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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길, 그곳으로 가다·30 제주로-국도 1번의 모태

안양똑딱이 2016. 6. 13. 16:35
[기사]길, 그곳으로 가다· 제주로-국도 1번의 모태

[경인일보]

 

30. 제주로 >1< -국도 1번의 모태

 조선후기 6대로(大路) 가운데 서울에서 제주까지 잇는 서부의 간선도로가 '제주로'이다. 이 길은 해남에서 바닷길을 통해 제주까지 닿았으므로 육지부의 종착점 지명을 따 '해남로'라고도 하고, 동래로의 별칭이 영남대로이듯 이 길은 '호남대로'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제주로는 경기도에서 과천~수원~진위~평택 등을 경유하며, 영화역·장족역·동화역·청호역·가천역 등이 본 도로를 관리했다. 제주로는 문헌에 따라 통영로의 분기로로 취급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수원로와 더불어 1번 국도의 모태가 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도이다. 1번 국도는 일제시기에 신작로로 정비된 제주로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으나,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노선의 수정이 가해지고 주변에 새로운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지금의 1번 국도는 원 제주로와 사뭇 다른 노선을 취한다. 원 제주로 노선은 1970년대까지 당시의 지형도에 잘 나타난다. 경기도내 제주로 노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도(京都)~동작진(洞雀津, 12리)~승방평(僧房坪, 4리)~남태령(南太嶺, 7리)~과천(果川, 7리, 경도에서 삼십리)~인덕원(仁德院, 8리)~갈산점(葛山店, 3리, 분기)~사근평(肆勤坪, 9리)~지지대(遲遲臺, 5리)~수원(水原, 15리, 서울에서 칠십리)~하유천(下柳川, 15리)~중미현(中彌峴, 15리)~오산점(烏山店, 8리)~진위(振威, 12리, 서울에서 백이십리)~대백치(大白峙, 10리)~갈원(葛院, 8리)~가천(加川, 2리)~소사점(素沙店, 10리)~아교(牙橋, 3리)~(중략)~해남(海南)~해로(海路)~제주(濟州)'

 제주로는 일부 구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동작대로~47번 국도(과천~군포)~1번 국도(군포~의왕~수원~오산)로 이어진다. 한성의 남문인 숭례문에서 시작하는 제주로는 청파3거리에서 청파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삼각지 로터리를 경유한 후 동작대교 부근의 동작진에서 한강을 건넌다. 이후 승방평까지는 동작대로와 같다. 승방평은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와 일제시기 지형도, 1970년대 이후의 지형도에 모두 기재돼 있는데, 지금의 사당사거리에서 남태령 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사당역에서 남태령쪽으로 오르다보면 이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현재의 길은 거듭되는 확·포장공사를 통해 원래보다 고도가 낮아졌다. 이 마을 뒷산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는데, 승방평이라는 이름은 이 절 앞에 있는 들이라는 것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남태령을 넘으면 바로 과천에 닿는다. 과천 치소는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이고, 계속해서 4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곧 인덕원에 다다른다. 갈산점은 안양시 평촌동의 갈산마을 또는 의왕시 내손동 갈뫼마을이고, 여기서는 화성 남양으로 이어지는 길이 분기한다. 이 마을들은 평촌새도시 개발과 함께 옛 자취를 감추었다. 갈뫼를 지난 제주로는 47번 국도를 벗어나 의왕시 오전동의 진달래아파트, 신원수선화아파트, 의왕초등학교, 동남아파트를 관통하고, 의왕시에서 지정한 효행길로 이어진 후 1번 국도와 만나 수원으로 진입한다.

 사근평은 고촌동의 사그내 마을 앞 들을 일컫는 것 같다. 사그내 마을은 사근천(沙斤川), 사천, 벌사근천, 모래내 등으로도 불리는데 모래가 많아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연유는 알기 어렵다. 왕곡동의 골사그내와 고천동의 사그내는 다른 마을이다. 고천초등학교 일대를 일컫는 사그내는 고천동이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부터 이 일대의 중심 마을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사그내길 양편에 취락이 형성돼 있었는데, 지금은 고천동사무소와 상가, 빌라, 아파트들이 새로 들어서 취락이 확대됐다. 1번 국도와 고천동사무소를 잇는 약 70m 길이의 진입로가 사근행궁길로, 그 주변에 난 골목길들이 사그내 1~6길로 지정돼 사그내 옛 이름을 보전하고 있다.

