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기억-이용구]1930년대 자동차 운전면허 따기

안양똑딱이 2017. 3. 2. 11:44

♧ 자동차 운전면허 따겠다 ♧                             

글   이  용  구

내가 10여세때 나의 작은형은 나 보다 9살이 위였다 형이 20여세가 넘은 때는 1930년대 후반기 일정 말기  갑자기 아버지께 운전 면허를 따겠다 건의했다 완고한 아버지는 이것을 받아 드릴리가 없었다 네가 먹을것이 없냐 입을것이 없냐 왜 그 위험한 짓을  하느냐며 호되게 질책했다
그 동기는 이러했다 같은 동네의 청년들이 대거 운전면허를 따기로 결의 한것이다 그후 결국 작은형을 제외하고 세사람이 합격을 했다 그런데 그중 한사람이 만주로 가서 화물차 운전수로 취직을 해 많은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와 운전을 하다가 수개월 만에 사람을 치어 구속 당하고 말았다 또 한사람은 성공해  8.15해방후 대통령 전용차 운전을 했으니 대성공이었다
아버지는 그 사고 사례를 들어 비교하며 작은 형에게 말했다 거 봐라 이런 사고가 있으니 너는 잘 그만 두었다고 위로하며 재차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당시 자동차 운전면허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운 참 드문 직종의 직업이고 대단한 기술이라 그 수가 그리 가많지가 않았다 당시 면허는 주로 일본에 가서 따 왔으나 그후 각 도에 하나는 있었는데 서울 경기지구에는 영등포에 생긴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당시 유행어로 운전 면허 따기를 남아일기(男兒一技)라 했다
전자 항간에 3맹(문맹 컴맹 운맹)이라는게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운맹이 었었는데 이제는 모두가 골고루 구분없이 잘하게 되었으니 3맹이란 옛말이 되었다
당시 운전기사의 실태와 행패를 친구들의 말을 들어 보면 당시 지방 버스(예 대구에서 김천 상주 거창행)로 가는데 너무나 운행 시간을 어겼다 한다 운전기사 마음  대로 정차하여 잠도자고 밥도먹었다 한다 정한 시간안에 목적지 까지 가야 하는데 이렇게 늦장을 부리는데도 당시는 별 수가 없었다 한다 이만큼 당당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1920~30년대 우리 고향 안양에는 여객수송으로 보창운수라 하여 경수버스(서울~수원간)가 1일 2~3회 있을뿐 화물등 운반수송 수단은 손수레나 우마차 였다 그리고 벼를 운반 하기위해  두 삼창정미소와 삼광정미소에 영업용으로 각 1대씩 화물차(트럭)가 있었다(당시 도라꾸라 했음)
그런 와중에 뜻 하지않게 사고가 났다 그것은 삼광정미소 주인(이광순)이 자기집 차에 치어 사망을 한것이다 이것은 당대 안양의 일대 큰 사건 이었다 그래서 자동차를 무섭다 했고 모두들 자동차를 경계했다. 가령 도로를 걸어 가다가 자동차 오는 소리가 나면 길 옆으로 피신 했다가 자동차가 다 지나가면 다시 걸었다
그러나 당시 각종 차가 늘어 서울에는 자동차(승용차 화물차 삼륜차등)가 많았다  특히 승용차는 부호나 사업가는 자가용이 있었고 운전기사를 고용했다 차는 최초 일본산인 도요다 회사의 생산차 이고 구형(유선형이 아닌 4각 상자형) 으로 운전기사는 우대 받았다
또한  사소한 고장은 손수 운전 기사가 했으며 트럭은 옆에 조수가 따라 붙어 정비를 담당했고 조수는 그간 터득한 지식으로 운전면허를 따기도했다 그리고 시동을 걸려면 조수는 차 앞에 기구를 넣어 스타칭을 힘차게 돌려야 발동이 걸렸다 만약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조수는 진땀을 흘를려야 했다
1940년이 되자 차츰 자동차는 그 수가 년차적으로 늘어 눈부시게 많아 졌으며 해방된지 어언 60여년이 된 이 마당에 한집에 2~3대는 물론 어느집은 각자 1대씩 또는 산속 오지마을 농가에도 우리 나라 전체 만도 무려 자동차 보유수 1000만대를 훨신 넘었다한다
실로 이는 경악을 금할수 없다 이렇게 되다보니 위 이야기는 진짜 호랑이 담배 먹을때 이야기가 되었고 나 같은 사람도 60에 운전면허를 무난히 따 꼭 12년을 부리다가 72세에 그만 두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