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장
일찍이 고려조의 명신 강감찬에 의해서 경기금강이라고 불리어진 관악산의 여러 골짜기 중 가장 수량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곳이 바로 안양유원지 계곡이다.
안양대교 부근에서 안양천과 합류하는 삼성천을 따라 쭉 올라가노라면 삼성산과 관악산이 어우러지는 깊은 골에 당도하게 되는 바, 이 곳이 바로 안양유원지 계곡이다.
이 계곡에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뿐만 아니라 조금만 신경을 쓰면 그 의미를 곱씹어 낼 수 있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그 첫째가 유원지 주차장 못 미처 유유산업 앞마당에서 만나게 되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서,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유명한 보물 제 4 호 중초사지당간지주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 5 호 중초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유유산업 건설당시 중초사지에 대한 유적조사를 통하여 많은 유물들을 발굴하여 지금까지 사내에서 보관해 오고 있었으나, 도박물관에서 출토유물 중 비교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청동용두와 사자향로발에 대하여 보관 및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대리보관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뒷마당 쪽에는 자유당시절 특무대장을 지낸 김 창용 장군의 묘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이장해서 그 위치만 짐작할 뿐이다.
이어 유원지 주차장 바로 위쪽 삼성산 자락 큰 바위 위에는 암각으로 스님이 종루에서 종치는 모습을 새겨 넣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93 호로 지정된 마애종을 볼 수 있는데,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입구 왼쪽 산중턱에는 젊은 날의 고려 태조 왕건과 최 영 장군의 꿈과 기개를 전설로 추적해 볼 수 있는 안양사가 있다. 이 안양사는 오늘 날 안양이란 지명이 유래한 곳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부와 부도가 있다.
그 외에도 유원지에는 염불암, 불성사, 삼막사 등 그 건립연대를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찰들과 절터의 규모로 보아 그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는 삼막골사지와 호압사지 및 장석광사지 등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도요지로서 청자와 더불어 고려백자가 출토되는 것으로 유명한 비산동도요지가 농대 수목원 안에 있다.
이러한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천혜의 경관은 고래로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붙잡아 풍류담과 더불어 많은 시문을 남기게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태종 17년 오랜 가뭄으로 금주령이 시행되고 있던 상황하에서 이임하는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를 이웃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안양유원지 계곡에서 베풀어주던 중, 강권하던 소주를 못 이겨 김 문이 갑자기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전까지 보고된 이 사고에 대한 태종의 수습책은 의외로 간단해서 "술을 권하는 일은 고래의 미풍이지 악습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큰일이니 관련자들을 파직하라"는 명쾌한 판결로 매듭을 지은 것이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실려 있다.
안양출신의 수필가인 이 용구 씨는 '양짓마을 까지소리'란 그의 수필집에서 일제시대인 '30년대 안양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가면 학년을 불문하고 무조건 안양유원지로 갔다고 하면서, 유원지계곡이 일찍부터 안양사람의 휴식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이나 수원 지역 사람들도 봄부터 가을까지 즐겨 찾던 명소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유원지가 전국적인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계기는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조 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하여 1,500원의 예산으로 안양유원지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을 만들어 안양풀이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된다.
지금도 유원지 입구의 자유의 집을 기점으로 해서 삼성천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그 당시 만든 풀장의 둑과 탈의용 계단의 형태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자연석으로 된 거대한 초석에는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책임자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초석의 3분의 2 가량이 1977년 대홍수 후 보의 붕괴를 우려해서 만든 콘크리트 보조 둑에 덮여버려 마지막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이 안양 풀과 유원지계곡은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이후 6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명소여서 여름 한철 하루 약 2만 명의 유람객이 찾은 것으로 금천지는 기록하고 있다. 안양 역에서는 행락철에 한하여 유원지입구에 간이역을 설치했고, 이 곳에서 풀장까지 임시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인파가 많이 몰렸던 곳이 바로 안양 풀이었다.
이 용구 씨는 이 안양 풀 때문에 서울에서 친척과 학우들이 매년 한 번씩 찾아왔고, 자신은 매해 그들의 안내자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어 이 씨는 '30년대에는 유원지 입구 좌우에 수박, 참외, 토마토 밭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50년대에 발간된 '금천지'에는 큰 포도밭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 것으로 봐서, 그 사이 유원지에 안양포도라는 명물이 탄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안양포도는 오끼,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기 시작함으로써 탄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양포도는 포도농사에 더없이 좋은 기후와 토양이 거름이 되어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로 알려져서, 서울 시중 어디서나 장사치들이 "안양포도요! 안양포도" 하면서 자신 있게 외치고 다닐 정도로 성가를 누렸다.
