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품에 오른 이성례 마리아의 삶
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박해와 순교의 땅, 한반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한 시복식에서 복자(福者)로 선포한 순교자 124위 중에는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기해박해 당시 수리산 담배촌, 일명 뒷뜸이에 살던 한 여성이 포함돼 있다.
그는 충청도 홍주 출생의 복자 이성례 마리아(1801~1840)로 우리나라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어머니이자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최경환(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인으로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용산 당고개 성지에서 순교하면서 자식들에 대한 순수한 모성과 신앙을 함께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이미 복된 삶을 누리고 있을 순교자들을 세상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지상교회에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복자와 성인으로 선포하는데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1925년에 7월5일 교황 성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성인(聖人) 반열에 오른데 이어 부인 이성례 마리아가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선포된 것이다.<p> </p>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 집안 출신으로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열여덟 살 때 최경환과 혼인한 뒤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1821년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다. 이후 서울로 이주했으나 이때부터 박해 속에서 강원도와 경기도 부평으로 전전했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자식들 손을 잡고 이리저리 떠도는 고단한 삶이었다.<p> </p>그런데도 그는 고난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런 고통은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모범과 어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구해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p> </p>최양업 신부는 그가 남긴 서한에서 “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주셨다”며 어머니의 가르침을 회고했다.<p> </p>박해를 피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는 고난은 조선조 헌종 2년인 1936년 천주교 사제로 봉헌하기 신학생으로 선발된 장남 최양업을 마카오로 떠나 보낸데 이어 1837년 7월 외부와 단절된 피난처를 찾아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 '뒷뜸이'로 들어가 일가족이 함께 은거하면서 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을 일구면서 잠시 멈춘다.<p> </p>조선시대 과천지방에 속해 있던 '뒷뜸이'는 산수가 화려하고 아늑하면서 깊은 골짜기로 박해를 피하기 좋은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했다. 이곳에서 천주교신자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담배농사를 짓고 숯을 만들어 팔며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p> </p>이성례는 남편을 정성으로 공양하고 열심히 수계했다. 40일 봉재(封齋; 사순절) 때면 재를 지키면서 남긴 식량과 돈을 모았다가 남편과 의논한 뒤 가난한 교우에게 나누었다. 또 남편 최경환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 시신을 찾아 묻어주는 등 교우들을 돌봤다.<p> </p>그러던 중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하던 기해박해사건이 터진다. 그를 쫓던 발길은 깊은 산속에도 미쳐, 1839년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돼 일곱 식구 모두 압송되면서 파란만장한 최경환 이성례 부부 가족의 비극은 여기부터 시작된다.<p> </p>남편 최경환은 이 날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포졸들에게 “아직 동이 트지 않았으니 식사를 해서 기운을 돋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으며 이성례는 포졸들의 식사를 준비했다.<p> </p>식사가 끝나자 최경환은 오랏줄에 묶여 서울로 압송됐다. 이성례도 젖먹이를 포함해 아이들 5명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갔다. 남녀 교우 30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p> </p>최양업 신부의 3째 동생 최우정(바시리오)의 장남 최상종(빈첸시오)이 1939년에 기록한 최경환과 이성례의 순교 기록을 보면 배교하라는 모진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남편인 최경환 성인은 1839년 9월 12일 볼기매(곤장) 110대를 맞은 후휴증으로 그렇게 옥에서 장렬히 순교한다. 그의 나이 34세 였다.<p> </p>남편과 함께 붙잡혀 온 이성례에게 포장(鋪裝)은 “너는 여인으로서 흉악한 남편 인도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 뉘우치면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p> </p>하지만 이성례는 “죄인은 남편의 인도를 받습니다. 본래 천주는 만유(萬有)의 대군대부이시니 충심으로 공경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목숨은 바칠지언정 진주(眞主)는 배반하지 못하겠나이다.”<p> </p>이성례는 몸이 헤어질 정도로 매를 맞았다. 수십명의 신도들이 매 한 대를 맞기도 전에 배교한다고 말하고 풀려났으나 그는 수개월 동안 문초를 받으면서도 배교를 거부했다.<p> </p>하지만 그의 마음을 흔든 것은 아이들이었다. 이성례는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의 사이에 19세 된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학생과 12세의 야고보 등 6형제를 두고 있었다. 큰아들 양업은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났고 그 밑으로 의정(14)ㆍ선정(9)ㆍ우정(7)ㆍ신정(5) 등 어린 자식들은 고아 아닌 고아가 돼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p> </p>더욱이 체포될 때 업고 들어간 젖먹이에 대한 모정이었다. 