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규]‘안양 토박이론’
[2006/05/26]시인
[2006/05/26]시인
‘안양 토박이론’ ②
‘본토박이’의 줄임말인 ‘토박이’라는 말에서는 한 곳의 땅(土)에 뿌리를 박고 살아 오는 식물의 모습이 연상된다. 같은 의미의 ‘토착(土着)’이라는 말도 그러하다. ‘붙박이’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속언도 유사한 용례이다. 토박이들에게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뿌리는 소중한 것이다. 타향에 사는 사람도 마음의 뿌리는 언제나 고향에 묻고 있다.
원주민과 반대되는 이주민, 또는 본향(本鄕)과 상대되는 타향 사람들이 심리적인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 본연의 감정이라면, 토박이들이 그 대(代)가 오래 됐을수록 향토에 애착심을 지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터이다. 그래서 애향심은 모성애에 비유되곤 한다. 어머니와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토박이들에 대한 이주민들의 불만이 언제부터 표출되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산업화 이후 중·소형 도시들이 개발되면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부터가 아닐까. 그리고 지방자치제와 더불어 각종 선거에서 토박이들의 주인의식이 기득권 문제로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가열된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안양에서도 토박이가 ‘몇 %’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왔다. 그러다가 이번 5·31 지방선거를 맞아 ‘3%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대두됐다. 얼마되지 않는 토박이들이 ‘텃세’를 부리고, 시정이나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인간 본연의 과민한 피해의식이 엿보인다. 또한 정치적 발언은 언제나 사실보다 강도가 높게 마련이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시대에, 지난번의 하인스 워드의 예처럼 순혈주의(純血主義)를 내세울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고장에서건 토박이의 감소는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로되, 정체성의 확립·보존이나 정신·문화적 전통성에서는 마이너스 요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토박이이기 때문에 이주민들이 실생활에서 어떤 불이익을 받고 있는지를 체감하지 못한 반면, 토박이들이 이주민들 때문에 무슨 일을 그르쳤다는 사례를 알지도 못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 출신이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일 터. 어느 분야이건 그 일을 누구보다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능력 있는 사람이 토박이라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반드시 비판받아야만 할까. 문제는 그 자존심이 객관적으로 수용될 만한 함량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양 토박이’임을 빙자해 이권에 개입하거나, 정치적 편향성을 조성하거나, 공연한 토박이 배척론을 촉발케 하는 부류가 있다면 마땅히 지탄받아야 한다. 안양을 빛내기는커녕 오히려 오명을 초래하는 장본인들을 어찌 안양사람이라 할 것인가.
‘안양사람’이란 안양 출생 여부를 떠나, 안양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안양 발전에 기여한 타향 사람은 더 기려야 한다. 각종 향우회가 자신들의 고향만을 말할 때, 지역발전의 구심력은 분산되게 마련이다. 그러하니 토박이 문제는 토종(土種)의 순정으로 치부하고, 지역사랑의 순수한 경쟁을 벌이도록 하자.
어느 지역·조직에건 예외적인 존재가 있다. 그를 앞세워 본질을 폄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고향이란 ‘영혼의 모태’로서, 거기에 ‘뼈’가 묻힐 사람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운명을 불사뤄야 할 것이다.
‘안양 토박이론’ ①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부일보에선 단체장 예비후보들의 ‘파워 인터뷰’ 기사를 게재해 오고 있다. 지난 5월12일 자에는 안양시장 예비후보들의 인터뷰 내용이 실렸다.
그런데 그 첫번째 공통질문에 대한 후보들의 답변을 읽고 착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이 글 역시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첫번째 질문은 이러하다. “특정지역 출신 인맥이 시정은 물론 지역 정치권을 좌지우지하고 계층간 반목과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같은 지적을 어떻게 보는가”. 여기서 일컫는 ‘특정지역’이란 곧 ‘안양’을 지칭하는 것인 바, 각 후보들의 답변 요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중부일보 게재 순)
이승민 후보 : 안양지역은 텃세가 심하다. 안양 토박이 출신 시장의 장기집권으로 그 주위에 이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원인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바꿔야 한다.
신중대 후보 : 잘못 알려진 것이다. 오히려 그같은 상황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천과정에서 고통을 당했다. 청탁과 압력에 불응했다. 지역의 여론 메이커들을 의식하지 않겠다.