 

 

 [길, 그곳으로 가다·31] 華城도읍 꿈꾼 정조 효심 건릉까지…

31. 제주로>2< - 또하나의 큰 길 수원로

 18세기 말에 여섯 개의 대로로 인식되던 조선의 간선도로 체계는 19세기 중엽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1864)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수원로가 더해져 10대로 체계로 확대되었다. 수원로는 정조의 화성 신도시건설과 건릉 능행과 관련해 신작로로 정비된 길이다. 수원로의 개발은 다분히 계획적이었지만, 삼남로가 경유해 일찍부터 경기 남부지역의 상업거점으로 발달한 수원과 한성을 잇는 수원로는 이전부터 대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는 수원로 노선이 1770년에 편찬된 '도로고'에 이미 '자경성유노량진저벌사근천일로'(自京城由鷺梁津抵伐沙斤川一路)로 명시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때는 물론 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을 지금의 위치인 화산으로 천장(遷葬)하는 논의가 나오기 이전의 일이다. 정조 사후 수원로는 노량진에서 사근평까지 노폭을 확장하는 등 과천을 경유하는 노선보다 더 중시되는 경향을 띤다. 우선 '대동지지'에 수록된 수원로 노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도(京都)~노량진(露梁津, 10리)~문성동(文星洞, 15리)~시흥(始興, 5리, 경도에서 삼십리, 분기)~안양행궁(安養行宮, 10리)~사근평행궁(肆覲坪行宮, 20리)~수원행궁(水原行宮, 20리)~건릉(健陵, 20리, 경도에서 일백리)'.

 서울 성내에서 노량진까지의 경로는 남대문을 나와 이문동(里門洞, 서울역 부근)~주교(舟橋, 용산구 서계동)~청파역(靑坡驛, 청파2·3가동)~석우참(石隅站, 남양동과 원효로의 경계)~당현(堂峴, 용문동)~만초천(蔓草川, 무악천·욱천)~습진기(習陣基)~노량진(露梁津)으로 이어진다. 만초천은 서대문구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의주로~청파로~원효로를 따라 남류하다가 현 원효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위의 배다리(주교·舟橋)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이다.

 한강을 건너면 노량진이다. 노량진은 헤드랜드가 강안까지 뻗어 있어 작은 언덕을 이루는데 그 위에 정조의 화성 능행시 머물렀던 행궁이 있었다. 한강을 건넌 이후의 경로는 노량진본동~동작세무서 진입로~장승백이길~장승백이 삼거리~상도동길~신대방 삼거리 남향 후 서향~동작우체국~대방로~대림삼거리~구로공단역(서울 지하철 2호선)~시흥IC(남부순환로)로 이어진다.

 대림삼거리부터 시흥대로(1번 국도)가 시작되고, 문성동은 지금의 독산동에 해당한다. 문성동 지명은 독산본동에 위치한 문성초등학교, 독산3동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문성골길, 그리고 그 길 중간에 건설된 문성터널 등의 이름으로 전해 내려온다. 문성동 이후의 수원로는 대체로 현재의 1번 국도 노선을 따른다.

 시흥 치소는 현재의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었다. 지금은 치소 부근에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을 뿐 예전 읍내로서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시대 시흥의 영역은 현재의 금천구를 중심으로 하고, 이밖에도 서울시 영등포·동작·구로·관악구 일부, 그리고 광명시와 안양시 일부를 포함한다. 삼막동 또는 안양리로 불렸던 현재의 안양시 석수동은 조선시대에 시흥군 소속으로 과천현과의 접경부에 있었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안양행궁은 만안교 남쪽에 위치하고 만안교(萬安橋,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는 1890년경 시흥치소 부근의 수원로, 지금은 자리를 옮겼지만 원래 석수동 안양천에 놓인 다리이므로 안양행궁은 석수동에 있었을 것이다. '경기지'(1842∼1843년)와 '경기읍지'(1871년)의 시흥군 공해조에 모두 104칸 규모의 행궁이 기재된 반면 과천에는 기록된 행궁이 없으므로 안양행궁이 석수동에 있었음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

