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의 서정직 군포초등학교 동문회 22대회장 인터뷰
지역발전 중심축 역할 수행..시의원 절반이 군포초교 동문
군포시 인구 28만명 가운데 3% 미만만이 군포시에서 태어난 원주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3%가 군포시 전체에 끼치는 영향력은 나머지 인구 97%에 못지 않은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원주민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애향심과 함께 모두가 군포초등학교 동문들이라는 구심점이 만들어 낸 자긍심과 단결력이 있기 때문이다.
15년 전 까지만 해도 불과 인구 4~5 만명의 군포읍이란 작은 마을이 산본 신도시라는 배경을 갖게 되면서 28만 명의 군포시로 급성장한 그 과정을 우리는 항상 재조명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군포시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매개체인 군포초등학교를 반드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학교의 22대 동문회장인 서정직 회장( 택시회사 공정기업 대표) 을 만나 86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군포초등학교가 지금까지 군포시에 어느정도의 역사적 의미와 영향력을 끼쳐 왔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김인수 논설위원
뿌리 깊은 역사·전통 명문학교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법입니다. 군포시민이라면 누구나 우리만의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라도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28만명이 살고 있는 우리 군포시는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요. 군포초등학교의 역사는 곧 군포시 역사의 큰 줄기와 맥을 이어 온 거대한 나무의 뿌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군포초등학교는 대한민국 근대 역사 속에서 큰 공헌과 흔적을 남긴 인재들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터전이기도 합니다.”
군포초등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이 현재 군포시에 끼치고 있는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전 초대 민선 시장이었던 조원극, 전 경기도의회 의장 한근이, 전 군포시시의회 의장 김진용, 권원혁, 노재영, 현 상공회의소 회장 유병직, 문화원장 송윤석, 예총회장 곽상원 등 군포지역 사회 경제 문화 예술 행정 시민단체 등의 단체장, 또는 핵심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군포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한 모든 시의원들의 절반 이상이 군포초등학교 동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 독자들은 이들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재형 전 국회의장, 이재준 대림산업회장, 이성호 전 해군 참모총장, 한봉수 전 상공부장관, 송요택 원자력 공학박사, 이필우 전 서울 경찰청장 등 전국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중요 인물들을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다.
이렇게 지난 10여년 이내 신도시로 새로이 유입된 군포시민들이 알았든 몰랐든 군포초등학교의 동문들은 이미 우리 군포시라는 거대한 바퀴를 굴리고 있는 중심축의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학교는 ‘마음의 등대’
“제가 입학했던 1961년 초에는 군포초등학교 앞 신작로 길을 사이에 두고 문방구와 이발소 두 집만 덩그러니 있었을 뿐 주변 모두가 논과 밭으로 먼지가 펄펄 날리던 시골길이었어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경부선 군포역 주변과 군포 구 사거리에는 재래시장이 열렸습니다.
수리산에서 내려온 개천인 맑은 내, 백운산에서 내려 온 흐린 내에서 고기를 잡고 멱을 감던 시절을 우리들은 잊지 못합니다. 운동회가 있는 날은 축제 분위기로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지요. 저는 산본리에서 매일 한시간 씩 걸어서 학교로 등교 했습니다.
그러나 지각이나 결석 한 번 없었어요. 안양 중학에 입학한 이 후에도 그 곳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이렇게 순수했던 어린시절의 학교 동창들은 평생 우리 마음의 여유와 추억이 되어져 이러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부자인 것입니다.”
군포초등학교가 최초로 설립된 것은 일제 식민지 초기인 1919년에 보통학교로 인가 받은 것인데 이것은 이웃한 안양시에 최초로 설립되어진 만안초등학교 보다도 10년이나 빠른 것이었다고 한다.
1945년 개교 25주년을 맞이하던 해 광복의 기쁨과 함께 최초로 한국인 교장선생님을 맞이하는 기쁨을 맞이했다. 1970년 이 후 매년 300명 씩 배출되던 학생수가 80년대에 이르러서는 600명이 넘는 숫자에 이르러 지난 2004년에 이르러서는 2만 543명이라는 동문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동문회관 건립 우리의 숙원사업
“저희 군포초등학교 동문회가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83년 3월이었습니다. 이 후 매해 3월이 되면 총회를 통해 회장과 임원을 선출 합니다. 저는 46회 졸업생으로서 22대 동문회 회장이 된 것입니다. 저희 동문회의 가장 큰 자랑은 전국에서 초등학교 동문회로서는 처음으로 사무직원을 둔 약 50평 규모의 동문회 사무실을 당동 군포역 앞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저희가 매해 열고 있는 체육대회에는 한국 전역 뿐 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모여든 동문들로 약2,000여명이 모이는 거대한 축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말과 함께 한 번 모교는 영원한 모교이기에 군포초등학교는 우리 동문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것입니다. 앞으로 저희는 동문회의 숙원 사업의 하나로 동문회관 건립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이 건물이 완성된다면 초등학교 동문회로서는 최초의 회관 건립이 될 것입니다.”
