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자료]수원시 학예연구사
길에서 찾는 역사, 왕의 능행차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정조는 길 위의 군주라고….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깨우치듯 정조는 길에서 백성을 만나고 조선을 생각했다. 정조에게 길이란 단순히 걷기 위한 도로가 아닌 억조창생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현재 ‘이산’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세손의 길 떠남을 보았고 길 위에서의 흐느낌을 보았다.
그러나 진정 정조의 길 떠남은 사랑하는 연인 송연이를 만나기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 길 위에서 만난 여리고 슬픈 질곡의 백성들을 보듬기 위함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조는 능행차를 통해 국왕의 지위를 강화하고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조선 대부분의 국왕들이 연중 1회 정도의 능행차를 추진함과 달리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66회의 능행차를 단행하였고, 행차 중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3천355건을 처리했다.
더불어 정조는 선대왕의 능을 참배하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자신을 호위한 군사들로 하여금 강력한 군사훈련을 지시하고 이를 통해 국왕 자신과 자신이 다스리는 조선을 그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자신의 국왕 정조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능행의 절정이 바로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루기 위한 8일간의 화성행차였다.
정조의 8일간 화성행차에 대한 기억
1795년 윤2월 9일. 드디어 새벽의 정적을 깨는 종소리와 더불어 창덕궁 돈화문(보물 제383호) 앞은 융복을 차려입은 정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긴지 6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유수부로 행차를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행차를 1년 전부터 준비하면서 수원으로 내려오는 길을 새로 만들었다. 그 길이 지금의 1번 국도이다. 원래 길은 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가는 ‘과천길’이었으나 노량진에서 시흥을 지나 군포와 의왕 등을 거쳐 지지대고개로 통하는 시흥길을 새로 만들었다.
정조는 돈화문을 나와 종루 앞의 큰 길로 향했다. 지금의 보신각 종 앞으로 행차한 것이다. 그리고 대광통교와 소광통교를 지나 숭례문(국보 제1호)을 지나갔다. 숭례문을 지나 현재의 서울역 앞을 거쳐 노량진으로 향한 행차는 정약용이 설치한 그 유명한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 도착하게 된다.
정조는 배다리를 원활하게 설치하기 위해 주교사舟橋司라고 하는 특별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그 자리가 바로 노량본동의 동사무소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약간 위쪽으로 올라가면 아직도 노량행궁의 중심 건물인 용양봉저정(시도유형문화재 제6호)이 초라한 모습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과거 정조시대 노량행궁은 단순히 정조의 수원 행차 시에 점심 수라를 들기 위한 주정소만이 아닌 노량 일대의 조운선을 관장하고 상인들을 통제하던 막강한 곳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용양봉저정 하나만 남아 정조의 옛 자취를 느끼게 할 뿐이다.
첫날 점심 수라를 이곳에서 마친 정조는 6천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위풍도 당당하게 시흥행궁에 도착하였다. 현재 시흥행궁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흔적도 희미하다.
정조의 행차길은 시흥행궁을 뒤로하고 현재의 1번 국도를 그대로 따라 수원으로 내려가다 관악 전철역 옆의 만안교萬安橋(시도유형문화재 제38호)를 만나게 된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새로운 시흥대로를 만들면서 안양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만안교는 원래 관악전철역사 바로 옆에 있었는데 전철역을 만들면서 안양천의 원래 위치에서 약 200여 미터 아래로 이동하여 다시 축조되었다.
만안교의 글씨는 일반적인 글씨체와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인가 튀어 올라가는 이 글씨체는 정조시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유한지兪漢芝의 글씨로 만안교 아래로 흐르는 장쾌한 물의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무수히 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를 위해 남아있는 것은 정조시대 문화의 풍요로움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정조의 배려가 아닌가 한다.
만안교에서 안양전철역 앞의 안양1번지를 지나 군포사거리로 그리고 다시 1번 국도를 지나게 되면 정조가 둘째 날 점심을 먹었던 사근행궁에 도착한다. 물론 사근행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의왕시의 중심 지역인 고천동이 바로 사근현이었고 현재 고천동 주문자치센터가 바로 사근행궁의 터였다. 의왕시의 문화예술인들이 사근행궁을 복원하고자 고증을 통해 최근 3D입체영상을 제작하고 있고 필자가 지속적인 자문을 해주었다.
부친의 묘역을 보며 눈물 흘리던 왕의 자취
사근행궁에서 수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큰 고개를 올라가야 했다. 이 고개 이름은 지지대고개라고 불리우는데 정조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정조는 이 고개에 오르면 멀리 화산 쪽에 있는 부친의 현륭원이 보이는데 그곳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어 “왜 이렇게 더딘가?”하고 한탄을 하였으며,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환궁 할 때는 이 고개의 마루턱에 어가를 멈추어 서게 하고 뒤돌아서서 오랫동안 부친의 묘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 고개 위에는 정조의 거룩한 효행을 기념하여 순조 때 지지대비를 건립하였는데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지대고개를 지나 프랑스 참전비를 지나 본격적인 노송지대로 들어오면 첫 번째로 맞이하는 곳이 바로 정조의 동상과 효행기념관이다. 도심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효심이 깊이 담겨 있는 이 길 위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어느 기념관보다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효행기념관을 지나면 곧바로 정조가 지나갔던 괴목정교槐木亭橋가 나온다. 수원으로 들어와서 첫 번째 맞이한 괴목정교는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당대 최고의 명필의 글씨임에는 틀림없다. ‘느티나무정자 다리’란 이름답게 괴목정교 남쪽으로 약 10m 지점에 370여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아직도 그 위용은 대단하다.
