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사람

[20240126]안양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 이경선(李景仙)

안양똑딱이 2024. 1. 26. 17:37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대한민국 안양 출신으로 안양3동에 있던  조선직물주식회사에서 여성노동자로 일했던 여성 독립유공자다. 이관술의 제자로 반제동맹 독서회의 핵심 활동가였으며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했다. 광복 후 제주 4.3 사건에 휘말렸다. 202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며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이경선(李景仙)지사는 1914514일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安養)리에서 고부이씨 이도일(李道一)과 김응주의 장녀로 태어났으나 본적은 가파리 342번지이다. 李蓮順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식 이름은 노무라(乃村景仙)이다.

이도일(1897~1971)은 한학자로 대일항전기 가파도 신유의숙(가파초 전신)을 설립하여 초대 숙장을 역임했고, 탁월한 사업수단으로 서귀포지역의 유통업을 일으켜 일제 자본과 맞섰으며, 많은 항일운동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광복 후 대정중(1947)과 대정유치원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으며 대정중학교 초대 교장, 대정유치원 초대 원장이다.

대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212월 서울에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同德女子高等普通學校) 재학 중 울산 출신의 교사 이관술(李觀述)의 지도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19331월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훈방되었으며, 2월에는 독서회 사건 혐의로 임순덕(林順德)과 함께 서대문경찰서 고등계에 연행되었으나 풀려났다. 동년 3월에는 동덕여고보를 졸업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학기 수료 후 도쿄의학전문학교로 진학하기 위하여 자진 퇴학하였다.

이관술은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학과를 졸업했고,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공산주의에 공명하여 19335월경 이원봉(李元奉이재유(李載裕)와 사귀면서 사상이 더욱 굳어졌다. 동년 10월 서울 창성동 152번지에서 이재유로부터 숙명여고보 및 기타 여학생층에서 동지를 획득하라는 지시를 받고, 숙명여고보 김주원(金周媛)의 집을 방문하여 독서회 조직에 대하여 찬동을 얻어내고, 동교의 방봉랑(方奉嫏)과 신진순(申進順)으로부터 승낙받아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재유는 함경남도 삼수 출신으로 1928년 공산당 일본총국에 입당하였고, 동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련자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33년에는 동덕여고보 등 7개교의 동맹휴교와 교사 배척 운동을 지도하였으며,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341월에 체포되었으나 유치장에서 탈출했다. 1936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다가 12월에 다시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받아 1942년 만기가 되었으나 전향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출옥하지 못하고 194410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순국하였다.(공훈전자사료관)

1934년에는 경기도·강원도를 중심으로 인텔리 노동자·직공 등을 망라한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경기도 시흥군 소재 조선직물주식회사(朝鮮織物株式會社=조선방직) 인견(人絹)공장의 여공으로 취직해 여공들을 동지로 포섭하여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이끌었으며, 산업별 적색노동조합 동지 획득 및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으로 활동하다 동년 221일 체포되어 징역 16,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41년 일본 고베(神戶)시의 나카노(中野)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129일 에 효고현 경찰에에 체포당했다가 풀려나온 뒤 고베약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다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당하고 효고현(兵庫縣)에서 19421023일 징역 1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항일운동에만 전념하다 무려 5번이나 체포되고 3년 간 옥살이를 했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온 이경선 지사는 1947년 대정중에서 물리·화학 교사로 재직했다. 당시 이경선 지사는 여성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강연에 나서 수많은 인파를 몰고 다니면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훌륭한 연설가로 불렸다. 광복 후에 서울 출신 오영조(吳榮造)와 만혼(晩婚)했으며, 194612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부녀총동맹 중앙 집행위원회 산하 선전부에 참여했다. 1947년 제주에서 발생한 3·1절 발포사건으로 촉발된 4·3의 광풍 속에 묻지마 연행을 당한 그녀는 일본으로 밀항해 약국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지사의 노년은 북한에서 이어졌다고 하지만 사망년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보훈처에서 자체발굴조사를 거쳐 202131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 출생지가 경기도이기 때문에 경기북부보훈지청은 동년 726일 이경선 지사의 전수식을 거행했다. 이날 건국훈장 애족장은 이경선 지사를 대신해 남동생인 이경암씨(76)가 받았다.(공훈전자사료관, 제주항일인사실기, 뉴제주일보·헤드라인제주·제이누리 210728, )

작성 220619

 

특이하게도 유족이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서훈을 받았다. 이경선의 남동생 이경암은 아버지는 대정지역에서 주정공장을 운영해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지만 누나는 기득권을 버리고 항일운동에 전념했다“4·3의 회오리 속에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간 누나는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이북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밝혔다.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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