껄 모여드는 고요한 동네여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제비들의 동네였던가 보다. 제비는 그 ..

[기억-정진원]마음속의 청산 청계산과 청계사

청계산(淸溪山)은 어릴 적 우리들 마음속의 청산(靑山)이었다. ‘살어리랏다’ 청산이었다. 나무와 풀들과 온갖 덩굴들이 어우러져 숲이 되고, 숲이 수해를 이루어 우리들은 파도를 타듯이 울렁대는 수림 위에서 자맥질했다. 아니 운해가 되어 스펀지 구름 위에서 텀블링을 하듯이 했었다. 아프리카에만 따로 밀림에 타잔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너구리나 고라니만 우리와 아주 다른 산짐승이 아니었다. 머루랑 다래랑 널려 있었다. 우리들은 청산에 청사슴이 되어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아니면 그곳에 청벌레가 되어 나뭇잎 뒤에 붙어 있어도 좋았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푸른산에 살고 싶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푸른산에 살고 싶다. 「청산별곡(靑山別曲)」첫 연 청계산 깊숙한 속에 청계사 절이 있었다. 한직골, 새말,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