서정직 회장은 모든 동문회원들이 군포초등학교 동문회의 발전이 군포지역 사회 발전과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에 공헌한다는 그 목표는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문 상호간의 친목과 협력, 모교발전에 기여하고 후배들의 학업과 사회진출을 돕는 동문회로서의 역할 못지않게 지역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역발전 중심축 역할 수행..시의원 절반이 군포초교 동문
군포시 인구 28만명 가운데 3% 미만만이 군포시에서 태어난 원주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3%가 군포시 전체에 끼치는 영향력은 나머지 인구 97%에 못지 않은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원주민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애향심과 함께 모두가 군포초등학교 동문들이라는 구심점이 만들어 낸 자긍심과 단결력이 있기 때문이다.
15년 전 까지만 해도 불과 인구 4~5 만명의 군포읍이란 작은 마을이 산본 신도시라는 배경을 갖게 되면서 28만 명의 군포시로 급성장한 그 과정을 우리는 항상 재조명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군포시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매개체인 군포초등학교를 반드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학교의 22대 동문회장인 서정직 회장( 택시회사 공정기업 대표) 을 만나 86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군포초등학교가 지금까지 군포시에 어느정도의 역사적 의미와 영향력을 끼쳐 왔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김인수 논설위원
뿌리 깊은 역사·전통 명문학교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법입니다. 군포시민이라면 누구나 우리만의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라도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28만명이 살고 있는 우리 군포시는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요. 군포초등학교의 역사는 곧 군포시 역사의 큰 줄기와 맥을 이어 온 거대한 나무의 뿌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군포초등학교는 대한민국 근대 역사 속에서 큰 공헌과 흔적을 남긴 인재들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터전이기도 합니다.”
군포초등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이 현재 군포시에 끼치고 있는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전 초대 민선 시장이었던 조원극, 전 경기도의회 의장 한근이, 전 군포시시의회 의장 김진용, 권원혁, 노재영, 현 상공회의소 회장 유병직, 문화원장 송윤석, 예총회장 곽상원 등 군포지역 사회 경제 문화 예술 행정 시민단체 등의 단체장, 또는 핵심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군포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한 모든 시의원들의 절반 이상이 군포초등학교 동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 독자들은 이들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재형 전 국회의장, 이재준 대림산업회장, 이성호 전 해군 참모총장, 한봉수 전 상공부장관, 송요택 원자력 공학박사, 이필우 전 서울 경찰청장 등 전국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중요 인물들을 배출한 학교이기도 하다.
이렇게 지난 10여년 이내 신도시로 새로이 유입된 군포시민들이 알았든 몰랐든 군포초등학교의 동문들은 이미 우리 군포시라는 거대한 바퀴를 굴리고 있는 중심축의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학교는 ‘마음의 등대’
“제가 입학했던 1961년 초에는 군포초등학교 앞 신작로 길을 사이에 두고 문방구와 이발소 두 집만 덩그러니 있었을 뿐 주변 모두가 논과 밭으로 먼지가 펄펄 날리던 시골길이었어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경부선 군포역 주변과 군포 구 사거리에는 재래시장이 열렸습니다.
수리산에서 내려온 개천인 맑은 내, 백운산에서 내려 온 흐린 내에서 고기를 잡고 멱을 감던 시절을 우리들은 잊지 못합니다. 운동회가 있는 날은 축제 분위기로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지요. 저는 산본리에서 매일 한시간 씩 걸어서 학교로 등교 했습니다.
그러나 지각이나 결석 한 번 없었어요. 안양 중학에 입학한 이 후에도 그 곳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이렇게 순수했던 어린시절의 학교 동창들은 평생 우리 마음의 여유와 추억이 되어져 이러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부자인 것입니다.”
군포초등학교가 최초로 설립된 것은 일제 식민지 초기인 1919년에 보통학교로 인가 받은 것인데 이것은 이웃한 안양시에 최초로 설립되어진 만안초등학교 보다도 10년이나 빠른 것이었다고 한다.
1945년 개교 25주년을 맞이하던 해 광복의 기쁨과 함께 최초로 한국인 교장선생님을 맞이하는 기쁨을 맞이했다. 1970년 이 후 매년 300명 씩 배출되던 학생수가 80년대에 이르러서는 600명이 넘는 숫자에 이르러 지난 2004년에 이르러서는 2만 543명이라는 동문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동문회관 건립 우리의 숙원사업
“저희 군포초등학교 동문회가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83년 3월이었습니다. 이 후 매해 3월이 되면 총회를 통해 회장과 임원을 선출 합니다. 저는 46회 졸업생으로서 22대 동문회 회장이 된 것입니다. 저희 동문회의 가장 큰 자랑은 전국에서 초등학교 동문회로서는 처음으로 사무직원을 둔 약 50평 규모의 동문회 사무실을 당동 군포역 앞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저희가 매해 열고 있는 체육대회에는 한국 전역 뿐 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모여든 동문들로 약2,000여명이 모이는 거대한 축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말과 함께 한 번 모교는 영원한 모교이기에 군포초등학교는 우리 동문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것입니다. 앞으로 저희는 동문회의 숙원 사업의 하나로 동문회관 건립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이 건물이 완성된다면 초등학교 동문회로서는 최초의 회관 건립이 될 것입니다.”
서정직 회장은 모든 동문회원들이 군포초등학교 동문회의 발전이 군포지역 사회 발전과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에 공헌한다는 그 목표는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문 상호간의 친목과 협력, 모교발전에 기여하고 후배들의 학업과 사회진출을 돕는 동문회로서의 역할 못지않게 지역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005-12-03 02: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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