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552

[옛신문]제1회 안양 밤줍기대회 참관 후기(1933.10.04 동아일보)

#기록 #옛신문 #안양 #습률대회 #밤줍기대회/ 1933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에 게제된 제1회 전국 부녀자밤줍기대회(습률대회)의 참관 후기. 일제강점기 이전 안양 담안(4동)과 율목동(3.9동)은 밤나무밭으로 1933년과 1934년에는 동아일보사와 그 자매지인 신가정(현재의 여성동아 전신) 주최로 전국부녀자 밤줍기대회가 열릴만큼 밤의 명산지로 유 명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밤줍기대회 관련기사 중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 글은 습률대회에 다녀온 기자가 쓴 참관 후기로 보인다. 금물결 치는가을들에 전개된 호화판 제1회 습률대회 후기-k생 동아일보 | 1933.10.04 기사텍스트) 새벽 하늘에 별이 채 살아지지도 않은 듯 싶은 기차가 떠나려면 아직도 한시간 반은 있어야 되는때부터 용산역은..

[옛신문]경향신문 지령10000호 특집 '강산만리' 안양편(1979.03.14)

2022.11.12/ #옛신문 #아카이브 #자료/ 경향신문 지령10000호특집 江山萬里(강산만리) 1979.03.14 기사 칼럼/논단) 안양고향) 따라 靑(정따라 토박이 에세이 포도알 애향심은 아득한 「淨土(정토)」..."내일의 繁榮(번영) "힘차게 公害 공해없는 衛星工業(위성 공업) 도시로 새面(면모) "地域(지역) 발전"에 강한 紐帶(유대) (과천) (반월) 光( 광)업 고 더욱 活(활기) 肥(비옥한 타원 (분지)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오려거든 3등객차를 타고 오렴. 鄕土(향토)의 토박이 K시인은 安養(안양)을 이렇게 노래했다. 서민적이고 전원적인 흙의 냄새를 담뿍 담고있는 이 시의 安(안양)은 원래가 佛敎(불교)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지니고 몸을 쉬게 하는」極樂土(극락정토..

[옛신문]22명 생명 앗아가 안양 그린힐 화재(1988.03.25)

2022.11.06/ #기록 #옛신문 #안양 #그린힐화재/ 안양에서 발생한 아품의 사고중 하나. 22명의 여성노동자가 화재로 숨진 그린힐 봉제공장 사고 1988년 3월 25일 안양시 비산1동 그린힐 봉제공장(비산종합상가 빌딩 3층. 현 비산이마트 건너 에비뉴빌딩 자리)에서 화재가 났다. 일에 지쳐 기숙사에서 곤히 잠을 자던 소녀 스물 두 명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간 비국적인 사건이었다. 화재 원인은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불법 기숙사 운영과 무허가 공장을 숨기기 위해 출입문에 쌓아놓은 제품이 인화성 물질 역할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출입문에는 철재 셔터로 닫혀있고, 지상으로 연결된 화장실 창문에는 쇠창살이 달려있어 불 속에서 소녀들은 살기 위해 화장실에서 몸부림치다가 켜켜이 쌓여 타 죽고 만다.당시 여성 ..

[최병렬]기록으로 안양천 톺아보기-PDF파일(2022.11.06)

2022.10.04/ #안양천 #문화도시 #안양문화예재단/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안양의 문화도시 사업으로 ‘내가 만들고 가꾸는 PLAY CITY’를 실현하기 위해 마련한 ‘안양천, 요즘 어때요?’ ‘안양천, 요즘 어때요?’는 안양천 유역 생태계와 역사-문화를 함께 알아보고 시민 개개인의 경험을 공유하며 안양천의 놀이 문화 조성을 함께 모색하는 활동으로 총 7회에 걸쳐 ▶안양천의 역사와 문화 ▶수변문화 활성화 사례 공유특강 ▶안양천의 다양한 활동조사 발표 ▶활동 제안 워크숍 등 교육과 라운드 테이블 형식으로 진행했다. 그중 안양천 톺아보기는 안양천의 약사와 문화 등 이해를 돕기위해 지난 10월 4일 실시한 한 강의로 PPT내용을 PDF로 변환한 자료다.

[옛신문]안양 유유공장 화재(1996.04.19)

2022.11.06/ #기록 #기억 #화재 #유유산업 #옛신문 #옛사진/ 사진 제공: 안양소방서에 근무했던 김종철 소방관. 사진속 화재가 발생한 장소는 현재의 특별기획전시관이있던 곳이다. 1996년 4월 29일 오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모기약제조업체인 유유후마킬라㈜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이날 불은 창고안에 있던 18억9천7백여만원 상당의 분무식 모기약 완제품과 기계류, 창고건물 3채를 모두 태운 뒤 인근 1백40평규모의 비닐하우스로된 화원(주인김태종) 2채와 김씨의 승합차로 옮겨 붙어 1천3백여만원의 재산피해를 내 전체 재산피해액은 19억1천여만원(경찰추정)에 달하는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불로 이 회사 생산부장 신순성씨(54) 등 직원 2명과 이명숙양(17) 등 인근 지역주민 6명, 안양소방서소속..