김규봉 후보 : 특정지역 출신 인사들의 파당적 행동과 과도한 이기심으로 전직 시장이 구속되고, 후임 시장마저 정파적 연고주의와 지역이기주의에 휘말려 신·구도시 간의 반목·갈등을 심화시켰다.
강현만 후보 : 안양에도 지역의 원로와 유지 노릇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특정인들의 모임이 지역의 근본을 흔드는 행위마저 하려고 한다. 토박이는 3%에 불과하다. 지역토호세력들의 막가파식, 선심성 지역정치 개입을 근절해야 한다.
이 답변들에 의하면 안양은 ‘텃세·지역이기주의·토박이·지역토호세력들의 막가파식’ 압력과 청탁이 창궐하는 도시로 비춰지고 있다. 타향 사람들은 살지 못할 곳이다. 정말 그런가.
‘텃세’란 어느 곳이건 타향인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인간정서가 아닐까. 특히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보다 피해의식의 체감도가 높아지리라. 그게 어찌 안양만의 현상이랴. 예컨대 인근 S시의 경우, 각 당의 시장 후보가 모두 ‘토박이’일지라도 그에 대한 비판은 없다.
토박이가 3%에 불과하다는 말도 그렇다. 대(代)를 잇는 집안이 어느 도시인들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보다는 타향 출신의 2세들도 모두 안양이 고향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거기에다가 고향은 ‘어머니’이기에 토박이들이 생모(生母)의 모성애로 자기 고향을 더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순수성이다.
정작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집중포화를 받는 신중대 후보의 답변이다. 그는 각 후보들이 신랄하게 비판한 토박이들의 시정 개입 사실은 인정하고, 자신은 그 압력을 물리쳤노라고 강변한다. 지역토호세력은 있되 ‘좌지우지’는 당하지 않았다는 것, 환언하면 각 후보들의 서론은 맞고 결론만 틀렸다는 말이 된다.
나는 신중대 후보가 말하는 ‘청탁과 압력’의 내용이나 ‘여론메이커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가 ‘내 판단의 기준’으로 독야청청하다는 소신이야 긍정하지만, 나 역시 내 판단의 기준으로 토박이들을 청탁과 압력의 주체로 공언한 것에는 의아함을 넘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내 자신이 그 몹쓸 토박이여서 그럴까.
‘본토박이’의 줄임말인 ‘토박이’라는 말에서는 한 곳의 땅(土)에 뿌리를 박고 살아 오는 식물의 모습이 연상된다. 같은 의미의 ‘토착(土着)’이라는 말도 그러하다. ‘붙박이’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속언도 유사한 용례이다. 토박이들에게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뿌리는 소중한 것이다. 타향에 사는 사람도 마음의 뿌리는 언제나 고향에 묻고 있다.
원주민과 반대되는 이주민, 또는 본향(本鄕)과 상대되는 타향 사람들이 심리적인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 본연의 감정이라면, 토박이들이 그 대(代)가 오래 됐을수록 향토에 애착심을 지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터이다. 그래서 애향심은 모성애에 비유되곤 한다. 어머니와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토박이들에 대한 이주민들의 불만이 언제부터 표출되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산업화 이후 중·소형 도시들이 개발되면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부터가 아닐까. 그리고 지방자치제와 더불어 각종 선거에서 토박이들의 주인의식이 기득권 문제로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가열된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안양에서도 토박이가 ‘몇 %’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왔다. 그러다가 이번 5·31 지방선거를 맞아 ‘3%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대두됐다. 얼마되지 않는 토박이들이 ‘텃세’를 부리고, 시정이나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인간 본연의 과민한 피해의식이 엿보인다. 또한 정치적 발언은 언제나 사실보다 강도가 높게 마련이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시대에, 지난번의 하인스 워드의 예처럼 순혈주의(純血主義)를 내세울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고장에서건 토박이의 감소는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로되, 정체성의 확립·보존이나 정신·문화적 전통성에서는 마이너스 요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토박이이기 때문에 이주민들이 실생활에서 어떤 불이익을 받고 있는지를 체감하지 못한 반면, 토박이들이 이주민들 때문에 무슨 일을 그르쳤다는 사례를 알지도 못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 출신이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일 터. 어느 분야이건 그 일을 누구보다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능력 있는 사람이 토박이라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반드시 비판받아야만 할까. 문제는 그 자존심이 객관적으로 수용될 만한 함량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양 토박이’임을 빙자해 이권에 개입하거나, 정치적 편향성을 조성하거나, 공연한 토박이 배척론을 촉발케 하는 부류가 있다면 마땅히 지탄받아야 한다. 안양을 빛내기는커녕 오히려 오명을 초래하는 장본인들을 어찌 안양사람이라 할 것인가.
