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이용구]안양 병목안 채석장의 기억(2010.05.20)

안양똑딱이 2019. 8. 12. 21:13

병목안시민공원 탐방기

 

지난 5월15일은 스승의 날이자 우리 안양 토박이들의 모임(서이회)이
 있어 점심을 하고 처음으로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에 있는 병목안
 시민공원을 가 보기로 했다


 이곳은 벌써 4년전인 2006년 5월 24일에 완공을 보았고 이에대한
 찬사(讚詞)가 자자해 한번 꼭 가 보려 했으나  나는 가까이 살고 있다
 하여 차일피일 하다가 이제껏 가 보지 않았다가 오늘 시간도 있고 
날씨도 좋은 기회라 하여 나섰다


 말에 의하면 여기에 10만1.238m2 부지에 약 260억이란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안양 시민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시내 창박골행 버스로 
삼거리 수퍼앞에 내리니 바로 올려다 보였다  공원입구 광장 안에는
 자연석에 가로 새긴 "병목안시민공원"이라 쓴 돌 비석이 있었다 


여기에는 주차장이 있고 각종 식물원과 잔디공원을 지나 가파른 언덕
 근 백개의 돌 계단을 올라가니  5개의 크고 작은 인공폭포
(높이65m 폭95m)가 있는데 그 위용(偉容) 이 장관이었다


 폭포 앞에 넓은 광장에는 각종 파라솔과 벤취에는 가족단위의 시민들이
 한가롭게 휴식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정자와 팔각정자가 보였다
 그리고 발 지압장을 비롯하여 체력단련장(8종14개의 운동시설) 어린이
 놀이터 시설 그리고 모형 화물열차가 있고 그 옆에 화장실과 매점이 있다
 그 외 만남의광장 야생화정원 사계절정원 중앙광장 산책로등이 있었다


 특히 전시용 화물열차에는 돌이 실어져 있었고 당시 자갈을 운반하던
 소형의 자갈차였다 또한 눈을 감으니 내가 어려서 본 채석장 암석을
 폭파하는 폭음이 귀에 들리는듯 하고  큰 돌을 분쇄하는 기계(碎石機)
소리와 뿌연 돌 먼지등 자갈을 운반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또한 이곳은 내가 어려서 뛰고 놀던 범위의 고향 마을이다 내가 어려서는
 한낱 채석장(採石場)이고 여기서 더 가면 속칭(俗稱) 담배촌이란 마을이
 있는데 구한말 당시 천주교 탄앞으로 교인들이 이곳 산속으로 피신하여
 담배와 참 숯을 구어 생계를 이었다 한다


 그래서 담배촌이라 했고 이곳에는 천주교 순교자 신부의 묘소도 있으며
 수리산 북측 수암천(秀岩川)의 발원지(發源地)로 봄철에는 고사리
 싸리버섯등 각종 산 나물의 생산지 이기도 했으며 여기 까지도 안양시
 관내로 안양시 유원지에 속해 있다  


이 채석장은 내가 유년시절 자갈을 운반하기 위해 우선 (1935년경)
안양역에서 부터 현 안양 3동사무소 앞까지 자갈 차 길이 생겼으나
 그후 이에 약 2배나 멀리 산속으로 (오지) 대폭 연장 하여 이곳
(안양9동) 시민공원 앞까지 차 길을 깔아 당시 1940년경 경부선
 복선공사(複線工事)와 수인선 기타 신설등 철도 기차 선로
 보강보수용 자갈을 생산해 실어 날랐다


 그후 오래전 부터 자갈이 그리 많이 필요치 않아 채석장은 자연
 폐쇄(廢鎖)되는 바람에 방치 되었고 기차길 마저 철거 되어 폐석장
 절개사면을 그냥 두쟈니 미관(美觀)도 나쁘고 낙석(落石)등 위험도
 있다 하여 안양시에서 착안하여 과감히 시민공원으로 발전
 조성된 것이다


