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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안양’의 유래와 뿌리

‘안양’의 유래와 뿌리 AD 900년 경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조공을 바치지 않던 광주, 충주, 청주 등 남쪽 3개 주를 정벌하기 위하여 삼성산 자락을 지나가던 중 산꼭대기에서 오색무지개가 어리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더니 늙은 중 능정(能正)을 구름 밑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더불어 대화해 보니 뜻이 맞아 ‘안양사(安養寺)’를 세웠다는 기록이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등에 전해지고 있다. 이 안양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와 조선시대 중엽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고, 현재 안양이란 지명의 유래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국정토를 일컫는 안양이라는 말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영조 35년(1759..

[김정대]지명 금천(衿川)과 안양(安養)

금천(衿川)은 금주(衿州), 금양(衿陽)으로 통하던 향토의 옛 지명으로 가장 오래 불리던 이름이다. 문헌에 나타난 것을 보면 지명의 첫 이름은 고구려때에 잉벌노현(孕伐奴縣)이라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경덕왕(757)때 진율군(津栗郡)이라 개칭하여 오다가 고려 태조(왕건)시기 934년부터 금천현(금주, 금양)이라 불렀다. 조선왕조 22대 정조대왕(1795)이 만안교(萬安橋)를 축조한 뒤 이 지역을 시흥(始興)이라 부르도록 하였으나, 기록상으로는 1914년 안산 및 과천과 군(郡)을 통합하면서 시흥군(始興郡)으로 명명된 것이다.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여지도서(영조35, 1759)에 금주현(衿州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도 나타난다. 3군(三郡) 통합이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를 합쳤으며 ..

[안양권지도]1871년 과천현지도-안양권(경기읍지,규12177)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규장각 소장『경기읍지』(奎12177) 6책에 수록된 과천현의 그림식 지도다. 당시 과천현은 경기도 과천시, 군포시의 군포동·금정동·당정동·부곡동·산본동, 안양시의 동안구와 박달동·석수동을 제외한 만안구,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노량진동·동작동·본동·사당동, 서초구의 반포동·방배동·서초동·신원동·양재동·우면동·원지동·잠원동에 걸쳐 있었다. 지도에 읍치(邑治)라고 적혀 있는 고을의 중심지는 과천시의 관문동에 있었고, 지도는 남쪽을 위쪽에 배치하여 그린 것을 90도 회전 시켰다. 지도에 수록된 지명, 산줄기와 물줄기, 길 등이 1842년(헌종 8)과 1843년경에 편찬된『경기지』(奎12178) 3책의 과천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앞의 지도에는 없는 하우고개내(鶴古介川)가 있..

[안양권지도]1843년 과천현지도-안양권(경기지,규12178)

1842년(헌종 8)과 1843년경에 편찬된 규장각 소장『경기지』(奎12178) 3책에 수록된 과천현의 그림식 지도다. 당시 과천현은 경기도 과천시, 군포시의 군포동·금정동·당정동·부곡동·산본동, 안양시의 동안구와 박달동·석수동을 제외한 만안구,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노량진동·동작동·본동·사당동, 서초구의 반포동·방배동·서초동·신원동·양재동·우면동·원지동·잠원동에 걸쳐 있었다. 지도에 읍치(邑治)라고 적혀 있는 고을의 중심지는 과천시의 관문동에 있었다. 고을의 중심지가 주산인 관악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동향하여 들어섰음에도 지도는 남쪽을 위로 배치하여 그렸다. 고을의 유역권은 크게 세 개로 나누어진다. 가장 위쪽(南)은 현재의 안양천 유역으로 안양시와 군포시 지역, 고을의 중심지 지역은 양재천 유역으로 과천..

[20170327]의왕시, 7개 청소년 자치기구 연합발대식

의왕시청소년수련관은 지난 25일 2017년 청소년 자치기구 발대식 및 연합행사를 청소년수련관 자의누리터에서 청소년 1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의왕시 소속 청소년참여기구인 의왕시차세대위원회와 의왕시청소년수련관 소속 청소년운영위원회, 청소년 기자단, 청소년 봉사단, 청소년 문화기획단, 전통또래예절 동아리, 동아리연합회 총 7개 자치기구가 참여했다. 발대식 및 연합행사는 청소년동아리 축하공연을 시작으로 지난해 자치활동 우수자 표창, 자치기구별 2016년 활동 내용 보고, 2017년 활동 계획 순으로 진행됐으며, 발대식 후에는 자치기구 연합활동으로 자치기구 대항전을 펼쳐 서로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발대식을 시작으로 각 자치기구는 한 해 동안 청소년정책제안대회, 청소년수련관..