굶주림과 고문 탓에 젖이 나오지 않자 젖먹이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옥중의 차갑고 더러운 바닥에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아사(餓死)하자 이성례는 차마 모정을 못 이긴 채 “나, 천주(天主)를 모르오”라고 외쳤다. 어머니로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 살배기 막내가 굶어 죽은 뒤 남은 아이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는 “배교한다”고 말하고 풀려난 것이다.<p> </p>기해박해 때는 신유박해 때와는 다르게 부부순교자 혹은 가족순교자가 많은 반면 비교적 다른 박해 때보다 배교자가 속출했다. 특히 여성신자들 경우에는 모성애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성례 마리아이다.<p> </p>그러나 이성례는 큰 아들 최양업이 외국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형조로 압송됐다. 그는 그곳에 갇혀 있는 용감한 신자들의 격려에 힘을 얻어 배교를 취소했다. 그는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회개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결심했다.<p> </p>둘째 아들 의정(야고보)은 옥사장이 눈을 감아줘 감옥에 가끔 드나들었다. 구걸한 돈으로 음식을 장만해 어머니께 갖다 드렸는데 관노의 자식들이 이를 중간에서 가로채기까지 했다. 이성례는 철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 없이 외롭게 버려질 것을 생각하자 모성애로 다시 쓰린 가슴을 안고 몸을 떨었다.<p> </p>아이들은 감옥에 찾아와 “어머니, 어머니!”하며 목 놓아 슬피 울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는 다들 가거라.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절대 잊지 말아라. 하느님 계명을 잘 지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거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양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라.”고 하면서 야고보를 불러 타일렀다. 또 다시 모정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미리 유언을 남기고 자신도 굳은 다짐을 한 것이다.<p> </p>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머니로부터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야보고는 옥에서 눈물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성례는 마음이 흔들릴까봐 더 이상 아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p> </p>“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주세요.”<p> </p>순교자 이성례의 아이들이 어머니 이성례의 목을 벨 망나니에게 한 말이다. 거지나 다름없는 네 형제는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떡을 망나니에게 내밀며 이렇게 부탁했다. 어린 자식들의 눈물겨운 부탁에 망나니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p> </p>1840년 1월 31일, 이성례 마리아는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순교에 방해가 될까봐 아이들을 떼어 보내고 다시 옥에 갇힌 지 9개월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된 것이다. 그때 나이가 39세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 끊을 수 없는 모정마저도 신앙심으로 하느님께 봉헌한 것이다.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된 네 형제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먼발치서 바라봤다.<p> </p>최경환ㆍ이성례 후손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 첫째 동생 야고보는 둘째를 목천 서덕골 큰아버지 댁에, 셋째를 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 댁에 나눠 의탁했다. 그리고 넷째 동생은 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겼다. 신부가 돼 돌아온 맏형 최양업은 1849년 용인 한덕골 작은 아버지 집에서 동생 4형제를 만났다. 몇 년 후 최 신부는 셋째ㆍ넷째 동생을 신심이 깊은 송구현(도미니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와 결혼시켰다.<p> </p>순교자 최경환 최성인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졌으며,<p> </p>성인 최경환과 부인인 복자 이성례 가족이 교우촌을 만들어 살았던 안양9동의 수리산 담배촌에는 1963년 5월 당시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에서 복자였던 최경환 묘지(福者墓地)에 순교기념비를 건립했으며 이후 1990년대 후반에 십자가 14처, 성모동굴 등을 설치하고 2000년 수리산성당을 건축하여 순례사목을 위한 성지로 운영하고 있다.<p> </p>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2000년 은총 대희년과 2001년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전대사 은혜를 받는 순례지로 지정해 전국에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p> </p>헌재 이 곳에는 수리산성당, 최경환 성인의 유해(팔뼈)를 모신 고택성당, 성인이 안장됐던 진토가 포함된 무덤인 가묘가 있다. 또 묘소 주변에는 야외미사터, 동굴성모상, 순례자들이 묵상하며 예수의 십자가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조형물들이 산자락에 있다<p> </p>안양시도 이곳을 안양8경중 제5경으로 지정했다.
한편 당시 구성됐던 교황방한준비위원회는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과 어머니 이성례의 신앙 본보기를 담은 창작 오페라로 이들 가족들이 걸어간 신앙의 길을 보여주는 창작오페라 '뒤뜸이골 무지개' 를 준비했었는데 제대로 추진되지 못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총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아버지 최경환 성인의 묘소를 찾아가는 최양업 신부의 발걸음으로 시작된다. 또한 당시 시대적 배경과 평온한 수리산 교우촌 등 신앙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3막부터는 최경환 성인이 포도청으로 압송되는 과정, 고문과 회유에도 신앙을 지킨 성인과 하느님의 종 124위에 포함된 '모진 육정을 극복한 위대한 어머니' 이성례의 한많은 모성이 펼쳐진다.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리카르도 죠반니니 교수가 작곡한 뒤뜸이골 무지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낭만주의에 이르는 전통적인 클래식 기법과 한국적인 색채가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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