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경인선, 나중에 경부선 철로가 깔리고, 여기저기 역이 만들어지고, 철마(기차 汽車)가 놀라운 길이와 크기와 대단한 위세로 기적(汽笛)을 울리며 달리는 모습은 보기만 하여도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의 일이었다. 시골 마을길에 소달구지가 고작이었던 시절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때가 어떤 세상이었다는 것과 그 철도, 철마, 역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였다고 하면 공연히 친일 사대주의자들을 추어주는 것이 될 것이므로 알 만한 이는 아는 것이므로 이만 해 둔다. 여하튼 그렇게 만들어진 역은 신문명·문물·인류가 이합집산하는 거점이 되었다. 60여 년 전 필자는 안양역에서 노량진역까지 기차로 통학했었다. 당시 안양역은 단층짜리 역사였다. 그땐 대단한 것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건물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매표창구 한 곳, 오른편으로 대합실이었고 나무 벤치가 둘러 있었다. 한 쪽 구석에 강생회인지, 홍익회인지에서 하는 작은 매점이 있었다. 출구로 나가면서는 목책으로 된 개찰구가 두 곳 있었고 그곳을 지나 조금 걸어 나가면 왕복 철로가 있었다. 네모의 하얀 표지판은 ‘시흥-안양-군포’로 되어 있었다. 철로 건너편으로는 당시 큰 규모의 한국제지공장이 있어서 굴뚝에서 하연 연기인지 수증기인지를 내뿜곤 했는데, 그것이 증기기관차의 그것과 비슷하게 보였었다. 아침저녁으로 통학(근)열차가 한 번씩 다녔었는데, 하루에 타고 내리는 학생들이 수 백 명은 되었던 것 같다. 안양에서 서울에 있는 중·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한 학교에 한 명 이상씩은 있었던 것 같다. 수 십 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경기중의 누구, 양정고교의 누구, 창덕여고의 누구, 서울여상의 누구의 얼굴 모습을 기억한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곳에 역이 만들어지면, 역은 역을 중심으로, 대개는 역 앞에 요즘말로 역세권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그렇게 된 동네가 역전(부락)이다.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단양군 단양읍, 제천시 영천동에 역전, 전 대덕군에 신탄진역이 만들어지면서 역전부락이 형성되었다.
정진원, 문학박사, 의왕시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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