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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1930년대 안양 학생들의 학교 통학 기억

안양똑딱이 2025. 6. 30. 17:54

 

유년시절의 학교 이야기

글 이 용 구

 

내가 어려서는 이지(理智)가 부실하고 시야가 좁아 활동 범위의 무대가 좁은 어린 마음에 그저 멀리는 못가고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서만 맴돌았다. 봄에는 노적봉(露積峰)에 올라가 진달래 꽃떡 만들고 여름에는 냇가에서 물장고 치며 고기잡고 가을에는 알밤 줍고 겨울애는 팽이치고 연날리고 썰매 타는등 평범하게 지냈다.

 

어릴 때 살던 곳은 안양3동이다 특히 여름에는 안양 3동과 9동 사이 개울가에는 산 딸기(복분자)가 많었다 미역 감다가 알몸으로 가시에 찔려가며 따 먹었으며 그 앞 울찰한 밤나무 슾에는 황버섯 꽤꼬리버섯 밀버섯등이 많었다 더 들어가 수리산(修理山) 슾속에는 싸리버섯이 풍부했는데 이 근자에는 거의 건물로 도시화가 되어 그런지 그 헌적이 없으니 자못 아쉽기만 하고 그저 추억만 있을 뿐이다

 

또한 여름철 가끔씩 집에서 서북쪽에 있는 박달리(현 박달동)를 지나 안양천 하류로 물놀이 겸 천렵(川 獵: 투망 또는 보쌈으로 고기 잡어 매운탕 끓이기)이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의 하나 였다 그때 개울 건너 좀 더 가면 지금의 충훈부 마을(현 석수2) 이 있었는데 어려서는 참 먼 거리 였었다

 

집이 그리 많치 않은 동네 였다 우리들은 이 마을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남이 부르는 발음데로 "춘부" 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통했었다 그후 성장해 알고 보니 춘부가 아니라 충훈부(忠勳府 :나라에 공이 있는장소)로 역사적인 고장의 이름이었다 이곳 학생(이경래. 이부래 외 여러명)들은 이곳에서 안양학교와 시흥학교에 구간 거리가 비슷해 각기 희망데로 양쪽으로 통학을 했다

 

또한 당시 나는 내가 다니는 안양보통학교 (당시 4년제)뿐 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사는 경기도 시흥군에는 당시 내가 사는 서이면(西二面) 말고.동면,서면. 남년. 수암면, 군자면, 과천면, 신동면등 각 8개 면 단위로 4년제 또는 6년제 보통학교가 있었다 북쪽으로 시흥학교(6년제) 서면학교(4년제) 군자학교(4년제) 안산학교(6년제) 남쪽으로 군포학교(6년제) 동쪽으로 과천학교(6년제)와 신동학교(4년제 현 서울 강동구 잠실동))가 있었다

 

그중 한 예를 들면 당시 서이면(안양)은 아직 학교가 없어 군포학교(6년제)와 시흥학교(6년제)로 안양에서 군포역과 시흥역으로 기차통학을 했고 안양에 학교가 생긴후 부터는 호계리(현 호걔1~3)에서는 사는 집과 학교와의 거리상 군포학교에도 가고 안양학교로도 다녔다

 

또한 충훈부(석수2)와 삼막골(현 석수3)에 사는 학생(하상호 외)은 안양 서이면에 속한 동네이지만 거리가 조금 멀어도 6년제라 안양학교 보다 먼 시흥학교로 다녔다 당시는 이렇게 취학 연령(年齡)과 학구(學區)가 없었다

 

당시 안양에서 군포와 시흥은 기차통학 말고는 모두가 걸어서 다녔다 (도보통학) 먼 거리는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하고 산을 넘고 내를건너 논두렁 길 이었으며 하교(下敎)길은 저녘 늦게나 집에 돌아왔다 그래서 맨 끝 수업인 농업시간 먼 거리 학생는 일찍 귀사 시켰다 그런고로 특히 몸이 허약한 자는 학교 출석률이 나젔다 또한 장마철에는 홍수로 안양천이 범람 하면 충훈부 비산동 호계동 학생은 물이 빠질때 까지 학교를 쉬어야 했다

 

또한 옛 속담에 "바쁠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 는 말과 같이 농번기(보리베기.모내기 ) 에는 집안 일손 돋기(동생 돌보기등 )로 결석하는 사례가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세대들은 이헣게 학교생활 이었었다

 

이제까지 살아 남은 우리 또레 동창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한마디로 참고생도 많았고 추억과 시련도 많은 유년시절의 학창시절 이라며 당시와 지금을 비교 한다면 하늘과땅(天地) 차이라며 현재의 학생들은 지상 천국 이라며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 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이제까지 살아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가 죽기전에 내가 살았던 옛 이야기를 다 글로 써서 남겨 후손 들에게 알리고저 하는 뜻과 의도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주석]

이 글을 쓰신 이용구(李瑢求) 선생님은 192610월생으로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년시절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9살 나던 1934년에 안양공립보통학교를 7회로 입학해서 졸업했다. 이후 경기공립상업학교를 다닌 선생은 졸업한 이듬해인 19451월부터 40년간 근속으로 철도청에서 근무한 후 1984년 정년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학창시절 작문시간이면 고역을 치르곤 했던 선생은 철도청에서 발간하는 교통이란 잡지를 보고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껴 여행의 유혹이란 제목으로 투고했더니 이후 3회에 걸쳐 게재가 되고, 원고료도 받고 동료들의 칭찬과 격려까지 들어 몹시 즐거웠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후 기쁜 마음에 여기저기 투고 하게 되었고, 투고하는 것 마다 게재가 되어 30년간의 문필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유년 시절인 일제 강점기부터 8·15해방 이후 안양의 산업화·도시화 과정과 생활상, 풍속 등을 담은 자전적 수필집 '양지마을의 까치소리’(1991)를 펴냈는데 안양의 엣 사회상을 담고 있어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료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