 만안교는 1795년(정조 19) 수원성 축성과 더불어 건설되었다고 하나, 이전에도 있었던 것을 정조대에 수축한 것 같다. '동국여지지'(1660년대) 금천현 교량조에 현의 남쪽 16리 지점에 안양교(安養橋)가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 다리가 '경기지'와 '경기읍지'에 남쪽 10리 지점 과천과의 경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동지지'에는 같은 위치에 만안교가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안교(萬安橋)는 남쪽으로 십리에 위치해 있고, 안양천을 통해 수원대로로 갔다.(在南十里 安養川通水原大路)'. 즉 안양교가 곧 만안교일 것이다. 이 다리는 길이 31.2m, 폭 8m, 7개의 홍예수문이 있는 석교로서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을 동원한 대규모 교량이었다. 안양천 구하도에 남아있던 것을 1980년에 보존을 위해 200m 가량 북동쪽으로 옮겨 지금은 교량으로서의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지만, 1970년대까지 대형 자동차 2대가 동시에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였다.

 사근평행궁은 의왕시 고천동사무소 안에 이를 알려주는 표석이 있다. 사도세자의 이장 행차가 이곳에 이르자 마을 노인들이 마중하였고, 이에 정조가 그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그 자리에 행궁을 지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길, 그곳으로 가다·33] 신도시 꿈꾸던 '정조의 뉴딜'
33. 제주로>4< -백성에게 다가가는 길

 배를 엮어 다리를 놓아라
 길은 필요에 따라, 혹은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바뀐다. 좀 더 편리한 길을 찾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제주로도 마찬가지다. 궁궐에서 출발해 동작나루 건너 과천을 들르고 수원을 거쳐 남으로 향하던 제주로가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된다. 노량진 건너 상도동과 금천구 시흥동, 안양을 거쳐 수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힘들여 한강을 건너자마자 남태령을 넘어야 하는 피로를 줄였다. 그렇다고 과천을 경유하는 옛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길을 번갈아 이용하였다.

 개선된 새 길은 정조 임금이 애용한 길이기도 하다. 생부 사도세자의 묘원을 수원으로 옮기고 한 해에 한 번 꼴로 참배하려니 더 편리하고 좋은 길을 선호하였다. 더구나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려야 하는 임금의 행차이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길을 ‘즐겨찾기’ 하던 정조 임금 행차의 절정은 아무래도 1795년의 ‘을묘원행(乙卯園幸)’이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에서 성대하게 열어드린 것인데, 아버지 묘원에 참배하고 어머니 회갑잔치를 여는 등 동갑내기인 부모 모두를 위한 행차였다. 이때 서울에서 수원으로 내려온 인원만 6천여 명이었으니 새 길은 한 번 더 몸단장을 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시행되었다. 배들을 엮어 다리를 놓은 것이다. 이 배다리(주교·舟橋) 제도는 사도세자의 묘원을 당시 양주군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길 때 이미 써먹은 방법이었다. 아마도 배다리에 대한 자신이 있었으므로 거창한 을묘원행을 감행하였을 것이다. 을묘원행 때 배다리를 놓았던 곳에는 지금 한강철교와 한강대교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의 인원과 물산들의 도강(渡江)을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배다리는 주교사(舟橋司)에서 관장하였는데, 36척의 민간인 선박을 세곡 운반 등의 특혜를 주는 조건으로 참여시킨다.

 배 위에 장송 깔고, 장송 위에 박송 깔고
 그 위에 모래 펴고, 모래 위에 세사(細莎·잔디) 펴고
 그 위에 황토 깔고, 좌우에 난간 치고
 팔뚝 같은 쇠사슬로 뱃머리를 걸어 매고
 양끝에 홍살문과 한가운데 홍살문에
 ……
 '한양가'에 나오는 배다리 놓는 모습 중 일부이다.

 배다리는 강의 가운데 부분에 가장 큰 배를 배치하고 양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작은 배를 배열하여 전체적으로는 완만한 무지개 모양을 이루었다. 배 한 척은 강의 상류를 향하여 머리를 두고 한 척은 하류를 향하도록 하여 서로 교차시켜 가면서 늘여 세웠다. 이렇게 해야 닻을 내릴 때 닻끼리 서로 엉키지 않고, 배들이 정연해지기 때문이다.

