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 774

[20170322]안양 담배촌에 사셨던 복자 이성례 마리아

복자품에 오른 이성례 마리아의 삶 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박해와 순교의 땅, 한반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한 시복식에서 복자(福者)로 선포한 순교자 124위 중에는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기해박해 당시 수리산 담배촌, 일명 뒷뜸이에 살던 한 여성이 포함돼 있다. 그는 충청도 홍주 출생의 복자 이성례 마리아(1801~1840)로 우리나라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어머니이자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최경환(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인으로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용산 당고개 성지에서 순교하면서 자식들에 대한 순수한 모성과 신앙을 함께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이미 복된 삶을 누리고 있..

[20170322]안양시의회 김대영의장 '제9회 지방의정봉사대상' 수상

안양시의회 김대영 의장이 지난 21일 그랜드플라자 청주호텔에서 열린 2017년 전국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 정기총회에서 「지방의정봉사대상」을 수상했다. 김대영 의장은 제7대 전반기 총무경제위원장과 후반기 의장으로서 시민들과 소통하며 소신있는 리더십으로 시민과 집행부의 가교 역할을 훌륭하게 한 점을 인정받았으며, “의정활동을 도와준 동료의원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으며, 항상 성원해 주시는 시민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전국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제9회 지방의정봉사대상은 전국 기초의회 의원 중에서 의욕적인 지방의정을 통하여 지역발전에 헌신한 의원에게 시상함으로써, 지방의회 의원의 자질과 전문성을 제고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최병렬]안양 만안구 대농단지의 변천사

안양 만안구 대농단지의 변천사 안양 박달1동과 안양3동에는 대농단지라 불리우는 대규모 주택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들에 의해 과 인견(人絹)을 생산하는 조선직물주식회사와 조선견직이 들어섰던 대규모 공장이었지요.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화신백화점 총수였던 박흥식이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초대형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오마이뉴스 기사] 반민특위에 제1호로 검거된 '매판자본가' [특별기획-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9] 전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반민특위에 제1호로 검거된 '매판자본가' [특별기획-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9] 전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www.ohmynews.com h..

[정진원]안양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정진원]안양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우리나라 지명, 특별히 마을이름의 역사에서 볼 때 1914년은 마을이름의 ‘창촌개명(創村改名)’의 해였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우리네 선조들을 모욕한 것이라면, 창촌개명은 우리네 땅을 더럽힌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7만여 개 정도의 우리나라 마을(구동리)을 2만여 개 정도의 신동리로 통폐합하였다. 세 개 정도의 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신동리를 만들고, 거기에 어김없이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때 순수소박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잡종생경한 한자 동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수푸르지 [숲골>숲울>수푸르지, 임곡(林谷)] 지금 안양역 동쪽 지역 안양1동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한 아파트 자리에 일찍이 정기시장이 형성되었다. 안양에서는 유일한 시장이..

[정진원]의왕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정진원]의왕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우리나라 지명, 특별히 마을이름의 역사에서 볼 때 1914년은 마을이름의 ‘창촌개명(創村改名)’의 해였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우리네 선조들을 모욕한 것이라면, 창촌개명은 우리네 땅을 더럽힌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7만여 개 정도의 우리나라 마을(구동리)을 2만여 개 정도의 신동리로 통폐합하였다. 세 개 정도의 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신동리를 만들고, 거기에 어김없이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때 순수소박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잡종생경한 한자 동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그내 [사근천(沙斤川), 사천, 모래내] 지금 의왕시 고천동이 그때 이름 붙여진 신동리이다. 그 신동리 안에 가장 큰 마을이 ‘사그내’였다. 지금 고천초등학교, 전 의왕..