괴목정교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현재 법화당이란 이름으로 바뀐 미륵당이 있다. 정조의 행차 시절에도 그대로 있던 미륵당으로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오늘날까지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앞서 말한 지지대 고개의 이름이 사근내고개에서 미륵고개로 불리었는데 바로 이 미륵당 때문이었다. 이 미륵은 조선후기 경기남부지역이 많이 생겨난 전형적인 마을 미륵으로 이 지역 백성들의 소망을 모두 받았던 작은 미륵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 미륵 옆에는 대형 버스 차고지가 생겨 미륵의 영험함은 사라지고 버스 시동 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다.
백성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
정조는 자신의 행차길에 특별히 많은 소나무를 심었다. 그 소나무가 이제는 노송지대란 이름으로 수원시민들의 명소가 되었는데 1970~80년대에는 이 주변에 참으로 많은 포도밭과 딸기밭이 있었다.
이제는 딸기밭의 흔적은 사라지고 오직 수원갈비를 파는 음식점으로 가득하다. 노송지대에 가득한 화성유수부의 송덕비를 보며 정조의 능행길은 계속된다. 아직도 2차선인 이 길은 그대로 이어져 ‘만석거’라는 큰 저수지에 다다른다. 정조가 만든 이 저수지는 조선의 농업개혁의 산실이자 우리 농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이 저수지 옆에 정조는 잠시 쉬면서 융복 위에 황금갑주를 걸치고 장안문으로 향했다.
그가 장안문으로 들어올 때는 세차게 내리던 비도 멈추고 갑자기 태양빛이 가득하여 사람들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들과 온 백성들의 마음을 담고 화성유수부의 종루 앞을 지나 화성행궁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무려 100여 리. 요즘의 미터법으로 환산해서 무려 56㎞를 내려온 그의 능행길은 단순한 국왕의 행차가 아닌 백성들을 위해 행복을 주는 행행幸行이었다.
▶ 글·사진_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정조는 길 위의 군주라고….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깨우치듯 정조는 길에서 백성을 만나고 조선을 생각했다. 정조에게 길이란 단순히 걷기 위한 도로가 아닌 억조창생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현재 ‘이산’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세손의 길 떠남을 보았고 길 위에서의 흐느낌을 보았다.
그러나 진정 정조의 길 떠남은 사랑하는 연인 송연이를 만나기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 길 위에서 만난 여리고 슬픈 질곡의 백성들을 보듬기 위함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조는 능행차를 통해 국왕의 지위를 강화하고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조선 대부분의 국왕들이 연중 1회 정도의 능행차를 추진함과 달리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66회의 능행차를 단행하였고, 행차 중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3천355건을 처리했다.
더불어 정조는 선대왕의 능을 참배하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자신을 호위한 군사들로 하여금 강력한 군사훈련을 지시하고 이를 통해 국왕 자신과 자신이 다스리는 조선을 그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자신의 국왕 정조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능행의 절정이 바로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루기 위한 8일간의 화성행차였다.
정조의 8일간 화성행차에 대한 기억
1795년 윤2월 9일. 드디어 새벽의 정적을 깨는 종소리와 더불어 창덕궁 돈화문(보물 제383호) 앞은 융복을 차려입은 정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긴지 6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유수부로 행차를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행차를 1년 전부터 준비하면서 수원으로 내려오는 길을 새로 만들었다. 그 길이 지금의 1번 국도이다. 원래 길은 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가는 ‘과천길’이었으나 노량진에서 시흥을 지나 군포와 의왕 등을 거쳐 지지대고개로 통하는 시흥길을 새로 만들었다.
정조는 돈화문을 나와 종루 앞의 큰 길로 향했다. 지금의 보신각 종 앞으로 행차한 것이다. 그리고 대광통교와 소광통교를 지나 숭례문(국보 제1호)을 지나갔다. 숭례문을 지나 현재의 서울역 앞을 거쳐 노량진으로 향한 행차는 정약용이 설치한 그 유명한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 도착하게 된다.
정조는 배다리를 원활하게 설치하기 위해 주교사舟橋司라고 하는 특별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그 자리가 바로 노량본동의 동사무소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약간 위쪽으로 올라가면 아직도 노량행궁의 중심 건물인 용양봉저정(시도유형문화재 제6호)이 초라한 모습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과거 정조시대 노량행궁은 단순히 정조의 수원 행차 시에 점심 수라를 들기 위한 주정소만이 아닌 노량 일대의 조운선을 관장하고 상인들을 통제하던 막강한 곳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용양봉저정 하나만 남아 정조의 옛 자취를 느끼게 할 뿐이다.