 배 위에는 배의 폭보다 더 큰 나무(종량·縱樑) 다섯 개를 여섯 척 간격으로 놓아(전체 넓이 24척) 배에 묶고, 두 나무가 만나는 곳에는 구멍을 뚫어 나무로 만든 비녀장을 꽂아 고정 시킨다. 이 종량 위에 가로지르는 판자(횡판·橫板, 길이 24척, 넓이 1척, 두께 2치)를 잇대어 깔고 판자의 양쪽에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잔디까지 깔았다. 자신의 배에 필요한 잔디를 확보하는 것은 선주의 몫이었다.

 창덕궁을 출발하여 한강을 건넌 행차는 노량진의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들고 시흥행궁(서울시 금천구 시흥본동)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이튿날엔 사그내행궁(의왕시 고천동)에서 점심 먹고 지지대고개 넘어 화성행궁에 도착한다. 지지대고개는 한남정맥의 분수령이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정조의 발걸음이 더 늦어진 것이리라.

 

[길, 그곳으로 가다·37]무자비한 근대속으로 내달리다
37.제주로>8< - 선나

 ◆지지대를 지켜라

 1901년 4월 경부철도 노선을 위해 일본인들이 수원을 답사하며 표시를 하였다. 안양을 지나 지지대 고개를 뚫고 서문 밖으로 팔달산 뒤쪽을 관통하며 상유천~대황교 동편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수원사람들은 팔달산이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華寧殿)의 주산이고 지지대 역시 정조와 관련한 유적임을 들어 사그내~지지대 터널의 철도노선에 반대하였다. 전통적인 풍수지리와 왕실의 안녕에 더하여 그 노선에 전답과 분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남문 밖에 모여 철도의 지지대 통과 반대시위를 벌였다. 대한제국 황실도 반대 입장이어서 당시 철도원(鐵道院) 총재 유기환(兪箕煥)은 군산포(軍山浦)~사시현(四時峴)~대대동(大垈洞)~서둔동(西屯洞)~상유천(上柳川)을 지나는 노선을 주장하였다.
결국 경부선은 수원사람들의 뜻대로 수원읍치에서 서북쪽으로 에돌아 군포~부곡~수원역~병점으로 확정되었다. 지지대 터널을 뚫는 난공사를 피해 너른 평야지대를 관통하는 이 노선은 실상 일제의 처지에서도 공사비가 절감되는 것이었다.

 1905년 개통된 경부선은 영등포~부곡~수원~병점~오산~진위~서정리~평택으로 이어지는 노정을 따라 근대적 변화가 거세게 밀려왔다. 이는 일본의 거대 자본과 제국주의적 침탈의 길이었다.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기차는 근대문명의 기호이자 시간에 속박된 무자비한 근대를 만나는 것이기도 했다. 새벽 닭 울음소리에 깨어나 일하고 어둠과 함께 잠드는 순환적이고 자연적인 삶은 노동과 휴식이 철저하게 구분되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기차는 ‘정시 운행’을 통해 정확한 시간을 강제하였다. 그것을 탓하는 자를 시대에 뒤떨어진 ‘무지한 시골영감’으로 매도해 가며 기차는 시간에 속박된 근대적 시스템을 각인시키며 이 땅의 자연스러운 존재방식을 굉음을 내며 찢어가고 있었다. 신분적 질서조차 해체하면서.

 ◆순종황제의 능행

 경부선 개통으로 순종황제는 1908년 10월 융·건릉을 기차를 통해 참배했다.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수원역을 지나 대황교에 임시 정류장을 설치하여 하차하였다. 수원에 근 40년만에 임금의 대가(大駕)가 행차하는 셈인데 일본인이 능행에 배종하는 경우도, 경부선 기차를 이용한 능행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0월 3일 순종황제는 오전 9시 반에 융릉과 건릉을 차례로 전배하고 오후 2시 반 다시 대황교에서 기차를 타서 서호(西湖)에서 내려 항미정(杭眉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농사모범장을 시찰하였다. 순종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그 소나무는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지?

