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01]송경호 민예총지부장
문화만큼 모호한 낱말은 따로 없다. 어느 단어에든 갖다 붙이면 제법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일테면 안양의 단 하나 뿐인 범계역 일대 문화의 거리가 그렇다.
제법 널찍한 공간에 분수와 벤치, 몇가지 조형물들이 이 지역 문화의 거리를 이루는 주요 요소의 전부다. 물론 그 거리 좌우에는 갖가지 음식업소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그래도 그 거리는 안양시가 인증한 문화의 거리다. 아울러 그게 무슨 문화의 거리냐고 반박할만한 근거도 마땅찮다.
그런대로 주말이면 허다한 사람들이 그 거리를 찾고, 이따금 이러저러한 공연과 집회, 행사들이 펼쳐진다. 벤치와 분수 따위가 문화의 거리를 이루는 하드웨어적 요소라면, 그 거리를 메꾸고, 그 거리에서 펼쳐지는 온갖 움직임들은 그 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소프트웨어 요소들인 셈이다.
요즘 만안구의 벽산로 일대를 문화의 거리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헌데, 이 거리는 범계역 문화의 거리에 견줘볼 때 너무나도 볼품없는 거리다. 거리는 차도가 중심이며, 인도는 좁다. 그나마 한 쪽은 노점상이 차지하고 있으니 그럴싸한 조형물 하나 세울 곳도 마땅찮다.
그런 거리에 문화의 거리를 만들자고 외치고 있으니, 얼핏 터무니없는 노릇으로 보일 것이다. 적어도 범계역 정도는 돼야만 ‘문화’라는 낱말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눈에는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 보일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화라는 낱말이 드넓은 확장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문화의 거리 또한 정형화된 개념이어서는 안된다. 쾌적한 공간과 그럴싸한 조형물만이 필수 요소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록 협소한데다 어수선한 공간일지언정 그 공간에 독창적 문화 요소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채워나가고, 그 속의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창조적인 문화적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향유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또다른 문화의 거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벽산로 일대에서 그 잠재적 가능성을 본다. 중앙성당과 중앙시장, 중앙교회 등이 말해주듯 일찍이 안양의 중앙이었던 이 곳. 시장과 복지관, 성당과 교회 등이 곳곳에 포진한 여기야말로 그 곳을 오가는 숱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보호되고, 최대한 문화적 혜택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지난 몇 년간의 세월 속에서 어느새 이 거리의 명물이 돼버린 노점상들과 매일 전진상복지관을 찾는 어르신들, 성당과 교회의 수많은 어린이와 여성 신도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거닐 수 있는 거리여야 한다.
아울러 이들이 서로 한데 어우러져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도와가는, 인간미 물씬 풍기는 도시 속의 생활문화를 만들어 진정한 일상의 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시원스레 물줄기를 뿜어대는 분수나, 값비싸기는 하되 이상야릇한 조형물 따위는 사실 없어도 그만이다. 그저 성당 담장에는 어린 아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그려댄 그림 몇 점이 걸어두고, 나무 그늘 아래 적당한 공간에서 어르신들의 풍물가락이 울려나오면, 이미 벽산로는 그 만으로도 문화의 거리의 필요충분 조건을 충족한 셈이라고 본다.
굳이 욕심을 더 부려본다면, 거리 이곳저곳을 기웃대다 피곤해진 다리를 쉴 수 있는 벤치 몇 개 놓여있고, 무명 가수의 어설픈 공연이 펼쳐질 수 있는 한두 평 무대라도 마련될 수 있다면 하드웨어적 요소는 이미 그 자체로 완성태다.
거듭 강조하건데, 우리는 문화의 거리를 특정 형식의 틀 속에 가둬두고 임의대로 재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문화는 그렇게 외부로부터 재단되거나 관리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벽산로를 벽산로답게, 벽산로를 벽산로다운 문화의 거리로 만드는 것은 결국 벽산로에서 아침을 맞거나 벽산로에 잇대어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해묵은 이 말을 안양시를 향해 다시 들려주고 싶다. 벽산로를 문화의 거리로 지정하고 지원하되, 제발 임의대로 재단하거나 간섭하지는 말아달라는 이야기 말이다./ 송경호[(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안양군포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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