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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수리산 산신제 500년 전통을 잇는다

매년 정월과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던 군포 수리산 산신제가 3일 외곽순환고속도로 산본 나들목 인근 수리산 산신제단에서 열려 5백년 전통계승을 잇는다. 수리산 산신제는 정확한 고증이 어려우나 구전에 따르면 16세기초 안양군의 4대인 옥담(玉潭)이 이곳에 낙향, 광정이란 정자를 짓고 선조들의 묘를 지키고 살면서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켜주는 수리산에 대한 산신제를 올리면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광정리 주민들은 마을과 가깝게 위치해 있는 수리산의 산새가 좋고,진산은 아니지만 마을 뒷편에 우뚝 솟은 태을봉이 마을의 안녕을 지켜 준다며 매년 음력 1월과 7월초에 금기를 엄하게 지키고 주민들의 공동부담으로 제물을 준비해 제사를 지냈으며 주민들은 이러한 산신제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기원을..

[자료]안양 역사 및 옛 자연마을 지명 유래

▶ 명칭유래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만안구 석수1동 산 2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하였다. 조선시대에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짐작한다.또한 19..

[자료]군포 역사 및 옛 자연마을 지명 유래

군포의 역사 및 각동 지명유래 군포시의 역사군포시(과천군 남면)는 진국(辰國)이 삼한(三韓)으로 분리되면서 마한(馬韓)의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는데 그 당시의 백제의 도읍지인 광주(廣州)의 속현이었다고 한다.그 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長壽王)은 동왕63년(475)에 국도(國都)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그 결과로 백제의 수도 한산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부득이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되자 경기도의 전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따라 고구려는 과천시의 전역과 군포시 안양시의 만안구 안양동, 동안구의 호계동 등을 「율목군(栗木郡-一云冬斯?)」이라고 칭하였다.이후 반도 동남부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신라의 영토에 속하게 되는데..

안양시의 역사와 연혁

문헌상에 등장하는 안양의 역사는 율목군이라는 행정명칭이 있으나 이전의 원삼국시대와 선사시대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989년 평촌지역 문화유적 조사시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근거를 알수가 있으며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에서, 백제 근초고왕(346-375)때에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고구려 장수왕(394-491)때 한강연안 및 경기도 전지역이 고구려 남쪽의 영토가 되었다. ▶ 연혁 ○ 475년(고구려 장수왕 6년) 율목군에 속함(박달동,석수동은 잉벌노현에 속함) ○ 757년(신라 경덕왕16년) 곡양현을 고쳐 율진군이 되었음 ○ 940년(고려 태조 23년) 과주(금주현) ○ 991년(고려 성종9년) 부림 또는 부안(과주의 별호를 부..

안양 민자역사와 역에 얽힌 이야기

안양시와 철도청은 13일 안양민자역사 대합실에서 안양역사 이전 개통식을 가짐에 따라 지난 97년 10월 2일 임시역사로 이전한지 만 4년만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민자 안양역 시대의 막이 올랐다. 안양시가 후원하고 안양역과 (주)안양역사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시장, 시의장 등 각계 인사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양역장의 경과보고속에 민자역사 안양역 개통식 테이프를 끊고 역무시설을 둘러보았다. 안양민자역사는 ㈜안양민자역사와 철도청이 모두 1천100억원을 들여 안양1동 88의1 일대 2만8천47㎡ 부지에 지난 95년 착공해 지하3층 지상9층 규모의 현대식 복합건축물로 LG건설이 시공중이며 이번에 개통된 역무시설은 지하 3층 지상 4층 연면적 8천693㎡ 규모로 시민편의를 위해 대합실과 개찰구.승강장으로 이..

추억의 건물 안양소방서 망루의 연혁

안양소방서 청사신축후 안양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소방서 망루였기에 어느 곳에서 든지 볼 수 있었고 따라서 망루는 넓은 지역을 훓터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당시 화재를 발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 망루였다. 119화재신고 전화로 화재 접보를 받기도 했지만 전화보유의 대중화등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이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망루는 24시간 주·야로 안양시의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안양시내의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징후가 나타나면 신속한 출동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며 이곳이야말로 20여년동안 흘러온 안양소방의 산 역사로서, 시민들의 애환과 노 소방관의 정감이 서려 있는 상징물인 것이다. 망루 높이는 25M 8층 층고로서 망루 정상 외벽에는 아지도 붉은 글씨로 「불조심」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

시흥군 - 안양소방서의 변천사

[시흥,안양 의용소방대의 역사] 가. 최초 의용소방대(시흥군 안양의용소방대) 시흥·안양 의용소방대의 역사는 정부수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회적 여건과 상황은 행정공백 상태를 맞이하게 되어 지도자나 민중이 급격한 변화에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던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러지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적인 기간산업 및 중요업무는 피폐되고 국민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따라서 소방의 업무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전후복구와 수방 및 화재진압과 예방에 힘을 쓰는 중요한 업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행정공백 상태로 인해 소방서의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었는데, 이러한 소방의 업무를 대신할 만한 민간조직이 바로 의용소방대였던 것이다. 1948년 3월 ..

[최승원]역사성이 풍부하게 누적되어 있는 안양유원지

한국 박물관학회 평의원/ 건축사 삼성천 좌측 유유산업에서 안양사 주변 거북골에는 5000년의 한국문화가 누적되어 숨쉬고 있다. 고대 신앙생활의 유적으로서 그 문화적 가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장수바위, 미륵장군등 세계적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거석문화의 흔적들이 이 주변에 널려 있다. 이것은 염불암에서 삼막사까지 연결되는 대장정이다. 만안교(거북다리)에서 시작하여 거북바위(광석바위)→안양사귀부(거북형상)→거북골→삼귀자바위는 거북이의 행렬이다. 중초사당간지주주변 우물은 하단이 4각형이고 상단이 원형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으로 조성되어 있다. 안양유원지 주변에는 99개의 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전설에는 이 절들을 다 볼려면 짚신을 등에 메고 들어가 다 닳아서 나간다는 이야기가 ..

[문원식]'안양면사무소' 복원에 대하여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석수동과 박달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재 안양지역은 일제시대 초기까지 안양천을 경계로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두 개의 면이 합쳐서 서이면(西二面)으로 행정명칭이 변화된 시기는 1914년 3월 1일에 시행된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해서 인데이 때의 서이면사무소는 호계 2동 방죽말에 있는 구 교육청 자리 앞쪽에 있었다. 서이면사무소는 1917년 7월 6일 자로 현재의 안양 1동 사무소 옆 안양옥 자리로 옮겨오게 된다. 면사무소의 이전은 서이면의 중심지가 호계리에서 안양리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데, 1905년의 안양역사 개설로 인하여 인구와 물자이동의 중심축이 안양리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이 곳은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된 이후에..

[문원식]우리가 언제부터 '안양사람'이라 했을까?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99년 봄 100여명의 민방위교육생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할 때, 안양이란 말만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본 적이 있다. 이 물음에 손을 든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20세 이상 안양 시민 중 토박이의 비율과 일치하여 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 기억에 난다. 이처럼 코끝이 찡해진다는 느낌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지역주민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 살고자 하는 것을 이르는 정주의식(定住意識)이란 말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주의식이 지역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은 주민들이 많아질 때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지게 될 것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