 용주사에는 조지훈의 ‘승무' 시비가 서 있다. 조지훈이 19살 때 용주사에서 큰 재(齋)가 열린다는 소리를 듣고 기차 타고 내려와 승무를 보고 난 감동으로 하여 시 승무가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청년 조지훈의 조선적인 것을 찾는 성숙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병점역과 가까운 용주사의 지리적 영향도 작용했을 터, 그렇게 기차는 식민지 조선의 일상에 속도를 불어넣었다.

◆철도역을 통해 일본인들이 장악해오다.

 경부선이 개통된 몇 년 뒤인 1910년 수원역을 통해 쌀과 콩 그리고 땔나무가 가장 많이 실려 나갔고, 목재, 석유, 연와(煉瓦), 명태(明太) 등이 수원에서 부려졌다.
 
전통적인 도시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을 개설함으로써 조선인들의 넓은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여 다시 일본인들에게 불하함으로써 역세권은 일본인들이 장악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도시와 장시(場市)를 철도역을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일본인이 새로운 상권을 장악하여 큰 도매업을 하고 조선인들은 그 아래 종속적인 소매업을 하게 만들어 식민지 경제체제를 확고히 하는 기제가 되었다.

 

45.남양로>1< - 해남로 1차 분기로 따라

 `대동지지'에 명기된 10대로 가운데 제8호 해남로는 갈산점을 지난다. 해남로는 신경준의 `도로고'의 제주로와 같다. 이 길은 서울에서 과천, 수원, 진위, 평택 등을 경유해 경기도를 벗어나 충청도로 진입한다. 주요 관할 역으로는 양재도 소속의 영화역, 장족역, 동화역, 청호역 등을 들 수 있다.

동작진에서 한강을 건너고 남태령을 통해 과천으로 들어온 해남로는 인덕원에서 갈산점으로 이어진 후 의왕과 수원 사이의 지지대고개를 넘는다. 갈산점은 오늘 날 의왕시 내손동의 갈뫼마을 또는 안양시 평촌동 갈산마을로, 남양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남양은 조선시대에 독립된 군현의 하나로서 읍격은 도호부였다. 도호부는 주로 군사적 요지에 배치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해안방어를 강조하는 국방개념이 강조되면서 해안을 낀 군읍들이 많이 도호부가 되었다. 남양로가 해남로의 1차 분기로로 인식·관리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이 저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양도호부는 1914년에 수원에 병합되면서 수원군 남양면으로 전락하였고, 수원읍이 시로 승격하면서는 이름을 바꿔 화성군 소속이 되었다. 화성시로 승격한 오늘날에는 시청이 옛 남양도호부의 읍치였던 남양동에 입지함으로써 옛 남양도호부가 수원부를 병합한 꼴이 되었다. 갈산점에서 분기하여 인현(鱗峴, 비늘치)을 넘어 남양읍내까지 이어지는 남양로 59리 길 노선은 `대동지지'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갈산점-부곡(9)-인현(20)-구포(10)-<남양>(20)
葛山店-富谷(9)-鱗峴(20)-鷗浦(10)-<南陽>(20)

갈뫼 또는 갈미로도 불리는 갈산점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의곡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수원군 의왕면이 되었다. 이때 갈산동은 내손리와 포일리로 분할되었으며, 지금은 일부가 안양시 평촌동으로도 편입되었다.

`한국지명총람'에도 갈산마을은 안양시 평촌동과 의왕면 내손리(현 의왕리 내손동) 두 곳에 모두 기재되어 있는데, 안양시 갈산마을은 민백동(민백이) 마을 남쪽에, 그리고 내손리 갈산마을은 민배기(민백이) 마을 서쪽에 위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제시기 제작된 지형도에는 갈산마을이 민백이 마을 남쪽에 표시되어 있으나, 서로 다른 두개의 마을인 것 같지는 않다. 일제시기 지형도에서 갈산마을을 관통하는 길이 현재 42번 국도로서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가 된다.
 
