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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3]의왕시의회, 경기중부권 의장협의회 주최

경기도 중부권 9개 시의회 의장들이 지방분권 실현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기로 결의했다. 중부권 시의회 의장들은 22일 오후 의왕시청 소회의실에서 열린 경기도 중부권 의장협의회(협의회장 안양시 김대영 의장) 제90차 정례회에서 형식적인 지방자치제가 실질적인 자치로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왕시의회(의장 기길운) 주관으로 시흥시와 과천시를 제외한 7개 시의회 의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회의는 기길운 의왕시의회 의장의 환영사와 김성제 의왕시장의 환영인사, 협의회 안건 토의 순으로 진행됐다. 안건토의에서 각 의장들은 성과연봉제 개선방안을 비롯해서 우수 조례안 공유 방안, 축제 활성화 방안 등을 논의하고, 더 긴밀하게 협조해 서로 발전하는 지방의회를 만들어 나갈 것을 다짐했다. 특히, 이날 의장들은 지방..

[20170323]‘혁신교육’군포시교육협력지원센터 개소

(재)군포문화재단은 21일 군포시청소년수련관에서 군포시교육협력지원센터(이하 협력지원센터)의 성공적 운영을 위한 간담회를 갖고 군포지역 혁신교육지구 시즌Ⅱ사업 지원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고 밝혔다. 군포시 혁신교육지구 시즌Ⅱ는 학교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지역교육공동체 구축을 위해 경기도교육청과 군포시가 협약으로 지구를 지정해 ‘마을교육공동체와 함께하는 책 읽는 학교활성화’를 목표로 추진 중이다. 군포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협력지원센터는 군포시청소년수련관 내에 자리잡고 앞으로 혁신교육지구 시즌Ⅱ 사업을 추진함과 동시에 기존 진로체험지원센터의 자유학기제 및 진로체험사업을 통합해 지원하게 된다. 협력지원센터에서는 ‘지역 특성화 책 읽는 도시 모델 구축’, ‘지속가능한 지역사회 교육인프라 구축’,..

[20170323]군포시, 마을버스 인가 법적 분쟁 대법 '승소'

2015년 2월부터 시작된 군포시와 대형 운수업체인 삼영․보영운수 주식회사의 마을버스 인가와 관련된 법적 분쟁이 최근 군포시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군포시에 의하면 최근 대법원은 삼영․보영운수가 제기한 9번 마을버스 계획변경등록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청구 기각(군포시 승소)’ 판결을 했다. 이 판결에서 법원은 “피고(군포시)는 주민들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이 사건 처분(마을버스 인가)을 한 것으로 보인다”, “원고들이 입게 될 손해가 삼성마을 주민들이 얻을 이익에 비해 훨씬 크다고 보기 어렵다” 등의 판단 이유를 제시했다. 도심 외곽에 새롭게 조성된 삼성마을(당동2지구) 주민들의 교통 불편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시가 마을버스 9번의 운영을 인가한 행정이 매우 정당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현승식 교통..

[기억-최병렬]인기DJ를 스카웃했던 70년대 안양의 음악다방들

인기DJ를 스카웃했던 70년대 안양 음악다방 이야기 1970년대는 통기타, 장발, 나팔바지와 함께 LP음악을 들려주었던 DJ가 인기를 누리던 음악다방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다방의 추억이 유별났던 곳은 단지 차만 팔고 약속장소만이 아니라 그 시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믄화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뽀얀 담배 연기로 가득찬 다방은 유리창 속에 앉아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DJ'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카펜터스와 아바, 스모키 등의 팝송과 때로는 신나는 디스코 장단에 흥겨워하는 모습은 지난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자리했던 '음악다방'속의 한 풍경이다. 음악다방의 얼굴마담은 단연 DJ였다. 유리창 너머 뮤직박스속의 DJ들은 왜 그리도 멋지고 경외스러웠던지. 그 시절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

[기억-최병렬]안양 과거 문화사랑방 '곧망할' & '대합실'

안양엔 끼 있는 문화예술인 사랑방 '곧망할' 있었다 “우린 망한다는 확신 아래 여기 작은 꿈을 이름하여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실패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이론으로 출입구를 냅니다.” -곧 망할 카페 전단지- 1978년 5월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부림상호신용금고 앞 중앙시장 골목길 안쪽 건물 지하에 당시로는 아주 정치적이고 요상한 상호를 내건 카페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름하여 ‘Gote manghale’(곧 망할) 입니다. 이 카페의 주인장은 알마전까지 안양에서 하늘새 조각가로 잘 알려진 이강식 선생(2012년 병점으로 이사를 하셨지요)과 당시 안양에서 연극인으로 활동하던 윤고성씨(미스 강원과 결혼한 후 안양을 떠나 춘천으로 갔는데 전 아직 그 이후 만나지를 못했음... 춘천의 밤..

