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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0]마을을 지킨 나무, 나무를 지킨 사람 김수선

안양똑딱이 2024. 1. 25. 10:41

 

안양시민신문 2008. 3. 20. 18:41

김수선 안양공예가 회장

 

마을을 지킨 나무, 나무를 지킨 사람

마을 지키던 정자나무에 12년 인생 바쳐

그 나무 때문에 안양이 고향 됐지요

 

250년 동안 한 마을을 지켰던 느티나무가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 나무는 뙤약볕을 피해 쉴 수 있는 정자였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는 회의공간이었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소원을 빌 수 있는 수호신이었다. 마을의 어른들은 “6?25전쟁 때도 느티나무가 있어 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도시화의 물결로 마을 앞에 대로가 뚫리면서 이 나무가 서있을 공간은 점점 좁아졌다. 나무는 쭉쭉 뻗어 나가야 할 산업도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 가게 간판을 가리는 애물 단지였으며, 나무에서 놀던 아이들이 떨어져 다칠까 우려되는 위험물이었다. 한때 마을 사람 모두가 사랑했던 이 느티나무는 사람들의 외면 속에 점점 말라죽어갔다. 한동안 길가의 고목나무로 방치되던 이 나무는 어느 날인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12년이 흘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잊혀져갔다.

 

위의 이야기는 호계2동 현재의 산업도로 육교 인근에 있던 느티나무와 관련한 실화다. 안양에서는 가장 오래된 나무였고, 지금도 호계2동 곳곳에는 느티나무길’, ‘느티나무 정류장이란 명칭이 남아있다. 말라 죽어 버려진 그 나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느티나무는 장장 12년에 걸쳐 한 목공예 작가에 의해 32개의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중이다. 그 마무리는 올해 여름께로 임박해 있다.

 

그 화제의 주인공은 안양공예가 회장이자 선열린 조각교실 원장인 김수선 작가(54). “나무가 그냥 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동네 어르신들이 저에게 나무를 맡기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를 줄 테니 너도 여기 살아야 한다라는 말씀이 그것이었죠.” 목공예 조각가인 김수선 작가의 공방은 느티나무가 있던 원래 자리에서 채 10여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15평 남짓한 지하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아름이 넘는 나무둥치가 사람을 반긴다. 32개의 작품 중 마지막 미완성 작품이다. 공방에는 이미 완성된 작품들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작품은 탁자, 초받침대, 생활 소품 등 다양하다. 언뜻 보기에도 최대한 나무의 원래 모습을 살려내려고 한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상품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12년이나 작업하지 않았겠죠. 느티나무 그 모습 그대로를 작품으로 연결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는 하나의 나무가 어떻게 여러 개의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지를 보여줄 수 있는 3D영상도 계획 중이다.

 

김수선 작가가 느티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5년 전 안양에 작품연구실을 설립하면서 부터다. 서울 왕십리가 고향인 그는 호계2동에 오면서부터 진짜 고향에 온 것 같은 향수를 느꼈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아파트가 들어서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시골동네 같은 정겨움도 있었고, 저 또한 어르신들이 아버님처럼 느껴져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고목나무를 본 순간부터 그는 작품으로 만들 욕심이 났다고 했다. 나무의 수령이나 건조상태, 형태 모두 목공예 작가라면 모두가 탐을 낼 최상의 나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가지겠다고 선뜻 나설 수도 없었던 것이 나무는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공동 소유물이었다. 96년의 어느 날 동네 노인들이 김 작가를 만나 나무를 줄 테니 좋은 작품을 만들라고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고 정착하라고 당부했다. “사실 나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곳에 살아야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느티나무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일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분이 됐을 정도니까요.” 마을을 지키던 느티나무는 968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의 제를 받고 그 죽은 몸까지 내어주게 된다. “가지하나 뿌리하나까지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250년 동안 마을을 지키던 그 나무자체에 소중한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느티나무는 그의 가족들에게도 큰 의미를 남겼다. 서양화가 전공인 큰 딸은 예전에 마을을 지키던 나무를 직접 그려 출품하기도 했다. 작가의 앞으로의 꿈은 마지막 작품이 완성될 때 전시회를 갖는 것이다. 한평생을 다하고도 작품으로서 나무가 다시 마을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12년의 고생뿐이었습니다. 다시 나무가 그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거죠.”