갈산점에서 9리 떨어진 부곡은 오늘날 군포시 부곡동에 해당한다. 갈산에서 부곡까지의 노선은 명확하지 않다. 군포시 당정동의 유한양행 안쪽길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추정되지만 그 후의 노선은 시가지 개발과 더불어 크게 훼손된 듯하다. 다만 당정동과 의왕시 고천동 및 이동과의 경계선이 구 남양로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노선은 일제시기 지형도에 봉황리와 당정리를 경유하는 연로(聯路)로 표시되었다. 연로는 지형도에 나타난 도로 6등급 가운데 네번째에 해당한다.

인현은 비늘치로 불린다. 2000년대에 발행된 1:5만 지형도에 따르면 비늘치는 안산시 사사동과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 두 곳에 표기되어 있다. 이중 송라리의 것은 비눌치로 기재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대동지지'에서 일컬은 인현은 안산시를 흐르는 반월천과 매송면을 흐르는 동화천의 분수계에 놓여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이지만, 이 고개에 대한 정보가 `한국지명총람'에서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일제시기 및 1970년대에 제작된 1:5만 지형도에도 이 이름이 없어 약간은 의아스럽다.

어쨌든 부곡동에서 남양로는 남쪽으로 왕송저수지 서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수원시 당수동 당진개마을에서 사사동쪽으로 방향을 틀은 다음 비늘치를 넘어 칠보산 보명사 앞을 지나 어천리의 어천저수지쪽으로 빠진 듯하다. 1990년대에 포장이 완료되었지만 일제시기 지형도는 물론 1970년대 지형도에서도 이 고갯길은 가장 등급이 낮은 소로(小路)로 표시되어 있다.

어천리까지 내려온 남양로는 이후 남양읍내까지 306번 지방도로 노선을 따른다. 이 길은 일제시기 지형도에서도 연로보다 한 단계 높은 달로(達路)로 표시되어 있다. 구포는 오늘 날 비봉면 구포리로 지금은 비둘기 구(鳩)자를 쓰지만 갯가에 있으므로 갈매기를 뜻하는 구(鷗)자가 맞을 것 같다. 구포리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해안의 넓은 간석지를 간척한 결과로서, 간척 이전에 작은 배는 갯골을 따라 구포리까지 왕래할 수 있었다.

이 길은 남양과 수원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이에 전통적으로 남양의 최대 간선도로는 바로 이 노선이었다. 화성시에서 남양로가 경유하는 매송면, 비봉면, 남양면은 모두 면사무소가 이 길가에 위치하면서 각 면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길, 그곳으로 가다·47]
47.남양로>3< - 갈산점 ~ 남양도호부 지름길

 남양과 서해 직통로

남양로의 출발점인 갈산점 주변은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 및 ‘갈뫼골’, ‘갈뫼안골’ 등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인덕원에서 십리 쯤 남진한 곳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에는 서울외곽순환도로가 공중으로 지나고 넓디넓은 흥안로가 남북을 관통하고 있다. 아파트 숲이며 대형할인점과 농수산물도매시장도 인근에 있으므로 옛 갈산점의 영화가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길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순리일 것이다. 하지만 남양로 만큼 필요충분조건을 구비한 길도 드물 것이다. 이 갈산점에서 남서쪽으로 남양도호부까지 곧게 내려간 길이 남양로이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지름길이면서도 큰 고개를 넘지 않으며 구포, 빈정포 등 서해의 포구까지 아우르고 있으니….

남양로는 어쨌거나 한남정맥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역시 지지대고개 같은 험한 고개 대신, 오봉산과 수리산 사이 낮은 고개를 넘었다. 오죽했으면 경부선 철로 또한 이 부근(의왕역)을 관통하여 남쪽으로 내려갔겠는가? 더구나 칠보산을 거쳐 융릉과 건릉이 있는 화산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도 한남정맥의 지류이고, 다시 화산에서 남양도호부의 진산인 비봉산까지도 그 지맥이 이어지므로 크게 보면 모두 한줄기라고 할 수도 있다. 마치 한남정맥의 광교산 뒤를 백운산이며 청계산, 관악산 등이 받치고 있는 것처럼. 다만 한남정맥의 북쪽은 높은 산들이 배후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 남쪽은 얕은 산들이 올망졸망하게 이어지는 것만 다를 뿐이다.