첫날 점심 수라를 이곳에서 마친 정조는 6천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위풍도 당당하게 시흥행궁에 도착하였다. 현재 시흥행궁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흔적도 희미하다.
정조의 행차길은 시흥행궁을 뒤로하고 현재의 1번 국도를 그대로 따라 수원으로 내려가다 관악 전철역 옆의 만안교萬安橋(시도유형문화재 제38호)를 만나게 된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새로운 시흥대로를 만들면서 안양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만안교는 원래 관악전철역사 바로 옆에 있었는데 전철역을 만들면서 안양천의 원래 위치에서 약 200여 미터 아래로 이동하여 다시 축조되었다.
만안교의 글씨는 일반적인 글씨체와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인가 튀어 올라가는 이 글씨체는 정조시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유한지兪漢芝의 글씨로 만안교 아래로 흐르는 장쾌한 물의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무수히 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를 위해 남아있는 것은 정조시대 문화의 풍요로움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정조의 배려가 아닌가 한다.
만안교에서 안양전철역 앞의 안양1번지를 지나 군포사거리로 그리고 다시 1번 국도를 지나게 되면 정조가 둘째 날 점심을 먹었던 사근행궁에 도착한다. 물론 사근행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의왕시의 중심 지역인 고천동이 바로 사근현이었고 현재 고천동 주문자치센터가 바로 사근행궁의 터였다. 의왕시의 문화예술인들이 사근행궁을 복원하고자 고증을 통해 최근 3D입체영상을 제작하고 있고 필자가 지속적인 자문을 해주었다.
부친의 묘역을 보며 눈물 흘리던 왕의 자취
사근행궁에서 수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큰 고개를 올라가야 했다. 이 고개 이름은 지지대고개라고 불리우는데 정조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정조는 이 고개에 오르면 멀리 화산 쪽에 있는 부친의 현륭원이 보이는데 그곳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어 “왜 이렇게 더딘가?”하고 한탄을 하였으며,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환궁 할 때는 이 고개의 마루턱에 어가를 멈추어 서게 하고 뒤돌아서서 오랫동안 부친의 묘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 고개 위에는 정조의 거룩한 효행을 기념하여 순조 때 지지대비를 건립하였는데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지대고개를 지나 프랑스 참전비를 지나 본격적인 노송지대로 들어오면 첫 번째로 맞이하는 곳이 바로 정조의 동상과 효행기념관이다. 도심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효심이 깊이 담겨 있는 이 길 위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어느 기념관보다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효행기념관을 지나면 곧바로 정조가 지나갔던 괴목정교槐木亭橋가 나온다. 수원으로 들어와서 첫 번째 맞이한 괴목정교는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당대 최고의 명필의 글씨임에는 틀림없다. ‘느티나무정자 다리’란 이름답게 괴목정교 남쪽으로 약 10m 지점에 370여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아직도 그 위용은 대단하다.
괴목정교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현재 법화당이란 이름으로 바뀐 미륵당이 있다. 정조의 행차 시절에도 그대로 있던 미륵당으로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오늘날까지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앞서 말한 지지대 고개의 이름이 사근내고개에서 미륵고개로 불리었는데 바로 이 미륵당 때문이었다. 이 미륵은 조선후기 경기남부지역이 많이 생겨난 전형적인 마을 미륵으로 이 지역 백성들의 소망을 모두 받았던 작은 미륵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 미륵 옆에는 대형 버스 차고지가 생겨 미륵의 영험함은 사라지고 버스 시동 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다.
백성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
정조는 자신의 행차길에 특별히 많은 소나무를 심었다. 그 소나무가 이제는 노송지대란 이름으로 수원시민들의 명소가 되었는데 1970~80년대에는 이 주변에 참으로 많은 포도밭과 딸기밭이 있었다.
이제는 딸기밭의 흔적은 사라지고 오직 수원갈비를 파는 음식점으로 가득하다. 노송지대에 가득한 화성유수부의 송덕비를 보며 정조의 능행길은 계속된다. 아직도 2차선인 이 길은 그대로 이어져 ‘만석거’라는 큰 저수지에 다다른다. 정조가 만든 이 저수지는 조선의 농업개혁의 산실이자 우리 농업을 한 단계 발전시킨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이 저수지 옆에 정조는 잠시 쉬면서 융복 위에 황금갑주를 걸치고 장안문으로 향했다.
그가 장안문으로 들어올 때는 세차게 내리던 비도 멈추고 갑자기 태양빛이 가득하여 사람들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들과 온 백성들의 마음을 담고 화성유수부의 종루 앞을 지나 화성행궁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무려 100여 리. 요즘의 미터법으로 환산해서 무려 56㎞를 내려온 그의 능행길은 단순한 국왕의 행차가 아닌 백성들을 위해 행복을 주는 행행幸行이었다.
▶ 글·사진_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2008-10-15 02: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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