[20170327]의왕시, 올해 자전거활성화 6억3천만원 투입

의왕시는 자전거타기 좋은 환경 조성을 위해 올해만 약 6억3000만 원의 사업비를 추가로 투입한다. 의왕시는 지금까지 총 88㎞의 자전거도로를 조성했고 시내 곳곳을 자전거로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 자전거도로 이용자들을 위해 자전거 도로 곳곳에 벤치를 설치하고 벤치 위에는 파라솔을 설치해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자전거도로변에 편백나무 덩굴장미 구절초 왕벚나무 조팝나무 등을 심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76곳의 자전거보관대를 설치해 자전거 650여 대를 주차할 수 있도록 했고 주요 거점 25곳에는 공기주입기를 설치해 자전거를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했다. 또한, 2010년부터 전 시민을 대상으로 자전거보험에 가입하여 자전거 관련 사고발생시 보험적..

[자료]근대 안양 시금석 안양장과 안양역

안양지역 상권의 변화 과정 안양지역에서 보부상이 자주 드나들던 곳은 어디였을까. 지금의 안양을 포함하였던 옛 시흥 지역은 조선시대에 중부지방의 교역 중심지로서 시장이 발달하여 조선 후기에 방축장(防築場)·산대장(山垈場)·수암장(秀岩場) 등이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도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지금의 동안구 호계3동)의 군포장이 매달 끝자리가 5·10인 날에 열렸고, 1926년 서이면 안양리(지금의 만안구 안양1동)에 안양시장이 개설되어 매달 끝자리가 5·10인 날에 장이 섰다. 안양시장은 1961년 지금의 안양4동 자리로 이전하여 안양공설시장으로 개칭하고 장날도 3·8일로 변경하였다가 1970년대에 상설시장으로 전환되어 지금의 안양중앙시장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안양시의 전통시장은 만안구에 안양중앙시장 외에 안양..

[기억-최병렬]안양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래된 음식점 이야기

안양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래된 음식점 이야기 안양지역에 음식점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아마도 한양가는 길목인 인덕원 사거리 일대 자리했던 주막에서 당시 오가던 길손에게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추정일뿐 기록은 없다. 안양시는 2006년 안양시민축제 당시 음식문화축제를 준비하면서 안양의 대표음식으로 설렁탕을 선정해 과거 자료를 수집한 적이 있다. 자료를 조사한 안양문화원 최태술 위원은 “지금 동안구 평촌에 귀인동이 있다. 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宮中에서 宮人으로 생활하다 퇴역 하신 귀인(貴人)들이 살든 곳이어서 귀인동이다. 또 수촌마을에는 내시촌이 있어 두 곳 다 퇴역한 궁인들이 궁중에서 하던 선농제 행사에서 끓이던 설렁탕 기술을 알았을 것이다”며 이를 통해 설렁탕이 일반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

[기억-최병렬]안양 병목안 기찻길옆 2층 ‘길모퉁이까페’

안양에서 처음 카페 명칭 붙였던 ‘길모퉁이까페’ 1970년대 안양에서 카페란 명칭을 사용한 곳은 안양1동 CGV옆 기찻길 골목 2층에 있던 길모퉁이카페가 아닐까 싶다. K연구소에 다니는 남편을 둔 서른 살을 갓 넘은 예쁜 누나가 커피와 함께 진토닉 등 칵테일과 위스키 등을 팔던 가게였다. 지금은 50대 중반이 된 친구들이 겨울에는 난로 불을 쬐며 노닥거리며 암울했던 현실을 고민하고 LP음반을 뒤적거리며 ‘까라마드르 조르쥬(길모퉁이 카페의 작가)’를 이야기했다. 당시 청년들의 주머니가 허전하던 때여서 주인 누나가 공짜로 주는 따끈한 커피와 술 한잔에 고마워하고 풋풋하고 넉넉한 쓰임새에 감동하며 간혹 안양9동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한 화물열차가 지나치기라도 하면 도로에 멈춰 기나긴 차량들을 보는 것도 또다른 ..

[자료]안양역의 변천과정과 숨은 이야기

안양역의 변천과정과 숨은 이야기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오렴 - 김대규 시인의 엽서 - 경부선 개설과 함께 1905년 1월 1일 문을 연 안양역은 2001년 12월 14일 최신시설의 민자역사로 탄생됐으며 전동차를 포함 새마을호, 무궁화호, 화물열차 등이 경유하고 있으며 하루 출퇴근시간대만 최대 4만여명이 이용하는 것으로 안양역 측은 집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양역은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을까. 100년 전 안양역의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독일인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산더(1868∼1945)가 1906년부터 1년여간 러일전쟁의 흔적을 조사하는 여행길에 기차가 정차한 1906년 9월의 '안양역 풍경'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난 과거를 되돌아 보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