‘안양사람’이란 안양 출생 여부를 떠나, 안양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안양 발전에 기여한 타향 사람은 더 기려야 한다. 각종 향우회가 자신들의 고향만을 말할 때, 지역발전의 구심력은 분산되게 마련이다. 그러하니 토박이 문제는 토종(土種)의 순정으로 치부하고, 지역사랑의 순수한 경쟁을 벌이도록 하자.
어느 지역·조직에건 예외적인 존재가 있다. 그를 앞세워 본질을 폄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고향이란 ‘영혼의 모태’로서, 거기에 ‘뼈’가 묻힐 사람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운명을 불사뤄야 할 것이다.
‘안양 토박이론’ ①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부일보에선 단체장 예비후보들의 ‘파워 인터뷰’ 기사를 게재해 오고 있다. 지난 5월12일 자에는 안양시장 예비후보들의 인터뷰 내용이 실렸다.
그런데 그 첫번째 공통질문에 대한 후보들의 답변을 읽고 착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이 글 역시 사람에 따라 반응이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첫번째 질문은 이러하다. “특정지역 출신 인맥이 시정은 물론 지역 정치권을 좌지우지하고 계층간 반목과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같은 지적을 어떻게 보는가”. 여기서 일컫는 ‘특정지역’이란 곧 ‘안양’을 지칭하는 것인 바, 각 후보들의 답변 요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중부일보 게재 순)
이승민 후보 : 안양지역은 텃세가 심하다. 안양 토박이 출신 시장의 장기집권으로 그 주위에 이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원인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바꿔야 한다.
신중대 후보 : 잘못 알려진 것이다. 오히려 그같은 상황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천과정에서 고통을 당했다. 청탁과 압력에 불응했다. 지역의 여론 메이커들을 의식하지 않겠다.
김규봉 후보 : 특정지역 출신 인사들의 파당적 행동과 과도한 이기심으로 전직 시장이 구속되고, 후임 시장마저 정파적 연고주의와 지역이기주의에 휘말려 신·구도시 간의 반목·갈등을 심화시켰다.
강현만 후보 : 안양에도 지역의 원로와 유지 노릇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특정인들의 모임이 지역의 근본을 흔드는 행위마저 하려고 한다. 토박이는 3%에 불과하다. 지역토호세력들의 막가파식, 선심성 지역정치 개입을 근절해야 한다.
이 답변들에 의하면 안양은 ‘텃세·지역이기주의·토박이·지역토호세력들의 막가파식’ 압력과 청탁이 창궐하는 도시로 비춰지고 있다. 타향 사람들은 살지 못할 곳이다. 정말 그런가.
‘텃세’란 어느 곳이건 타향인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인간정서가 아닐까. 특히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보다 피해의식의 체감도가 높아지리라. 그게 어찌 안양만의 현상이랴. 예컨대 인근 S시의 경우, 각 당의 시장 후보가 모두 ‘토박이’일지라도 그에 대한 비판은 없다.
토박이가 3%에 불과하다는 말도 그렇다. 대(代)를 잇는 집안이 어느 도시인들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보다는 타향 출신의 2세들도 모두 안양이 고향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거기에다가 고향은 ‘어머니’이기에 토박이들이 생모(生母)의 모성애로 자기 고향을 더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순수성이다.
정작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집중포화를 받는 신중대 후보의 답변이다. 그는 각 후보들이 신랄하게 비판한 토박이들의 시정 개입 사실은 인정하고, 자신은 그 압력을 물리쳤노라고 강변한다. 지역토호세력은 있되 ‘좌지우지’는 당하지 않았다는 것, 환언하면 각 후보들의 서론은 맞고 결론만 틀렸다는 말이 된다.
나는 신중대 후보가 말하는 ‘청탁과 압력’의 내용이나 ‘여론메이커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가 ‘내 판단의 기준’으로 독야청청하다는 소신이야 긍정하지만, 나 역시 내 판단의 기준으로 토박이들을 청탁과 압력의 주체로 공언한 것에는 의아함을 넘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내 자신이 그 몹쓸 토박이여서 그럴까.
2006-05-26 16: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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