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118

[기억-정진원]50년 전 안양의 다운타운

50년 전 안양의 다운타운 정진원/ 문학평론가/ 고향 의왕 청계동 50년 전 의왕의 덕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어느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안양의 고모님 댁에 얼마 동안 기숙한 적이 있었다. 등잔불 밑에서 공부했던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전등불을 보았다. 저녁 어스름에 불이 들어오고, 밤늦게 나갔다. 고모님 댁 길 건너에 바로 안양읍사무소가 있었다. 읍사무소를 중심으로 당시 안양의 다운타운(down town), 전문용어로 중심업무지구(CBD)가 형성되어 있었다. 당시 도심지역에는 여러 행정기능이 집중되어 있어서 경관 상으로도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었다. 당시 안양읍사무소, 그 옆에 시흥군청, 군청에서 작은 길을 건너 맞은쪽에 안양경찰서가 가깝게 노른자위 트라이앵글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안양..

[기억-정진원]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기억]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지금 안양역 동쪽 지역 안양1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한 아파트 자리에 일찍이 정기시장이 형성되었다. 안양에서는 유일한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안양중앙시장이 나중에 만들어지면서 이곳은 구시장이 되었고, 얼마 지나다가 사라져버렸다. 시장의 북쪽 끝부분에 있었던 소시장터를 지나서 안양천 다리(임곡교)를 건너면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을 ‘수푸르지’라고 하였다. 그것이 여느 동네 이름과 달라서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마을 이름이 한자로 ‘임곡’임을 알게 되었다. 한자 지명 임곡(林谷)에서 그 훈(訓)을 빌려 써서 수푸르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변화된 ..

[기억-정진원]왜 하우고개인가?

[기억]왜 하우고개인가? 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하우고개’ 란 고개 이름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다. 의왕시 청계동에서 성남시 판교(너더리) 쪽 뫼루니로, 부천시 소사동에서 시흥시 대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하우고개이다.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에서 아미리로 넘어가는 하오고개도 있다. 왜 하우고개라 하였을까? 넘기 어려운 고개를 힘겹게 오를 때 ‘하우 하우’ 가쁜 숨소리에서, 아니면 고개 마루에 올라앉아서 내쉬는 ‘하아― 하아―’ 소리에서, 또는 산적이나 귀신을 만난 두려움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온 외마디 소리에 따른 의성어가 지명으로 굳어졌나? 학고개(鶴峴)가 ‘학고개>학오개>하우고개’로 음운변화를 거쳐서 하우고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정설일 듯싶다. 여우가 출몰하는 여우고개[호현狐峴]를 좋게 ..

[기억-정진원]덕장골과 큰집골

[기억]덕장골과 큰집골 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덕장골과 큰집골 [큰집 “죄수들의 은어로, ‘교도소’를 이르는 말”]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이 서너 채 집들로 된 작은 동네였는데, 동네 이름이 ‘덕장골’이었다. ‘덕짱꿀’이라 소리 나는 대로 불렀었다. 그곳에 큰집이 있다고 해서 그런 동네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큰 ‘덕(德)’, 집 ‘장(莊)’하여 ‘덕장골’이 되었단다. ‘큰집골’이라 하면 더 좋았을 것을 딱딱한 한자식 이름이 되어 좋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그야말로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큰집골에 진짜로 ‘큰집’이 들어오게 되었다. 1987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가 의왕시 포일동 큰집골, 덕장골로 밀고 들어왔다. 국어사전에..

[기억-정진원]‘기차통학’ 시절이 있었다

[기억]‘기차통학’ 시절이 있었다 [2010/11/05 안양광역신문]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기차통학’ 시절이 있었다 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천안역에서 출발해서 안양역을 거쳐 서울역까지 ‘통근(학)차’가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증기기관차가 머리였었고, 나중에는 디젤기관차가 되었으며, 지금은 그마저도 볼 수 없게 된 전철의 시대이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육중한 증기기관차가 수증기 물방울 뿌리며 기적을 울리면서 안양역으로 들어왔다. 서울 학생들의 등교와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에 맞추려면 안양역 아침 통근차의 출발 시각은 오전 7시경이 아니었나 싶다. 통근차를 놓치게 되면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되므로 통근차가 안양역에 들어올라치면 사람들이 허둥대면서 역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저녁때가 되면 두 번인가..

[기억-정진원]1960년대 인덕원 사거리 풍경

[기억]인덕원 사거리 [2010/08/28 안양광역신문]정진원/ 문학박사, 수필가 인덕원 사거리 인덕원 사거리에서 청계 방면으로 진터를 지나 이미 마을을 옆에 두고 작은 고개를 넘으면 덕장골이었다. 50여 년 전 내 고향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을 정도로 서너 채 집으로 된 작은 동네여서, 마을 끝 언덕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하얀 겨울 입김이 보였고, 이웃집들의 애기 우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 등이 모두 들려서, 시쳇말로 프라이버시가 있을 것도 없고, 있어도 지켜질 수 없는 한 집안 같은 동네였다. 느티나무 가지 밑으로 나 있었던 집 너머 오솔길에서 사당골 개울까지와 아래 논가 동네 어귀 향나무에서 뒷동산 소나무가 서 있었던 곳까지가 산토끼 굴 같은 우리들의 둥지였다. 그 당시에 인..

[기억-정진원]의왕 덕장학교 이야기

[자료]덕장학교 이야기 [02/27 네이버블로그]귀천/귀향/귀인 덕장학교 이야기 http://blog.naver.com/jebiul7?Redirect=Log&logNo=70001533333 우리 모교 덕장초등학교 10회 동창생들은 대개 1945년생들이다. 해방둥이가 대부분이었다. 올해가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라니, 우리는 회갑의 나이, 이순(耳順)의 때가 된 것이다.해방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 잘 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다. 하여튼 압제의 땅이 아니라 해방된 신세계에 나왔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모교가 1944년에 개교했다고 하니, 우리들의 삶은 모교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되겠다. 나는 덕장골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덕장골에서 덕장초등학교 이름이 비롯되었다. 내 선친과 작고하신 숙..

[기억-박찬응]생경한 풍경 생경한 추억이야기

[08/09 스톤앤워터 관장] 촌넘이 1970년도에 안양땅을 밟았을적에 딱 신기한거이 두가지였다. 안양천물은 왜 커피색일까? 안양천물은 왜 남에서 북으로 흐를까? 왜 북으로 흐르는지는 아직 30년 넘게 풀지 못하는 숙제로 남아있고 그당시 물이 왜 커피색이었는지 안다. 안양에 와서 첫여름을 만났다. "멱 감으러 가자"는 말에 솔깃해진 나는 무심코 반 아이들을 따라 나섰다. 안양대교 밑으로가서 옷을 벗는다. 홀딱 다리밑은 물이 깊었다. 프림을 석지 않은 검으틱틱한 커피색물에 풍덩 풍덩 자맥질을 하는 친구들을 보고 난 선듯 옷을 벗지 못햇다. 분명 온몸이 검게 염색이 들것 같았다. 연신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친구들을에 끌려 '남한강 물개'의 폼나는자맥질 솜씨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과 찌는듯한 더위가 옷을 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