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602

1970년대 안양읍내 양지교 주변 풍경

안양 양지교 부근의 1970년대 풍경입니다. 양지교는 수리산에서 병목안과 안양9동, 안양3동, 안양역을 지나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수암천위에 놓여진 다리로 현재의 안양CGV에서 서울쪽으로 30여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80년대 하천을 복개하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지금 다시 뜯어내고 있습니다. 사진처럼 하천에 다시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 것처럼 당시에는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이 놓여져 있었지요. 1주일에 두세차례 자갈을 잔뜩 실은 화물열차가 지나갈때면 도로위에 차들이 쭉을 늘어섰답니다. 당시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인지 요즈음 같으면 교통대란이 일어 났을겁니다. 화물열차는 아주 서서히 운행했는데 아이들이 매달려 새마을까지 올라가거나 내려오기도 했고요. 철길 못을 놓아 납작해진 것..

1970년대 안양읍내(우체국 사거리) 풍경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서안양우체국(과거 안양우체국) 사거리에서 안양천을 건너 이마트가 있는 동안구 비산동으로 넘어가는 관악대로의 1970년대 모습입니다. 우측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은 안양초등학교이고요. 그 아래 주택들이 있는 자리에는 현재 중화당한방병원이 들어섰고, 좌측으로는 현재 남부시장이지요. 당시에는 경부선 철길을 넘아가는 고가도로가 놓여지기 전으로 도로는 비포장에 한산하기만 했지요. 이곳은 과거 교하동(안양5동)이라 불리웠는데 옛 지명인 남부동(안양1동)과 주접동(안양6동) 사이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네로 사실 시민들이 알고 있는 안양5동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지도로 안양5동을 검색해 보면 안양5동은 안양대학교와 근명고 주변인데 이 곳은 만안대로를 건너편에 있어 "이곳이 왜 안양5동..

안양 수리산 담배촌의 천주교 교우촌(1900년대 초)

안양9동 수리산 병목안 골짜기 담배촌의 옛 천주교 교우촌 모습(시진 출처는 http://board.cainchon.or.kr/insamo/?document_srl=32995 년도 미상입니다) 이곳은 기해박해(1839년) 이후 최경환 성인을 비롯한 교우들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뤘던 오래된 교우촌으로 조선시대에는 수리산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해서 '뒤띠미(뒷듬이)'로 불리기도 했지요.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이 곳은 한때 담배를 경작하며 교인들이 살던 곳으로 병목안 첩첩산중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의 은신처로 더 없이 좋은 자리였지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로 충남 청양군 화성면이 고향인 그는 조선 후기 ..

안양 만안교-이전하기 전의 모습(1972년)

정조대왕이 건넜던 안양 만안교의 1972년경 사진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원래 만안교는 안양예술공원으로 등어가는 교차로에서 서울방향으로 약 2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 국도확장의 일환으로 약 200미터 더 올라가 삼막천 위로 옮겨져 복원하여 설치했지요. 1970년대 당시에는 교각의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고, 다리위에 난간이 추가 설치돼 변형됐음을 보여줍니다. 다리 뒷쪽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은 제 어릴적 기억으로 벽산계열의 금강스레트 공장이었던것 생각납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영화하이닉스 아파트가 들어섰고 담벼락에는 만안교가 있었다는 자그만한 표지석만 하나가 역사적 진실을 표현하고 있을뿐이지요. 과거의 놓여져 있던 만안교를 보며 풀리지..

안양천 나무다리-양명고앞(1981년)

안양 양명고 앞에 놓여있던 안양천 나무다리(1981년. 김귀연씨 제공)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검정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다리를 건너는 이 사진은 2009년 11월 안양2동주민센터에서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안양의 재발견 사진첩에 실린 사진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안양천 곳곳에 튼튼한 세월교와 커다란 돌을 놓은 징검다리가 있어 하천을 건너기가 편리하지만 예전에는 수량이 많아 6-70년대에는 드럼통으로 만든 줄배를 타고 건너거나 80년에는 사진처럼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 다녔지요.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

1970년대 안양읍내 풍경(현 CGV사거리)

현재의 안양CGV 사거리의 1970년대 모습입니다,. 안양 도심에 있던 절 용화사가 왼쪽에 보입니다. 이 자리는 이후 본백화점이 들어섰지요. 사진 오른쪽으로 가면 안양역입니다. 어릴적, 그러니까 족히 40년 이상은 되었을 그때의 용화사 경내에는 넓은 마딩이 있었고 큰 갓을 쓴 미륵불이 있었지요. 그리고 크나큰 대문이 가물가물해지는 기억속의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안양읍내 용화사 담벼락 상가

우리안양 제72호(2001년 11월호)에 실린 사진으로 1970년대 자전거가 한가롭게 지나가는 안양읍 중심가의 모습으로 정면이 현재의 본백화점(1983년 11월 23일 개점) 자리이지요. 안양CGV(과거 삼원극장) 쪽에서 사거리 대각선 방향으로 찍은 사진으로 사진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안양역, 왼쪽이 서울 방향(북), 오른쪽이 수원 방향(남)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상점들 뒤 왼쪽에 보이는 기와 건물이 안양역 광장 미륵당에 있던 미륵불을 경내로 옯겨와 모셨던 도심속에 있던 절 용화사입니다. 절 입구는 사진 왼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안양 용화사 자료에 의하면 용화사는 1943년 금강산에서 오신 화응큰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1983년 4월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337-6번지로 이전하였다가 인근에 아파트..

1968년 무렵의 안양영화촬영소

안양 석수동에 자리했던 안양영화촬영소 스튜디오. 신필림이 인수한 이후에 찍은 자료사진(1968년) 우명률의 기억 #안양영화촬영소.=안따까운 일이지만 현실이니 아쉽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국가도 어려운 그시절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동양최대의 시설과 장비그리고 4만여평위에 웅장한 2개의 스타디오가 석수동에세워지고, 상량식사진이 보인다. 국가 개념인 수도영화안양촬영소 간판의 선명하게 보인다 또사진속엔 6,25전쟁시에 참전했던 밸프리트 장군과 초대홍찬촬영소장님도 보인다.안양석수동에서 제작된 첫영화는 "생명"이고2회는 "낭만열차"3번 "애정"4회는 지옥은 만원이다.그리고 허리우드감독과 미국무성작품은 고요한 한국의 아침.등 만들어졌다고 그시절 촬영스탭으로 했던 백영호[89]선배가 기록한내용이다 찍은 년도는 58~6..

안양영화촬영소 제2스튜디오 상량식(1958년)

안양 석수동에 자리했던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 제2스튜디오 상량식(1958년) 출처: 조선일보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며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에 의해 안양시 석수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영화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를 설립했다. 당시 기공식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해 테이프를 끊고 축하했다. 안양영화촬영소는 대지 3만평에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 2개동과 수중촬영장, 현상소 및 영사실 등을 비롯 촬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을 일괄 처리하는 동양최대의 시설로 한국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이강천 감독의 '생명'을 첫 작품으로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