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3 경향신문]
“이승만 대통령도 원폭제조 시도”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원자폭탄에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로(연구용 원자로)를 서울에서 떨어진 진해, 안양 등지에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측의 반대로 결국 서울공대가 있던 공릉동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서울대 김성준 연구원(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은 지난달 28일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과학사학술대회에서 ‘1950년대말 두 미국인 과학자의 한국 원자력 보고서’를 발표했다.
김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이대통령이 원자폭탄을 염두에 두고 연구용 원자로를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 지으려 했다”고 밝혔다. 김연구원은 그 증거로 물리학자로서 초대 문교부 원자력과장을 지냈던 윤세원 박사의 개인 비망록 등을 들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윤박사는 원자력과장에 부임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대통령은 윤박사에게 “우리나라도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으며 “연구소를 지을 장소는 진해도 좋아. 더 좋은 곳이 필요하다면 찾아보게”라고 말했다는 것.
이에 따라 윤박사는 안양 박달리를 원자력연구소 후보지로 정하고 1958년 4월 한국을 방문했던 원자력전문가 휘플 교수를 현장에 데려갔다. 그러나 휘플 교수는 박달리가 오지라며 후보지로 마땅치않아 했다.
실제로 휘플은 한국 방문 보고서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서울대 근처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워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1958년 8월 한국을 방문한 곰버그 교수(미시간대 피닉스프로젝트 책임자)도 “서울밖에 원자로를 짓는 것은 연구소가 더 발전된 다음에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냈다.
윤박사는 같은 해 8월쯤 미국을 다녀와보니 부지 선정을 했던 그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미군 팻말이 붙어 있었다고 전했다. 한국 정부는 군사적 관심으로 끊임없이 원자로를 외진 곳에 지으려 했고 미국 정부는 그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김연구원은 “이들 과학자는 새로 짓는 원자로가 기존 연구와 연계돼야 한다는 점에서 연구 인력이 있는 서울을 선호했으며 미국 정부는 과학자의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 정부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로 부지는 당시 서울공대가 있던 공릉동으로 결정됐으며 1962년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마크Ⅱ’가 완공됐다. 지난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때 문제가 됐던 ‘트리가마크Ⅲ’는 나중에 들여온 연구용 원자로이다.
한편 두 미국인 과학자는 한국의 연구 인력들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휘플은 “한국이 너무 가난하지만 인력만은 풍부하다”고 적었다./ 이은정기자 ejung@kyunghyang.com
“이승만 대통령도 원폭제조 시도”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원자폭탄에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로(연구용 원자로)를 서울에서 떨어진 진해, 안양 등지에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측의 반대로 결국 서울공대가 있던 공릉동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서울대 김성준 연구원(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은 지난달 28일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과학사학술대회에서 ‘1950년대말 두 미국인 과학자의 한국 원자력 보고서’를 발표했다.
김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이대통령이 원자폭탄을 염두에 두고 연구용 원자로를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 지으려 했다”고 밝혔다. 김연구원은 그 증거로 물리학자로서 초대 문교부 원자력과장을 지냈던 윤세원 박사의 개인 비망록 등을 들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윤박사는 원자력과장에 부임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대통령은 윤박사에게 “우리나라도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으며 “연구소를 지을 장소는 진해도 좋아. 더 좋은 곳이 필요하다면 찾아보게”라고 말했다는 것.
이에 따라 윤박사는 안양 박달리를 원자력연구소 후보지로 정하고 1958년 4월 한국을 방문했던 원자력전문가 휘플 교수를 현장에 데려갔다. 그러나 휘플 교수는 박달리가 오지라며 후보지로 마땅치않아 했다.
실제로 휘플은 한국 방문 보고서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서울대 근처에 원자력연구소를 세워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1958년 8월 한국을 방문한 곰버그 교수(미시간대 피닉스프로젝트 책임자)도 “서울밖에 원자로를 짓는 것은 연구소가 더 발전된 다음에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냈다.
윤박사는 같은 해 8월쯤 미국을 다녀와보니 부지 선정을 했던 그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미군 팻말이 붙어 있었다고 전했다. 한국 정부는 군사적 관심으로 끊임없이 원자로를 외진 곳에 지으려 했고 미국 정부는 그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김연구원은 “이들 과학자는 새로 짓는 원자로가 기존 연구와 연계돼야 한다는 점에서 연구 인력이 있는 서울을 선호했으며 미국 정부는 과학자의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 정부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로 부지는 당시 서울공대가 있던 공릉동으로 결정됐으며 1962년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마크Ⅱ’가 완공됐다. 지난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때 문제가 됐던 ‘트리가마크Ⅲ’는 나중에 들여온 연구용 원자로이다.
한편 두 미국인 과학자는 한국의 연구 인력들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휘플은 “한국이 너무 가난하지만 인력만은 풍부하다”고 적었다./ 이은정기자 ejung@kyunghyang.com
2005-05-03 09: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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