그러나 안양이 급속히 산업화되고, 포도밭이 하나 둘 주택단지로 바뀌면서 지금은 그 명맥만 잇고 있다.
이 안양풀이 쇠락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상류 쪽에 대형풀장, 맘모스풀장 및 만안각 풀장 등 인공적으로 만든 시멘트 풀장이 들어서고, 또한 행락객들이 버린 오물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서 자연하천인 삼성천이 오염되어 풀장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처럼 인파와 행락객이 몰리면서 관악산과 유원지계곡의 오염이 심화되자 당국에서는 이러한 명소의 심층적인 관리가 필요해 졌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건교부의 전신인 교통부에서 '69년 1월 21일에 국민관광지로 지정한 것이다.
이 때부터 입구에 아치모양의 철구조물로 '안양유원지'라는 표찰이 붙고, '안양 풀' 대신 '안양유원지'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으며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입구에서 매표를 하게되고, 입장수입으로 유원지를 관리하게 되었다.
발전의 전기를 맞이한 것 같던 안양유원지가 다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이 지역이 1971년 7월 30일 건설부 고시 제447호로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지정되고, 이어 '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당국의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부터이다.
게다가 안양에서만 230명의 인명피해를 낸 '77년의 대홍수는 기존 유원지의 경관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는데,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안양풀이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에 휩쓸려 완전히 자취를 감춰서 잊혀져 버리는 계기가 되었고, 홍수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쌓은 무분별한 시멘트 둑과 미적 고려 없이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진 각종 구조물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망쳐버렸다.
이처럼 인공이 가미되어 자연의 풍광을 잃어 가는 안양유원지에 대하여 교통부에서는 '84년 11월 28일 국민관광지 지정을 취소하게 되는데, 이 때 안양시에서는 조례로서 비지정관광지로 지정하여 입장료와 쓰레기수거료를 행락철에 한하여 받아 관리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90년 봄 안양민속주인 '옥미주'가 안양유원지에 한하여 제조 및 판매를 허가 받아 유원지의 특산물로서 시민과 관악산을 등반하는 등산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 유원지의 명물로 정착하는 듯 했으나, 개발제한구역내의 제조업억제책의 일환으로 당국의 단속에 밀려 떠남으로서 유원지의 명성은 완전히 쇠퇴해 버리고 말았다.
유원지의 황폐화가 이처럼 계속되자 안양시에서는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경제활성화 및 지역개발 차원에서 유원지를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94년 3월 28일에 승인된 '2011년 안양시도시기본계획'에서는 안양유원지를 도시공원에서 제척시키는 계획을 세웠고, '95년 3월 6일에는 도시계획을 재정비 입안하며 공원지구를 해제했으며, 이어 경기도에서도 경기도고시 제 462 호로 공원해제를 고시했다.
'95년 전면적인 지방자치의 실시로 민선시장체제가 출범하면서 선거 때마다 유원지 정비 및 개발계획은 주요 공약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는 바, 이 때부터 유원지개발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한 양태는 '96년 말 안양유원지를 그린벨트지역 내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하면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고, 이어서 안양시청 내 유원지개발기획단이라는 상설기구를 설치하여 유원지 개발을 위한 실천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96년에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의뢰해서 만든 '안양시 산업발전계획'에 유원지개발계획이 들어 있었으나 실시되지는 않았고, 또한 국토연구원에 발주하여 올 8월이면 발표되는 '안양비전 21'에도 8개 과제 중의 하나로 안양유원지 개발계획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안양시에서도 이미 유원지 개발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어느 정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종의 계획이 하나로 어우러져 내실 있고 짜임새 있는 유원지개발계획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과 유원지주변의 풍부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는 유원지개발이 이루어져,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놀이 및 휴양시설을 갖춘 유원지로 거듭 나길 바라마지 않는다.
자료제공 : 변 원신 (안양시 고충처리위원장, 안양3동 마을금고 이사장)
김 지석 (안양시 향토사료실 상임위원)
대 담 : 윤 현 수(안양시 복지환경국장, 유원지개발기획단장)
참고문헌 : 이 용구, "양짓마을 까치소리", 세종인쇄사, 1991.