 

손병학 기자

 

 

마을을 지킨 나무, 나무를 지킨 사람


마을 지키던 정자나무에 12년 인생 바쳐
“그 나무 때문에 안양이 고향 됐지요”


김수선 안양공예가 회장





250년 동안 한 마을을 지켰던 느티나무가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 나무는 뙤약볕을 피해 쉴 수 있는 정자였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는 회의공간이었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소원을 빌 수 있는 수호신이었다. 마을의 어른들은 “6?25전쟁 때도 느티나무가 있어 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90년대 도시화의 물결로 마을 앞에 대로가 뚫리면서 이 나무가 서있을 공간은 점점 좁아졌다. 나무는 쭉쭉 뻗어 나가야 할 산업도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 가게 간판을 가리는 애물 단지였으며, 나무에서 놀던 아이들이 떨어져 다칠까 우려되는 위험물이었다. 한때 마을 사람 모두가 사랑했던 이 느티나무는 사람들의 외면 속에 점점 말라죽어갔다. 한동안 길가의 고목나무로 방치되던 이 나무는 어느 날인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12년이 흘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잊혀져갔다.


위의 이야기는 호계2동 현재의 산업도로 육교 인근에 있던 느티나무와 관련한 실화다. 안양에서는 가장 오래된 나무였고, 지금도 호계2동 곳곳에는 ‘느티나무길’, ‘느티나무 정류장’이란 명칭이 남아있다. 말라 죽어 버려진 그 나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느티나무는 장장 12년에 걸쳐 한 목공예 작가에 의해 32개의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중이다. 그 마무리는 올해 여름께로 임박해 있다.


그 화제의 주인공은 안양공예가 회장이자 선열린 조각교실 원장인 김수선 작가(54)다. “나무가 그냥 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동네 어르신들이 저에게 나무를 맡기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를 줄 테니 너도 여기 살아야 한다’라는 말씀이 그것이었죠.” 목공예 조각가인 김수선 작가의 공방은 느티나무가 있던 원래 자리에서 채 10여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15평 남짓한 지하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아름이 넘는 나무둥치가 사람을 반긴다. 32개의 작품 중 마지막 미완성 작품이다. 공방에는 이미 완성된 작품들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작품은 탁자, 초받침대, 생활 소품 등 다양하다. 언뜻 보기에도 최대한 나무의 원래 모습을 살려내려고 한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상품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12년이나 작업하지 않았겠죠. 느티나무 그 모습 그대로를 작품으로 연결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는 하나의 나무가 어떻게 여러 개의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지를 보여줄 수 있는 3D영상도 계획 중이다.


김수선 작가가 느티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5년 전 안양에 작품연구실을 설립하면서 부터다. 서울 왕십리가 고향인 그는 호계2동에 오면서부터 진짜 고향에 온 것 같은 향수를 느꼈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아파트가 들어서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시골동네 같은 정겨움도 있었고, 저 또한 어르신들이 아버님처럼 느껴져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고목나무를 본 순간부터 그는 작품으로 만들 욕심이 났다고 했다. 나무의 수령이나 건조상태, 형태 모두 목공예 작가라면 모두가 탐을 낼 최상의 나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가지겠다고 선뜻 나설 수도 없었던 것이 나무는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공동 소유물이었다. 96년의 어느 날 동네 노인들이 김 작가를 만나 ‘나무를 줄 테니 좋은 작품을 만들라’고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고 정착하라’고 당부했다. “사실 나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곳에 살아야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느티나무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일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분이 됐을 정도니까요.” 마을을 지키던 느티나무는 96년 8월17일 김 작가와 마을 어르신들의 제를 받고 그 죽은 몸까지 내어주게 된다. “가지하나 뿌리하나까지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250년 동안 마을을 지키던 그 나무자체에 소중한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느티나무는 그의 가족들에게도 큰 의미를 남겼다. 서양화가 전공인 큰 딸은 예전에 마을을 지키던 나무를 직접 그려 출품하기도 했다. 작가의 앞으로의 꿈은 마지막 작품이 완성될 때 전시회를 갖는 것이다. 한평생을 다하고도 작품으로서 나무가 다시 마을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12년의 고생뿐이었습니다. 다시 나무가 그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거죠.”


손병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