 딩시 자갈차는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빈 납작한 자갈차 여러대를
 연결하여 기적을 울리며 기관차가 밀고 들어 왔다가 자갈을 싫은 차를
 끌고 나갔다 우리 꼬마 들은 느리게 밀고 들어오고 나가는 자갈차를
 뛰어 잡아 타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 차장과 기관사는 위험 하다 하며
 못 타게  크게 소리소리  질으며 제지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재미 나게 타고 내리던 옛 추억도
 떠 올랐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위험한 짓이었다 그후 철거 되기 까지
 여러가지 문제와 사상(死傷) 사고등 사건이 있었으나 그것은 이자리에
 생략 하기로 한다


 또한 옛날 내가 자랄 때는 이곳은 산간 벽지로 그 앞 냇가 변두리에
 산 딸기가 많아 따 먹기에 바빴고 숲이 울창하여 혼자서는 가기가
 서먹 했던 이곳이 그후 70 여년이 지난 오늘날 이를 중심으로 이런
 오지에 이르기 까지 아파트. 일반주택. 학교. 한증막(찜질방) 음식점.
오락시설 기업체 등이 꽉 들어차 있다


 내 고향이 이렇게 눈 부시게 발전을 하다니 세월에 감사 하며 더욱
 애향심(愛鄕心)을 느끼는 동시에 더욱 발전 되어 살기좋은 안양시가
 되길 기원 하였으며 오히려 내가 늙었음을 실감 했다


 또한 이곳은 수리산 입구로 겨울을 제외 하고는 수리산 등산 객으로
 분볐으며 오다 가다 쉼터가 되고 있으며 매점으로 통하는 등산로로
 조금 더 가면 2개의 석탑(石塔)이 있다


 계속 올라 가면 몇개의 약수터와 황토길 체력단련장 충혼탑(忠魂塔)
등이 있고 안양 5~8동으로 통하는 안양 유일의 수리산(修理山) 산책은
 물론 공기 맑은 삼림욕장(森林浴場)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안양9동-3동-2동으로 시내로 흐르는 수암천(秀岩川)은 비교적
 건천(乾川)에 가까워 진 겨울은 물이 흐르지 않으나 여름철 장마 때는
 홍수(洪水)로 물이 넘치는 지라 수시로 준설과 대비를 하고 있으며 매년
 장마(홍수)가 지나가면 많은 돌이 솟았기 때문에 이곳을 자갈
 채취장으로 선정 된 것이었다 


내려 오는 길목  마침 매점 앞에 안양 신일교회에서 베푸는 커피 한잔을
 대접 받고 걸어 오며 옛 유년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아래 내가 살던
 옛 집과 이웃을 찾아 보니 벌써 돌아 가신 분도 계시고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려오며 삼덕공원(三德公園)을 들러 보고
 집에 돌아왔다.

 

이 글을 쓰신 이용구(李瑢求) 선생은 1926년 10월생으로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년시절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9살 나던 1934년에 안양공립보통학교를 7회로 입학해서 졸업했다. 이후 경기공립상업학교를 다닌 선생은 졸업한 이듬해인 1945년 1월부터 40년간 근속으로 철도청에서 근무한 후 1984년 정년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학창시절 작문시간이면 고역을 치르곤 했던 선생은 철도청에서 발간하는 ‘교통’이란 잡지를 보고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껴 ‘여행의 유혹’이란 제목으로 투고했더니 이후 3회에 걸쳐 게재가 되고, 원고료도 받고 동료들의 칭찬과 격려까지 들어 몹시 즐거웠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후 기쁜 마음에 여기저기 투고 하게 되었고, 투고하는 것 마다 게재가 되어 30년간의 문필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유년 시절인 일제 강점기부터 8·15해방 이후 안양의 산업화·도시화 과정과 생활상, 풍속 등을 담은 자전적 수필집 '양지마을의 까치소리’(1991)를 펴냈는데 안양의 엣 사회상을 담고 있어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료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