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9월28일 외할아버님의 유고소식을 접하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 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에 몸을 담았다. 그는 애국지사도 아니었고 고위공무원직을 지내신 분도 아니었으나, 경기도 안양시 근대사에서 기독신앙인과 의료인으로 남긴 자취는 자못 큰 것이었다. 만 94세로 결혼 81주년을 목전에 두고 만96세이신 외할머님을 홀로 남기시고 돌아가신 외할아버님에 대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교훈 되는 점이 있어 그의 일생을 재조명하여 보려한다.
나는 학교 갈 나이인 일곱 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의 손을 덜어주고, 손주를 키워보고 싶으셔서 자원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방학 때면 늘 외갓집에서 지냈었다. 그 곳에서 보고자란 일들은 후의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존함은 이형래 이며, 그는 1906년 2월12일 경기도 파장리의 광주 이씨 집성촌의 한 양반집 4남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3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그에게 남겨진 유산은 아주 빈약하였다. 그러한 생활조건 때문에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며 자랐다. 항렬이 높아 동갑내기 조카들이 많았는데 서당 등 일상 생활에서 그들과 선의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그를 자신의 처한 위치에서 더 큰사람으로 만드는 데 한 몫을 했다. 삼일운동이 나던 1919년 만 13살 되던 해 자신 보다 두 살 많은 경기도 남양 홍씨 가문의 홍갑숙 할머니와 결혼하였다. 만13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결혼 후 아내의 조언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시었고 보성고보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였다. 할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데도 독학으로 언문을 깨우치시고, 성경을 비롯한 여러 고전을 섭렵한 박식하신 분이었다.
1947년 외할아버지는 경기도 안양시 일 번지 안에 있는 전통기와집으로 이사와 삼성병원을개원하셨다. 그 건물은 안양읍사무소가 바로 옆에 새 건물을 지워 이사가기 전까지 사용하던 곳이었고, 할아버지가 이사오셔서는 가정집 외에 병원과 교회로도 쓰였다. 1992년까지 45년간을 사시다가 아파트로 이사가시면서 그 곳을 떠났는데, 안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와집이고 읍사무소였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안양문화원에서 구입하여 사적으로 영구보전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곳은 나를 비롯한 손주 5명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1950-60년대에는 안양에 병원이 두 세 개정도 밖에 없었고, 안양거리는 구시대 촬영 셋 정도로 작았던 때였다. 안양유원지나 인근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여러 기관의 촉탁의를 맡고 계셨던 할아버지병원으로 환자들이 실려왔다. 그 당시 안양에서 출산한 아이들의 30-40%는 할아버지가 손수 받으셨다. 병원에는 동네 유지들이 바둑을 두러오시곤 했다. 할아버지의 바둑은 영원한 7급이었으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해, 늘 신문에서 고수들의 복기를 연구하시는 분이었다.
1954년 할아버지 안방에서 시작한 안양제일교회는 점점 교인수가 늘어, 옆의 병원건물이층으로 옮겨서 예배를 보았다. 그 후 할아버지가 기증하신 현 위치의 텃밭에 새 성전을 지어 이사와 현재 교인 4천명이 모이는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교회로 성장했다. 나는 어렸을 때 주일마다 성가대대원들의 식사를 준비하시고, 귀한 선물이 들어오면 목회자 몫으로 챙기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시기 2년 전까지 만해도 새벽4시에 하는 새벽기도를 거의 한번도 거르신 적이 없으셨다, 할머니가 거동을 하셨던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노틀담의 곱추같이 완전히 90도로 꾸부러지신 할머니를 한 손에 잡으시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정히 걸으시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어렸을 때 모기장이 쳐있는 안방에서 두 분과 함께 잘 때면 간간한 귀뚜라미소리와 함께 두 분의 정다운 대화가 들리곤 했다.
할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풍족한 생활을 했었을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나, 두 분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다. 장지에서 어느 장로님이 기도 중 “10원 한 장 쓰시는 데 벌벌 떠셨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신...” 이라고 말씀하신 그 대로의 삶을 사셨다. 요즘은 환경문제 때문에 리사이클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됐지만, 두 분은 일찍이 생활 속에서 리사이클을 실천하셨다. 내가 그분들과 함께 한 지난 40여년 동안 한번도 가구를 사신 적이 없으셨고, 음료수는 언제나 끓인 수돗물 또는 산에서 몸소 가져온 약수물을 사용하셨다. 화장실에 놓여있는 비누는 늘 은박지가 한 면을 감싸고 있으며, 옆에 있는 변기 물통에는 빨간 벽돌 하나가 들어가 있고, 화장지는 얇은 일일달력을 1/4로 짤라 대신하였다. 할아버지 댁에는 골동품보다는 다음 사용을 기다리고 있는 고물들이 즐비하였다. 그렇게 절약하는 생활을 하시는 분이었지만, 교회에다가 건축헌금, 장학금, 교회대지, 교회묘지등 재산은 제일 먼저 아낌없이 내놓으시는 분이었다. 안양이 70년대에 개발붐을 타고 땅을 가진 사람들이 부를 누렸지만 살고있는 집과 병원 외에는 가진 부동산이 없으셨다. 땀흘려서 일한 노력의 대가 외에는 어느 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떡이나 반찬거리를 머리에 지고 팔러 다니시는 분들이 오시면 절대 값을 깍지 않고 사주시곤 했다. 일사후퇴 때 대전에 피난 가서 떡장사를 하면서 행상의 고달픔을 느끼셨다고 한다. 손자들이 모처럼 오면, 시장에 가서 닭을 잡아오시지만, 평소 할아버지 밥상엔 고기구경 하기가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녀들을 훌륭히 키우신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점은 할아버지와 함께 산 나도 의문 나게 하는 점이다. 큰외삼촌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장이식수술을 하셨고 성모병원장을 지내신 이용각박사이고 작은외삼촌은 우리나라 정보통신분야의 리더중 한 사람으로 현재 한국통신 사장인 이용경박사이다. 구시대 사람들인 두 분이 자녀들에게 과학적 육아 방법을 적용했을 리 만무이다. 내가 보기엔 두 분의 생활자체가 교육의 현장이었다. 흐트러지지 않는 생활을 하시는 두 분의 말씀에는 늘 힘이 실려있었고 자손들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랐다. 존경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자식들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린 나에게도 공부하라는 말씀보다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워낙 대쪽같은 성격을 갖고 계셔서, 직설적인 발언 때문에 목사님이나 다른 장로님들이 마음 고생하셨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지나친 검소한 생활태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쓰지 않고 모은 재산을 하나님사업에 바치는, 쓸 때 쓸 줄을 아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여인과 81년을 살고, 한 교회를 46년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섬긴, 주어진 것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시는 분이었다. 일세기를 사시는 동안 우리의 믿음생활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였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변화를 쫓아갔으나, 그러지 않고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증인이 되셨다.
2000년 10월 경
박중련(이형래 장로의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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