시흥군, "금천지", 1950.
안양시, "안양문화유적총람", 1996. 외
안양대교 부근에서 안양천과 합류하는 삼성천을 따라 쭉 올라가노라면 삼성산과 관악산이 어우러지는 깊은 골에 당도하게 되는 바, 이 곳이 바로 안양유원지 계곡이다.
이 계곡에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뿐만 아니라 조금만 신경을 쓰면 그 의미를 곱씹어 낼 수 있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그 첫째가 유원지 주차장 못 미처 유유산업 앞마당에서 만나게 되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서,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유명한 보물 제 4 호 중초사지당간지주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 5 호 중초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유유산업 건설당시 중초사지에 대한 유적조사를 통하여 많은 유물들을 발굴하여 지금까지 사내에서 보관해 오고 있었으나, 도박물관에서 출토유물 중 비교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청동용두와 사자향로발에 대하여 보관 및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대리보관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뒷마당 쪽에는 자유당시절 특무대장을 지낸 김 창용 장군의 묘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이장해서 그 위치만 짐작할 뿐이다.
이어 유원지 주차장 바로 위쪽 삼성산 자락 큰 바위 위에는 암각으로 스님이 종루에서 종치는 모습을 새겨 넣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93 호로 지정된 마애종을 볼 수 있는데,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입구 왼쪽 산중턱에는 젊은 날의 고려 태조 왕건과 최 영 장군의 꿈과 기개를 전설로 추적해 볼 수 있는 안양사가 있다. 이 안양사는 오늘 날 안양이란 지명이 유래한 곳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부와 부도가 있다.
그 외에도 유원지에는 염불암, 불성사, 삼막사 등 그 건립연대를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찰들과 절터의 규모로 보아 그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는 삼막골사지와 호압사지 및 장석광사지 등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도요지로서 청자와 더불어 고려백자가 출토되는 것으로 유명한 비산동도요지가 농대 수목원 안에 있다.
이러한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천혜의 경관은 고래로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붙잡아 풍류담과 더불어 많은 시문을 남기게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태종 17년 오랜 가뭄으로 금주령이 시행되고 있던 상황하에서 이임하는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를 이웃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안양유원지 계곡에서 베풀어주던 중, 강권하던 소주를 못 이겨 김 문이 갑자기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전까지 보고된 이 사고에 대한 태종의 수습책은 의외로 간단해서 "술을 권하는 일은 고래의 미풍이지 악습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큰일이니 관련자들을 파직하라"는 명쾌한 판결로 매듭을 지은 것이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실려 있다.
안양출신의 수필가인 이 용구 씨는 '양짓마을 까지소리'란 그의 수필집에서 일제시대인 '30년대 안양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가면 학년을 불문하고 무조건 안양유원지로 갔다고 하면서, 유원지계곡이 일찍부터 안양사람의 휴식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이나 수원 지역 사람들도 봄부터 가을까지 즐겨 찾던 명소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유원지가 전국적인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계기는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조 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하여 1,500원의 예산으로 안양유원지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을 만들어 안양풀이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된다.
지금도 유원지 입구의 자유의 집을 기점으로 해서 삼성천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그 당시 만든 풀장의 둑과 탈의용 계단의 형태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자연석으로 된 거대한 초석에는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책임자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초석의 3분의 2 가량이 1977년 대홍수 후 보의 붕괴를 우려해서 만든 콘크리트 보조 둑에 덮여버려 마지막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이 안양 풀과 유원지계곡은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이후 6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명소여서 여름 한철 하루 약 2만 명의 유람객이 찾은 것으로 금천지는 기록하고 있다. 안양 역에서는 행락철에 한하여 유원지입구에 간이역을 설치했고, 이 곳에서 풀장까지 임시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인파가 많이 몰렸던 곳이 바로 안양 풀이었다.
이 용구 씨는 이 안양 풀 때문에 서울에서 친척과 학우들이 매년 한 번씩 찾아왔고, 자신은 매해 그들의 안내자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어 이 씨는 '30년대에는 유원지 입구 좌우에 수박, 참외, 토마토 밭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50년대에 발간된 '금천지'에는 큰 포도밭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 것으로 봐서, 그 사이 유원지에 안양포도라는 명물이 탄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안양포도는 오끼,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기 시작함으로써 탄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양포도는 포도농사에 더없이 좋은 기후와 토양이 거름이 되어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로 알려져서, 서울 시중 어디서나 장사치들이 "안양포도요! 안양포도" 하면서 자신 있게 외치고 다닐 정도로 성가를 누렸다.
