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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안양사(安養寺)

안양똑딱이 2016. 6. 11. 09:05

[10/24 안양시민신문]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일반적으로 안양(安養)이란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안양사(安養寺)는 AD900년 경 고려 태조 왕건의 명을 받은 능정(能正)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년, 1530년)은 전하고 있다.

당시 20대의 젊은 장군 왕건은 궁예의 명으로 조공을 약속하고도 바치진 않던 남쪽의 3개 주(광주, 충주, 청주)를 정벌하러 이 곳을 지나던 중, 산기슭에 어리는 오색영롱한 서기 속에서 늙은 스님 능정을 만나게 되는데, 서로 뜻이 맞아 안양사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절 마당 남쪽으로 7층 전탑을 함께 세웠는데, 아래층의 규모는 둘레가 열 두간인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바, 벽마다 부처, 보살, 천인(天人)의 상을 그려 넣었으며 밖으로는 난간을 세워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했을 정도로 크고 화려하여 다른 절과 비교가 될만한 규모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로 미루어 안양사는 젊은 시절 고려 태조 왕건이 마음속에 품었던 비원으로 창건된 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안양사는 최영 장군과 안양사 전탑에 얽힌 비사도 간직하고 있다. 청년 최영이 전국을 방랑하던 중 낡고 허물어진 안양사 전탑을 보고 “성조께서 처음 이 절을 창건하신 뜻을 우러러 맹서하건데, 신이 뒷날 영달하고도 이 탑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신령이 내려다보시리라…”고 마음속으로 맹세하고, 후일 시중이 되자 양광도안염사(楊廣道按廉使)로 하여금 경비를 마련하고, 장정을 징집하여 전탑복원을 마무리하게 하여 젊은 시절 자신과 한 약조를 지켰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탑이 완공된 낙성식 날은 임금께서 내시 박원계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 도승 1천여 명으로 불사를 거행하여 사리 열두 개와 부처 치아 한 개를 탑 가운데 봉안했으며 보시한 사부중생이 삼천에 이르렀다. 탑 안의 사방 벽에는 약사회, 석가열반회, 미타극락회, 금경신중회를 그렸으며, 회랑 열두 간 벽 마다 한 상(像)씩 열두 행년불을 그려 넣었다는 기록은 당시 안양사7층전탑의 위용과 안양사가 이 지역 불교계에 가지고 있던 위세를 짐작케 한다.

안양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군데군데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을 들면 태종 6년과 11년 탕욕(湯浴)을 위해 태종 임금이 직접 안양사에 거동한 것과 세종 말 문종 초 황폐화한 안양사를 새롭게 중창하는 것에 대하여 정인지 등이 사찰을 창건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법을 들어 비판한 내용이 실록에 있다.

이와 같은 전설과 역사를 가진 안양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존하는 사찰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6세기 중반까지는 사세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이나, 옛터(古基)라고 표기된 여지도서(輿地圖書)가 발간된 영조35년(1759년)에는 이미 폐사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안양사는 옛 절터 위에 인근에 널려 있던 유물을 수습하여 1962년에 세운 태고종 사찰인데, 과거 안양사 터에 현재의 안양사가 세워진 것인지에 대하여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안양’이라는 지명을 시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쓰게 한 안양사 옛 터를 발굴·확인함으로써 안양의 뿌리를 찾고자 하던 안양시의 의도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유로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양시의 뿌리를 찾아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유사한 노력이 계속되어 ‘살고 싶은 도시’ 안양시의 지역정체성이 튼튼하게 확립되길 기대해 본다.

2003-10-24 17: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