[최승원]1824년 채제공이 쓴 時文 안양교행/安養橋行(20221025)

채제공(蔡濟恭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이다. 이황(李滉), 정구(鄭逑), 허목(許穆), 이익(李瀷)을 이은 청남(淸南)의 영수로서, 노소론 당쟁의 와중에서 탕평을 표방한 영조와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특히 사도세자의 보호에 앞장선 것이 인정되어 정조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오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신해통공, 이조 전랑 통청권(通淸權) 혁파, 수원 성역(城役) 등 개혁 정책을 실행하였다. 안양교행(安養橋行)은 조선 후기의 문신 채제공(蔡濟恭)이 1824년 쓴 시문집인 《번암집》에 실린 글로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에 전배할 때 건너기 편리하게 하고자 197..

[최승원]일제강점기 안양시 시회(詩會)자료 관양음사욕란첩(20221024)

안양시 시회(詩會)자료 일제강점기에도 전통적인 의미의 시회(詩會)는 지속되고 있었다. 지역사회에서의 詩會는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식자층의 지식인으로서의 위상을 사회를 통해 확인하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전주류씨가 소장자료에는 [관양음사욕란첩冠陽吟社浴蘭帖](6-137, 8-4)이라는 25장으로 된 시집이 남아있다. 이 자료는 일제강점기의 안양의 詩會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된다. 이 시집은 관양음사(冠陽吟社)에서 펴낸 것이다. 서문은 1925년 단오(端午) 5일전 즉4월30일에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가 지었다. 이왕직(李王職) 전사 (典祀)로 재임하던 정만조는 서문에서 “나 또한 관양인(冠陽人)으로 선묘(先墓)가 있고 병사(丙舍:산소 곁에 지어놓은 齋..

[최병렬]서울-안양 잇던 1번 국도의 안양천 다리 안양교(20221023)

2022.10.23/ #도시기록 #안양천 #안양교 #교량/ 과거 서울에서 안양으로 진입하던 1번국도의 안양천을 건너던 교량이다 첫 다리가 놓여진 시점은 모르나 1960년대 사진에 나오는 안양교 다리를 보면 왕복 2차선으로 폭이 좁았다. 현재의 다리는 4차선으로 1986년 확장공사를 통해 다리를 새로 놓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터넷에서 안양교 검색을 하면 이름과 달리 서울시 구로구와 광명시 철산동을 잇는 다리로 표시된다. 이 다리는 확장 전인 2016년부터 교량 명칭을 사성교로 변경했지만 2022년 현재도 교통정보 등을 통해 관습적으로 안양교로 부르고 있다.

[최승원]6.25전쟁시대 안양(2022.10.18)

6.25 전쟁시대 안양 6월25일 새벽4시 전면남침으로 6.25전쟁이 터지자 안양 비산동이 술렁거렸다. 한강교가 28일 사전 폭파되어 7월3일 북한군전차 한강도하로 남침이 다소 지연되었으나 7월4일 한강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안양지역은 산세로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 남침시 국군의 안양지역방어는 견고했다고 인민군은 기술하고 있다. 탱크에 밀려 안양을 포기했지만 무기가 같은 수준 이라면 한국전쟁을 안양에서 막아냈을 것이다. 안양함락직전 안양역 남측 건널목에 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남부여대하고 하얗게 깔려있었다. 모친이 철길에들어서자 넘어져 무릅에서 피가 철철 나와 우리는 비산동 집(심재황 초교 동기집) 부엌채로 귀가 하였다. 동네에 심부자 집 큰기와 집이 인민군내무서로 징발되어 초병이 칼이긴 총을 메고 ..

[최승원]6.25전쟁 나의 이야기()

6.25전쟁 나의이야기 - 보리가 익어 추수시 비산동 태평방직사택에서 돼지도 키우고 살던중 6.26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은 식량이 현지 조달이라 추수기를 남침의 시기로 보았다. 모든 피난민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새하얀 무명 흰옷을 입고 경부선철도를 들어서자 마자 인파가 몰리는 중 넘어져 모친의 무릎에서 피가 심하게 나와 피난을 포기하고 집으로 철수하였다. 국군들은 안양천 안양방어선에서 치열한 방어를 다하였으나 무너지고 적치가 되었다. 동네 심 씨네 큰 한옥은 내무서가 되어 긴 충을 멘 인민군이 지키면서 동네사람들을 통치하였다. 동네 큰집은 아군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에 수난이다. 식품을 현지 조달하는 인민군은 우리집에서 키우던 새끼 밴 돼지를 공출하였었다, 이내 뱃속에 있던 새끼는 바켓스에 넣어 집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