[자료]안양풀 - 안양유원지 - 안양예술공원

안양풀 - 안양유원지 - 안양예술공원 경기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과거 안양 풀 또는 안양유원지로 불리우던 이곳은 성산과 관악산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고래로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붙잡아 풍류담과 더불어 많은 시문을 남기게 하기도 했으며 고려조의 명신 강감찬은 이 곳을 경기금강이라고 불리웠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의하면 태종 17년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를 안양유원지 계곡에서 열었는데 강권하던 소주를 못 이겨 김 문이 갑자기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전까지 보고된 이 사고에 대한 태종의 수습책은 의외로 간단해서 "술을 권하는 일은 고래의 미풍이지 악습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큰일이니 관련자들을 파직하라"는 명쾌한 판결로 매듭을 ..

[자료]중초사-안양사-유유공장-김중업건축물, 천년의 역사

중초사-안양사-김중업건축물-천년문화관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번지 옛 유유 부지는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2년인 827년 세워진 중초사(中初寺) 절터로 알려져 왔으나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900년에 지은 안양사 터가 1100년만에 발굴돼 경기서남부에서 보기드문 대규모 사찰로 밝혀졌다. 재단법인 한울문화재연구원이 유유 안양공장 부지에 대한 1.2차 발굴조사를 통해 안양사 명문기와 발굴에 어어 문헌속 안양사 7층 전탑 터를 찾아내는 등 고대가람 안양사 흔적이 드러나 문화재청이 2010년 현장에서 지도위원회에서 열고 실체를 확인함으로 안양이란 지명이 고려시대 안양사에서 유래했다는 역사적 정체성까지 찾게됐다. 안양(安養)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부처님이 상주하는 청정(淸淨)하여 맑고..

[기억-조성원]안양초등학교 운동장의 오래된 기억

[조성원]안양초등학교 운동장 나는 안양 초등학교 38회 출신이다. 입학하던 해가 1964년이니 우리학교는 일제 때 생긴 안양에선 제일 오래 된 학교다. 그 시절의 안양은 시흥군에 속하는 읍 소재지였으며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의 안양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동문인 셈도 된다. 지금의 안양은 과거의 논밭이나 하다못해 냇가마저도 시멘트가 덮이면서 모양을 달리 하였고 평촌과 산본이라 하는 신도시까지 생겨나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된 것이지만 당시 안양은 공설 운동장 하나 없는 여느 가난한 시골의 소읍과도 같았다. 4학년 때 배운 지리책에 안양은 아주 짤막하게 6 25때 격전지로 포도밭이 많은 어령칙한 동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우리 집 주변은 모두가 포도밭이었고 천일포도주 공장이..

[20170323]1960년 초반에 지어진 옛 시흥군도서관 건물

안양 도심에 옛 시흥군도서관 건물 있다 1960년 초반에 지어진 옛 시흥군 도서관이 안양 만안구의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는 200아울렛 사거리에 현존하고 있다. 이 일대는 1936년 영등포읍이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시흥군의 중심지는 안양으로 이동하고, 1945년에 시흥군청이 안양으로 이전하면서 시흥군과 안양읍 당시 관공서들이 자리했던 안양 일번가 지역으로 현재는 당시 관공서 건물들이 모두 없어졌고 도서관 역시 그 기능을 상실했지만 이 건물만은 50년 넘게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건물이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고, 언제 기능을 상실했으며 언제 매각됐는지에 대한 기록들을 찾지를 못했다. 안양시가 최근 발간한 안양시지에서도 아직 현존하는 이 건물에 대한 이력조차 없다. 그나마 찾을 수..

[자료]정조 임금의 사적비 만안교비(萬安橋碑)

[기록]만안교비(萬安橋碑) 만안교비는 정조임금이 화성으로 능 행차시 건너던 다리 '만안교'를 건설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적비(事蹟碑)이다. 만안교비는 귀부와 비신, 가첨석을 갖춘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석비의 전체 높이는 311m이며, 비신의 규모는 165×65×33cm이다. 구부(龜趺)는 한돌로 마련하였는데 판석형 2매의 지대석을 놓고 올려 놓았다. 하부에는 다시 높이 15cm정도의 받침을 귀부의 형태에 따라 마련하였다. 귀부는 발가락이 4조(爪)인 다리를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태이며, 꼬리는 짧고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다. 귀갑은 무늬가 없지만 귀갑 위를 다시 꽃무늬 형태로 돌리고 모서리 부분을 오메가형으로 장식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구두(龜頭)부분인데, 목에 비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