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김인호]군포 욕골 출신 토박이의 1970년대 용호마을 기억

안양똑딱이 2023. 11. 22. 13:14

 

2023년 7월 16일 군포시생활문화센터 다목적스튜디오에서 군포문화재단과 군포문화도시지원센터가 주최한 시민정책연구단 3차 연구모임나의 군포 이야기를 주제로 열렸다.

 

이날 이야기 손님은 김인호씨(61). 김인호씨는 경기 시흥군 남면 548번지에서 태어나 군포초, 안양동중(현 신성중), 안양동고(현 신성고), 한양공대를 졸업하기까지 한 곳에서 살아온 군포 토박이다. 2천년대 이후 용호마을 이편한세상아파트가 들어선 그곳에는 부모님이 여전히 살고 계신다. 네오임플란트 대표이사로 재직 중인 그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 군포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욕골_나는 군포의 면소재지(당말)에서 조금 떨어진 욕골’(용호동)이라는 시골마을 출신이다. 어릴 적 군포라고 하면 군포국민(초등)학교와 군포역, 당말시장(현 군포시장)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시골 면소재지의 면모는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조차 6살 때쯤 전기가 들어왔고, TV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보았다.

 

당시 마을 이름은 욕골’(용호리라고 병용하기도 했다)이었다. 이름의 유래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불렀다. 작은고개 너머 이웃마을은 새탄말이라 불렀는데 아마도 새터마을(신기마을)’의 준말 같다. 욕골과 새탄말에 경주 김씨 씨족이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 살아온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했지만 원래 산이 둘러싼 삼태기 모양이었다.

 

#산제사_마을 뒷산 꼭대기에는 산제사나무가 있었다. 소나무 암수 두 그루였는데 아주 크고 신령스러워 보였다. 음력 칠월 초하루 때는 소를 잡아 고기는 부위별로 동네 사람들이 나눠먹고 소머리는 삶아 산 약수로 빚은 술과 함께 정성스레 산제사를 지내고, 시월 초하루에는 돼지머리를 올려 산제사를 지냈다. 이는 조상님께 지내는 시제와는 달리 산과 마을의 수호신 영령에게 지내는 제사로서, 지금도 동네 선후회에서 잊지 않고 지내고 있고 군포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고 한다.

 

#큰바위(전쟁의 상처)_산제사나무 아래쪽에 지금도 큰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에는 사람이 대여섯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있는데, 나의 할아버지가 파셨다고 한다. 1.4후퇴 이후 욕골마을 일대에 중공군이 잔류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 미군 측이 대대적으로 폭격을 하였으므로 집과 논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살과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피신처를 마련했고, 전투기들이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바로 옆에 기관충알이 박히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내가 대여섯살 때는 폭우 다음날 동네를 돌아다니면 총알이나 탄피 등을 쉽게 주웠다. 주운 대포탄피를 잘라 재떨이로 사용하는 집도 있었다.

 

#파라다이스_어린 시절의 육골 동네는 내 기억 속에 파라다이스로 자리잡고 있다. 봄이면 풀냄새, 신록 우거진 뒷동산에 꾀꼬리 뻐꾸기 우는 소리가 좋았다. 동무(그땐 친구를 그렇게 불렀다)들과 실개천을 따라 뒷동산을 오르면 샘이 있고 버들강아지를 꺾어 피리를 불기도 하고 나뭇잎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뒷산에는 계절마다 먹을 것이 풍부했다. 겨울에는 칡뿌리를 캐고 봄에는 찔레 버찌 앵두, 여름에는 산딸기, 가을에는 오디와 밤이 있어 산은 그대로 먹을 것을 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집마당 한쪽의 호두나무, 앵두나무, 뒤뜰에는 딸기가 있었다. 봄이면 나비가 날아 다니고 여름이면 참매미와 쓰르매미 소리가 듣기 좋았다.

 

#벼농사_지금 당정역 인근의 쌍용아파트와 주변 아파트들은 예전에 모두 논이었다. 봄에 볍씨를 뿌려서 못자리를 만들고 5월에 모내기를 했다. 곳곳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서 모내기를 했으니 어른들에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름에는 김매기를 하고 추석쯤 벼를 베어 타작을 해야만 했다. 벼를 마차에 실어 집마당에 쌓아놓고 며칠 동안 탈곡기를 발로 밟아가며 그 동력으로 탈곡은 힘든 일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서로 품앗이를 하며 일하시던 모습은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타작한 벼는 망태기에 담아 마당에 펴둔 멍석 위로 널어 말리다가 비가 올라치면 서둘러 거두기를 반복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원시적인 농업을 했다고 여겨지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을 부모님들이 자식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놀이_어릴 적 동네 형들과도 많이 어울렸는데 주로 자치기 구슬치기를 하거나 학교운동장에서 축구, 산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정월대보름 오곡밥을 먹는 날 저녁에는 달님깡통을 만들어 돌리곤 했다. 야밤에 다른 마을에 가서 서로 투석놀이 하는 것에 휩쓸리기도 했으나 너무 위험해서인지 어느 때부턴가 이 풍습이 사라졌다. 겨울에는 연날리기 썰매타기를 즐겼는데, 형들은 한 발짜리 썰매를 타고 우리는 두 발짜리 썰매를 탔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활쏘기 하는 것도 보았는데 형들이 솔가지를 들고 신호를 하면 활을 쏘고 활을 다 쏘면 화살을 수거해 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한동안 활이 다락에 놓여 있었다.