[정진원]과천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정진원]과천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우리나라 지명, 특별히 마을이름의 역사에서 볼 때 1914년은 마을이름의 ‘창촌개명(創村改名)’의 해였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우리네 선조들을 모욕한 것이라면, 창촌개명은 우리네 땅을 더럽힌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7만여 개 정도의 우리나라 마을(구동리)을 2만여 개 정도의 신동리로 통폐합하였다. 세 개 정도의 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신동리를 만들고, 거기에 어김없이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때 순수소박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잡종생경한 한자 동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제비울 [참새울, 까치울, 노루울, 가래울, 가재울] 제비, 참새, 까치가 많은 마을이라서 제비울, 참새울, 까치울이 되었을 것이다. 제비는 착한 마음씨의 사람을 좋아해서..

[조성현]고려최영(崔瑩)장군과 ‘안양사칠층전탑’

고려최영(崔瑩)장군과 ‘안양사칠층전탑’ 기록 속 태조왕건이 세우고 고려말 최영장군이 ‘안양사칠층전탑’을 보수했다고 등장하는 고려안양사. 좌측상단 사진은 전탑지의 전탑이 주저앉아 무너져 폐기된 전과 기와편들의 양상으로 전탑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려백자 연봉(연꽃봉우리 장식, 우측상단 사진) 등 다량의 매장문화재가 노출되어 고려 안양사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다. 고려안양사에는 삼층석탑과 전탑이 사찰의 중심공간인 금당지 앞에 나란히 자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고려안양사의 석탑과 전탑지는 김중업박물관(구,유유부지, 문화누리관인근)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옛시문 속에서 고려 명종때 문신 김극기(金克己, 1150~1204)는 고려안양사를 방문하고 “걸어서 아름다운 다리를 지나 감색으로 붉게 ..

[조성현]고려시대 안양사지(安養寺址)출토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鐵馬)에 대한 고찰

고려시대 안양사지(安養寺址)출토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鐵馬)에 대한 고찰 안양시문화해설사 조성현 □들어가는 말 2014년 갑오년(甲午年) 말(馬)의 해를 맞아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 초입 고려안양사지(구,유유부지/ 현,‘김중업박물관’복합문화단지)발굴 및 출토된 용도미상의 철제동물장식인 ‘철마(鐵馬, 철제말장식)’를 타도시의 사례를 고찰하여 그 성격과 (추정)용도를 규명하고자 한다. 철마는 말의 형태를 본 따 용해된 철을 부어 주조한 것을 말한다. 타 지역의 출토 고려시대 철마의 사례분석결과 철마는 신령스런 기운을 가진 신마(神馬)로서 호랑이 출연이 잦은 지역에서 호랑이로부터 화를 당하는 것(虎患)을 회피하는 등 교통의 안전을 확보하는 기능과 함께 민간신앙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철마는 철제로 만든 ..

[최병렬]안양 수푸루지 마을과 옛 다운타운 이야기

안양 수푸루지 마을과 옛 다운타운 이야기 ● 안양 수푸루지 마을의 이야기 임곡마을은 안양8경중 제1경인 '망해암 일몰'을 볼 수 있는 비봉산이 품고 있는 곳이다. 대다수(임곡 1.2지구) 지역이 주거환경개선으로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임곡3지구에는 아직 사람이 한명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은 골목길과 기와집, 철지붕집, 판잣집, 양옥집, 다세대, 다가구 등 마치 건축물의 변천사를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수푸루지'(林谷洞)는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 하여 칭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林川)’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수푸루지 내에서도 동쪽지역을‘건너말’, 서쪽지역을 ‘아랫말’, 북쪽지역을 ‘웃말’이라 칭했다. 또 마을..

[최병렬]현재의 안양 만안교는 이전복원한 것이다(2017)

현재의 안양 만안교는 이전복원한 것이다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38호이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며 홍예가 7개인 다리는 만안교가 유일하다. 정조(正祖, 1776~1800재위)는 1789년 아버지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모두 13번에 걸쳐 화성을 방문하는 능행 거둥길(임금의 나들이길)에 나서 처음에는 왕궁인 창덕궁을 나와 용산을 지나 노량진에서 배다리(용양봉저정)를 놓아 한강을 건너 동작에 도착한 후 남태령(南泰嶺)을 넘어 과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