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최승원]6.25전쟁시대 안양(2022.10.18)

안양똑딱이 2022. 10. 18. 22:46
6.25 전쟁시대 안양
 
6월25일 새벽4시 전면남침으로 6.25전쟁이 터지자 안양 비산동이 술렁거렸다.
한강교가 28일 사전 폭파되어 7월3일 북한군전차 한강도하로 남침이 다소 지연되었으나 7월4일 한강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안양지역은 산세로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 남침시 국군의 안양지역방어는 견고했다고 인민군은 기술하고 있다. 탱크에 밀려 안양을 포기했지만 무기가 같은 수준 이라면 한국전쟁을 안양에서 막아냈을 것이다. 안양함락직전 안양역 남측 건널목에 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남부여대하고 하얗게 깔려있었다. 모친이 철길에들어서자 넘어져 무릅에서 피가 철철 나와 우리는 비산동 집(심재황 초교 동기집) 부엌채로 귀가 하였다.
동네에 심부자 집 큰기와 집이 인민군내무서로 징발되어 초병이 칼이긴 총을 메고 지키는 것을 보았다. 인민군 육류는 현지조달로 주민들이 교대로 공출당 했다. 우리 집 새끼 밴 되지가 공출되었는데 새끼는 바께쓰에 담아 우리에게 보내왔다.
모친은 여자경찰 2기 경력 때문에 내무서에 불려가 모진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혼줄 난후 집에 와 경찰근무시 앨범사진을 모두 아궁이에 태워버린 기억이 난다.
승승장구과정에는 총살을 삼가고 명단만가지고 있다가, 불리하면서 불러다 2동 밤나무 숲(양명고남측)에 세워놓고 총을 쏘았다고 한다. 이후 제재소에서는 이곳나무는 총알이 박혀 켜주지 았았다고 한다. 낙동강전투시 안양은 후방이라 조용했고 주변에서 전쟁정보를 알려주어 미리 도망가게 하였다고 한다. 나는 먹지못하고 혼자 비산동 개울 옆에 기운 없어 누워 있었는데 지나가든 어른이 엔병 걸렸느냐는 질문을 받은 기억이 난다.
해방 후 군포초교 여선생(경기여고 졸)지낸 할머니를 뉴질랜드에서 만났는데 아들이 교민인데 이집 민박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적측가족이 어려울 때 먹 거리를 조금 주었는데 답례로 위험을 미리 알려와 몸을 피하였다고 한다. 도피중 중간에 걸렸을 때도 금부 치로 해결 통과되었다고 밤을 새워 이야기해주었다.
적치시 안양은 비교적 서로 도우며 위기를 넘어 갔다고 본다.
1951.1.4 후퇴시는 국군요양부대가 비산동 태평방직관사에 체류하는 바람에 우리와 외가 가족은 부탁해서 군트럭 타고 옥천과 대전으로 편히 피난하였다. 안양역에서 탄약열차수송열차가 고장으로 피난민 하차 시킨 후 폭파시켜 잔해가 60년대 초에도 열차바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리사고를 참고하면 그 피해를 짐작 할 수 있다.
옥천에 큰 한옥(육관수소유) 육영수여사 친정에도 구경가 보았다. 밤에는 공비들이 옥천경찰서를 습격해 경비병을 죽이고 항문에 방맹이를 박았다고 하였다. 나는 영양실조로 앞을 못 보았는데 동네사람이 개울송사리를 끌여 먹으라고 해서 나았다.
9월20일 국군 해병대와 미해병 제5연대, 한강을 도하한 후 수색으로 진격 안양에 육박, 영등포 돌입. 이날 밤부터 서울에 두 방향에서 진입.
1951년.1월6일 국군 제1사단, 안양부근에서 중공군과 교전
1951.1.24. 미 제5공군 머스키드 유도기 1기, 안양북방16KM에서 북한군포화에 격추당함, 승무원은 헬리콥터가 구출
2월1일 국군, 안양 돌입
4월4일 원주 안양이남 피난민 귀환조치. 국군간성점령, 개성진입.
수리산공격 모락산공격으로 비산동에 미군장갑차가 들어와 아이들에게 껌과 쪼크렛트를 논아 주며서 무전하니 비행기가 와서 잔당이 있는 비산동 산위 당을 폭격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가을에 비산동으로 들어왔는데 시장에 내 세발자전거는 벽에부터 있었다. 지하실 짐이 모두 털려서 거지 신세라 모친이 장에서 개떡 장사하여 끼니를 잊다가 계부가 정월 화토치기에 장사밑천을 날렸다.
수원 세류동 비행장 외곽 경비하는 미군부대영사실에 근무하는 외가친척의 소개로 식당일하며 영사보조원으로 가서, 그집 추운대청에서 이불 덥고 자다가 세류동 한옥으로 이사 갔다. 이 당시 부업은 식당설탕을 철조망 밖으로 던저진 것을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52년 전시에 폭격으로 절반만 남은 적벽돌 2층학교 수원세류국민학교에 입학한다. 2학년초 영통구 곡선동 근처로 이사 갔으나 체력부진으로 지각이 많어 휴학하고 화성 전시학교 광명학교에 잠시 다니다가 안양8리에 이사와 안양초교 4학년에 들어갔다.
전시에는 유원지교실(일본군요양부대막사추정 후에 근명학교)에서 공부하다가, 3학년까지는 텐트교실에서 배우고 4학년 신축교실 인데 일학기에는 책상이 없었고 2학기에 책상10인분을 뒤에 놓고 성적10등까지 배당하여 책상에 않게 되었다.
교육은 스파르타식교육으로 야간보충교육도하고 나는 청소후 교육을 잊고 집에 가다 다시 귀교하여 무서운 매를 맞은 기억이 있다.
주변에 피난타가 한강교에서 죽은 사람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강북에 사는 것이 무서웠다. 공기와 물이 좋았던 안양에 살게 된 사유가 강북은 전쟁 시 피난이 어렵다는 트라우마가 작용했다.
탄약은 후퇴시 폭파하는데 현대에도 참고해야 한다.
현대전에도 전쟁이터지면 차량혼잡으로 작전상 집에 있으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피난가야 후에 조사를 피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평의원

홍익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전겸임교수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운영위원장역입

앙가주망건축사사무소 건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