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문원식]안양을 뒤흔든 폭발사고 셋

안양똑딱이 2016. 6. 11. 21:37

[문원식]안양을 뒤흔든 폭발사고 셋

[2006/09/22 안양시민신문]논설위원·성결대학교 교수·안양학연구소 소장


 

안양을 뒤흔든 폭발사고 셋

일제시대 말기인 1941년 천혜의 요새인 박달동 수리산 깊은 골짜기에 일제가 육군성 소속 탄약 저장시설을 설치하면서 안양과 폭발물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일제의 패망으로 탄약저장 시설과 탄약을 인수한 미군은 일본군 탄약을 안산 넘어가는 본드레미 고개 아래 굴을 파서 그 안에서 폭발시켜 폐기처리했다.
당시의 목격자 중의 한 분인 변원신씨는 주민대피령이 내린 가운데 지축을 울리는 폭발소리에 구도심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떨어졌고, 파편은 자신이 살고 있던 양짓말까지 날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두번째 폭발사고는 1·4후퇴 중인 1951년 초 대량의 폭발물을 수송하던 탄약열차가 정차 중에 폭발한 사건이다.
폭격을 맞아서 폭발했다고 하기도 하고, 사고로 폭발했다고도 하는 이 폭발사고는 이리역 폭발사고를 능가는 규모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폭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바람에 안양의 구도심이 몽땅 타버렸다고 당시의 목격자인 이상윤, 변원신씨는 증언하고 있다.

6·25사변 당시의 폭발물과 관련한 안양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6·25 중 안양에 주둔하고 있던 군단급 중공군과 미 25사단 사이에서 벌어진 수리산 전투는 6·25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유명한 전투 중의 하나인데, B29를 통해서 공중 투하된 네이팜탄에 불바다로 변한 수리산 속에서 앉은 채로 죽은 중공군 및 북한군의 수습한 시신이 산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번째 폭발사고는 1964년 3월5일 오후 3시 경 모락산 자락 안양교도소 인근에 위치한 안양탄약분해소 폭발사건을 들 수 있다.
3명이 죽고 109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된 이 사고를 당시의 신문들이 ‘땅꺼진 대폭음 비극의 4시간’, ‘모락산 일대에 덮친 초연의 참극’, ‘폭음 4킬로 밖까지’, ‘산산조각 초연에 비극을 묻고’, ‘재소자 한때 철창잡고 아우성’, ‘교도소, 흥안교 어린이도 큰 피해’ 등의 크고 작은 머릿기사로 보도한 것을 통해 사고의 규모와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고로 학교 지붕이 날아가고 학생들이 부상하는 등 직접적인 피해를 본 흥안국민학교는 사고 후 학교 이름을 남국민학교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번에 걸친 대형 폭발사고로 예민해져 있던 안양사회에 폭탄 노이로제 증세를 촉발시킨 사건이 69년 11월에 일어났다.
수원 파장동에 있던 폐탄처리장을 인근에 있던 선경합섬이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서 폐탄처리장을 이전해줄 것을 요구하자, 당시 실세 수원 국회의원이던 이OO 의원과 경기도 당국이 나서서 폐탄처리장을 수리산 병목안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일부 시설 설치작업에 들어간 사건이다. 등교거부운동 및 궐기대회 형태의 관민이 함께 한 유입반대운동 주역이었던 정봉수(새안양회 창립회장, 당시 안양상의 사무국장) 옹은 “64년의 모락산 폭발사고 등으로 폭발물이라면 안양사람들이 노이로제가 걸려있던 참이라 온 주민이 힘을 합쳐 폭발물처리장 이전반대운동을 성사시켰다”고 회고하고 있다.

당시의 주역들이 자랑스럽게 회고하는 이 사건이 이후 안양사랑의 자긍심으로 싹을 틔어 향후 많은 애향단체들의 창립을 촉발시켰고 나아가 안양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발아하는 계기가 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2006-09-23 15: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