남양도호부에 화성시청, 협궤철로 옆엔 고속철도
 
면 소재지였던 남양은 화성시청이 들어서면서 옛 도호부의 명성에 걸맞게 되었지만, 구포는 시화지구 간척지 사업으로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18세기 화성 건설에 있어 물자 유통의 최일선이었던 포구가 지금은 전설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인천 송도와 수원을 오가던 수인선 협궤열차는 전동열차로 다시 부활하려고 기지개를 켜고 있다. 어천역 인근의 도로와 철길이 만나는 곳엔 아직도 ‘우선멈춤’표지판이 서 있어 당장이라도 열차가 지나갈 것만 같다. 트럭과 충돌하여 기차가 넘어갔다는 그 수인선 협궤열차가 그리워진다. 이 협궤열차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을 싣고 오갔던가? 통학열차로, 통근열차로, 또 보따리장사열차로…. 송도나 사리에서 싣고 온 비릿한 생선 냄새며 새우젓, 밴댕이젓 등의 짭짤한 맛과 소금가마니에서 배어나온 간수의 끈적거림, 수박과 참외, 복숭아며 포도 등등. 이 모든 것이 2m도 채 안 되는 좁은 폭의 열차에서, 그것도 서로 차창에 등대고 마주앉아 무릎을 맞대고 그 사이사이로는 각종 화물들을 수북이 쌓았다. 아니 화물들을 먼저 쌓아놓고 적당한 틈새에 발을 디밀고 앉았었다. 그러고도 열차 손잡이를 이용하여 체조선수처럼 이리저리 이동하기도 하였다. 그 사람들과 물건들이 인천에서 수원으로, 수원에서 인천으로 무수히 오갔다.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는 어천역사 부근엔 아직도 협궤철로의 잔해가 남아 있다. 철로 폭이 80㎝도 안 되어 과연 이 철길로 기차가 다닐 수 있었나 하는 의심마저 든다. 옛 어천역에서 멀지않은 곳에 어천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를 둘로 나누면서 고속철도가 지나고 있다. 날아가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만큼 빠르게 지나간다.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라고는 하지만 협궤열차를 타고 다닌 것도 사람이었고, 고속열차나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구불구불 옛길을 걸어 다닌 주인공도 사람이었고, 신작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도 사람이 운전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빠르고 편안한 것만큼 행복해졌을까?

새우대와 새우잡이, 새우젓 장수

어천저수지 상류로 올라가면 낮은 고개가 나오는데 제법 길게 이어진다. 비늘치라는 고개인데 남양로의 가장 긴 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안산시 사사동을 거쳐 수원시 당수동으로 또 의왕시 초평동으로 해서 오봉산 왼쪽 고개를 넘어 갈산점에 이르게 된다. 즉 바다에서 수도권의 수원과 안양, 과천, 그리고 서울로 직통하는 중요로가 된다. 분기로이긴 하지만 그 기능이나 이용도에 있어서는 결코 다른 길에 뒤지지 않는 중요로가 남양로인 것이다. 물론 그 길이가 짧기는 하지만.

의왕시 초평동은 ‘새우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열 두 새우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랫새우대와 중간새우대, 그리고 윗새우대로 나뉘어 있다. 이 마을은 왕송저수지(부곡저수지) 서쪽과 북쪽을 감싸고 있는데 완만한 구릉이 넓게 펼쳐져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10여 군데나 되는 유물산포지 조사에서도 알 수 있는 곳이다. 각종 토기며 자기, 기와조각 등이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새(풀)가 무성한 벌판이었으므로 ‘새우대’, 초평(草平)이라고 불렀으며, 사오대(士烏臺)가 새우대로 변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어쨌거나 뜻은 다르지만 새우대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이 왕송저수지에서 새우잡이를 해본 사람이 꽤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민물새우가 ‘까맣게’ 수면을 덮었었다는 너스레가 귀엽게 들리기도 한다. 하기야 삼십여 년이 지난 일이니 좀 과장한들 어떠랴! 해돋이 어름과 해넘이 무렵 이 저수지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수인선을 타고 남양로를 걸어 왔거나 안산 사리포구에서 왔거나 이곳은 생선장수 소금장수와 젓갈장수가 늘 거치는 마을이기도 하였다. 예까지 뻑뻑한 새우젓을 지고이고 와서 은밀히 물 타서 팔던 장삿속을 본 사람도 아직은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