그러나 안양이 급속히 산업화되고, 포도밭이 하나 둘 주택단지로 바뀌면서 지금은 그 명맥만 잇고 있다.
이 안양풀이 쇠락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상류 쪽에 대형풀장, 맘모스풀장 및 만안각 풀장 등 인공적으로 만든 시멘트 풀장이 들어서고, 또한 행락객들이 버린 오물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서 자연하천인 삼성천이 오염되어 풀장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처럼 인파와 행락객이 몰리면서 관악산과 유원지계곡의 오염이 심화되자 당국에서는 이러한 명소의 심층적인 관리가 필요해 졌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건교부의 전신인 교통부에서 '69년 1월 21일에 국민관광지로 지정한 것이다.
이 때부터 입구에 아치모양의 철구조물로 '안양유원지'라는 표찰이 붙고, '안양 풀' 대신 '안양유원지'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으며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입구에서 매표를 하게되고, 입장수입으로 유원지를 관리하게 되었다.
발전의 전기를 맞이한 것 같던 안양유원지가 다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이 지역이 1971년 7월 30일 건설부 고시 제447호로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지정되고, 이어 '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당국의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부터이다.
게다가 안양에서만 230명의 인명피해를 낸 '77년의 대홍수는 기존 유원지의 경관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는데,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안양풀이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에 휩쓸려 완전히 자취를 감춰서 잊혀져 버리는 계기가 되었고, 홍수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쌓은 무분별한 시멘트 둑과 미적 고려 없이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진 각종 구조물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망쳐버렸다.
이처럼 인공이 가미되어 자연의 풍광을 잃어 가는 안양유원지에 대하여 교통부에서는 '84년 11월 28일 국민관광지 지정을 취소하게 되는데, 이 때 안양시에서는 조례로서 비지정관광지로 지정하여 입장료와 쓰레기수거료를 행락철에 한하여 받아 관리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90년 봄 안양민속주인 '옥미주'가 안양유원지에 한하여 제조 및 판매를 허가 받아 유원지의 특산물로서 시민과 관악산을 등반하는 등산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 유원지의 명물로 정착하는 듯 했으나, 개발제한구역내의 제조업억제책의 일환으로 당국의 단속에 밀려 떠남으로서 유원지의 명성은 완전히 쇠퇴해 버리고 말았다.
유원지의 황폐화가 이처럼 계속되자 안양시에서는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경제활성화 및 지역개발 차원에서 유원지를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94년 3월 28일에 승인된 '2011년 안양시도시기본계획'에서는 안양유원지를 도시공원에서 제척시키는 계획을 세웠고, '95년 3월 6일에는 도시계획을 재정비 입안하며 공원지구를 해제했으며, 이어 경기도에서도 경기도고시 제 462 호로 공원해제를 고시했다.
'95년 전면적인 지방자치의 실시로 민선시장체제가 출범하면서 선거 때마다 유원지 정비 및 개발계획은 주요 공약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는 바, 이 때부터 유원지개발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한 양태는 '96년 말 안양유원지를 그린벨트지역 내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하면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고, 이어서 안양시청 내 유원지개발기획단이라는 상설기구를 설치하여 유원지 개발을 위한 실천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96년에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의뢰해서 만든 '안양시 산업발전계획'에 유원지개발계획이 들어 있었으나 실시되지는 않았고, 또한 국토연구원에 발주하여 올 8월이면 발표되는 '안양비전 21'에도 8개 과제 중의 하나로 안양유원지 개발계획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안양시에서도 이미 유원지 개발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어느 정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종의 계획이 하나로 어우러져 내실 있고 짜임새 있는 유원지개발계획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과 유원지주변의 풍부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는 유원지개발이 이루어져,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놀이 및 휴양시설을 갖춘 유원지로 거듭 나길 바라마지 않는다.
자료제공 : 변 원신 (안양시 고충처리위원장, 안양3동 마을금고 이사장)
김 지석 (안양시 향토사료실 상임위원)
대 담 : 윤 현 수(안양시 복지환경국장, 유원지개발기획단장)
참고문헌 : 이 용구, "양짓마을 까치소리", 세종인쇄사, 1991.
시흥군, "금천지", 1950.
안양시, "안양문화유적총람", 1996. 외
2003-06-07 12: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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