 

#수리취떡_어른들은 한여름에 수리산에 수리취를 뜯으러 가셨다. 이것으로 수리취떡을 해 먹는데, 쑥떡보다 향이 좋고 소화가 잘되는 떡이어서 매년 수리취를 뜯어오셔서 말려 보관해 두셨다가 명절에 떡을 해서 먹었다. 화로에 구운 수리취떡을 조총에 찍어 먹는 멋은 정말로 잊을 수가 없는 맛이다. (참고: 수리취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80~10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이다. 9~10월에 흰색 또는 자주색 꽃이 가지 끝에 피고 어린잎은 식용한다. 산이나 들에서 나는데 한국, 일본,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분포한다. 수리산 명칭과는 무관하다)

 

#산본리 동무_산본리는 신도시가 조성되기 전에는 전부 논밭이었다. 벌판이 워낙 넓어 농가도 많이 있었다. 당시는 군포역과 남면사무소, 초등학교가 있는 당리(당말)가 중심지였다. 산본리에는 초등학교가 없었으므로 아우랑(현 군포중 인근)고개를 넘어서 멀리까지 군포초교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산본리 동무들은 당말 동무들보다 시골이어서인지 순박한 동무들이 많았다.

 

#합승버스_동네 아래쪽에는 신작로가 가로질러 있었는데 안양 쪽에서 당말과 욕골을 지난 반월을 거쳐 남양 쪽으로 가는 2차선 도로였다. 이 도로도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비포장이어서 비가 오면 여기저기 웅덩이가 패였다. 그때는 합승이라는 조그마한 버스가 대중교통 역할을 했다. 내가 중학교 때 쯤해서 경일여객으로 기억되는 버스가 생겨 남양-서울 간을 다녔던 것 같다.

 

#안양CC_내가 네다섯살 되던 1965년쯤 건설되었다. 욕골과 새탄말 신작로 건너 야산과 밭을 골프장으로 만든 것이다. 이때 작은할아버지 포도밭도 골프장으로 편입되었다. 안양 살던 고총사촌형과 작은 아저씨가 캐디 일을 잠시 했을 정도로 동네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분들은 이곳에서 일한 분이 많았고 골프장에 근무하는 외지인들이 욕골 동네에 기거하기도 했다. 과거엔 골프장으로 인해 일자리가 생겨 긍정적이었던 반면, 골프장의 오염수가 흘러나와 시냇물을 오염시키는 부정적인 면도 있어서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지역사회와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옛날의 지명들_토골(욕골과 군포고 사이의 명칭, 현재 LG아파트가 들어선 자리), 도랫말(군포초에서 남면사무소로 가는 길목 동네, 언립주택과 당동우체국이 자리하고 있음), 당너머(도랫말과 당말 사이 지역), 새전(현 당정동 인근), 새우대(부곡역에서 안양CC 사이 지역), 망태울(현 신안애자 공장 있는 곳), 썩은대(현 안양CC 자리), 쟁골(현 산봉2단지 지역), 구 장터(금정동에서 평촌으로 가는 호계 구사거리 지역), 박새기(현 남군포IC 자리), 고랑치기(현 부곡2리 첨간산업단지), 동막골(아구랑에서 금정리로 가는 길목), 속달(대야미와 수리산 사이), 삼세이(현 삼성마을), 뒷뱅이(삼성마을에서 반월쪽으로 가는 지역), 흐린내(군포 구사거리 가기 전 다리 인근지역)

 

2시간에 걸친 강연 끝에 주고받은 질문의 쟁점은 안양CC’ 문제였다. 우선 안양이란 명칭의 지역화와 골프장의 역할 변경이었다. 지어질 당시에는 워낙 군포의 지역성이 약했다 하더라도 어엿한 신도시로 변모된 군포시의 정체성을 살리는 쪽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고, 외지인 위주의 고급 골프족 유치 대신 지역 시민들도 즐길 수 있는 퍼블릭CC로 변환시키거나 시민들을 위한 개방 행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두 번째는 석연찮은 고유 지명에 대한 해명이었다. 고향마을 욕골의 명칭 유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점에 대해 강사 스스로가 양해를 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역 원로들에 자문을 구해서라도 수일 내로 답을 드리겠다는 답변을 얻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토박이로서 군포에 대한 무한한 애향심을 느낄 수 있었고, 외지인 입장에서는 잘 몰랐던 향토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강사 본인이 원고를 준비하면서 그때의 약도를 그려볼 정도로 어린 시절을 반추해 본 좋은 기회였다는 점과 그 반추의 마음이 그를 파라다이스로 이끌게 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시민정책연구단의 활약이 기대된다

 

글과사진: 군포시민신문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2/07/18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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