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수리산은 안양시의 진산(鎭山)으로 시 서쪽에 높이 솟아 관악산 및 모락산과 더불어 안양을 감싸안고 있으며, 예로부터 안양을 보호하는 주산(主山)으로 안양사람들이 마음을 의탁하던 명산이다.
수리산은 태을봉(488m), 슬기봉(451m), 관모봉(426m) 및 수암봉(395m) 등과 같은 영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 정상에 오르면 군자 앞 바다와 소래 염전 및 인천, 수원의 시가지까지 볼 수 있다. 또한 수리산 자락에서 솟아나는 물은 계류이거나 샘물이거나 모두 수질이 좋아 섬유산업과 제지산업이 안양에서 일어나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군포시와 안산시와 함께 수리산을 공유하고 있는 안양시는 수리산의 전체면적 3,099㏊ 중 약 44%에 달하는 면적을 점유하고 있는 관계로 34%의 군포시를 제치고 3개시 중 제1의 수리산 점유율을 나타내고 있다.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 중환(李 重煥, 1690-1756)은 당쟁으로 벼슬을 잃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보낸 기록을 택리지(擇里誌)라는 인문·지리서를 통해서 남겼는데, 그 내용 중 수리산에 대한 기록이 있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충주의 서쪽은 경기도 죽산, 여주와 경계가 닿아 있다. 죽산의 칠장산은 경기도와 호서의 경계에 우뚝 솟았는데, 서북쪽으로 뻗치다가 수유현에서 크게 끊어져 평지가 된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 용인의 부아산이 되고, 또 석성산과 광교산이 된다.
광교산 서북쪽에서는 관악산이 되었다가, 곧바로 서쪽으로 가 수리산(修李山)이 되면서 바다로 스러진다.”고 하면서 수리산이 백두대간에서 파생한 광주산맥의 한 자락임을 밝히고, 아울러 수리산(修里山)을 또 다른 이름으로 수리산(修李山)으로도 불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택리지는 수리산이 서쪽으로 완만한 산세와 너른 품을 펼치고 있어서, 강화도의 마니산에서부터 당진 앞 바다의 대부도에 이르는 서해로 뻗어나간 산이나 섬들이 모두 수리산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산(山) 서쪽으로 간 가장 짧은 줄기가 안산 바닷가에서 멈추었고, 예로부터 서울 재상들의 조상묘소가 이 줄기에 많다고 하면서 수리산 자락에서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안양 쪽에서 본다면 수리산에서 동북방향으로 뻗어 내린 가파른 구릉지에 잇대어 있는 곳이 바로 안양 만안지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지역이 가파른 구릉지로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경작할 논밭이 적었던 안양리나 양지마을 및 장내동 등의 자연부락들은 농경사회였던 19세기까지는 넓은 달안들을 배경으로한 호계동이나 귀인마을에게 지역중심지를 양보해야만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안양역사가 개설되고 국도 1호선이 또한 안양리를 지나가면서 산업화가 시작되자 농경사회의 중심지인 호계리에서 물류, 유통의 중심지요 시흥군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안양리로 자연스럽게 지역의 중심이 옮겨오게 되었다.
그리고 안양리 배후의 진산인 수리산의 지역내의 비중도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평촌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안양의 중심기능이 다시 평촌으로 옮겨가고 만안지구의 상대적 낙후성이 부각되고 있는 현실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도심기능의 변천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리산은 또한 관악산과 연결되는 역사적인 군사전략상의 요충이기도 하다. 특히 1.4후퇴로 평택, 여주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을 눈앞에 두고 수리산과 관악산 및 모락산을 잇는 방어진지를 구축한 북한군에 대하여 치열한 공세를 펼쳤는데, 최근 국방부 산하 전사편찬연구소가 간행한 '한국전쟁사'에 그 내용이 자세히 정리되어 나왔다.
당시 북한군 8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수리산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는 주로 터키여단이 담당했다. 1951년 1월 29일 수리산 서남단에서 시작된 공격부터 약 1주일간 터키여단은 올려다보며 싸우는 지형지세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용감하게 싸워 산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2월 3일, 미 제 25사단 35연대가 수행한 수리산 정상 탈환작전에서는 미군이 성공적으로 태을봉과 관모봉을 되찾도록 도왔다.
이 전투의 승리는 당시 안양을 점령하고 있던 중공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지리상의 이점을 제공했고, 이어 2월 12일에는 관악산 마저 탈환하는 교두보가 되어 국군이 한강으로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용맹을 떨친 한국전쟁 참전 터키여단의 병력 수는 연인원 약 1만 5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이 20대 초반에 참전했다해도 모두 70대의 노인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무공을 드날린 터키여단 장병들과 안양지역 전투에 참전했던 미 제 25사단 참전용사들 중 일부나마 초청하여 당시의 은공에 보은하는 잔치를 계획해 보는 것은 어떨까.
환영행사에 참석한 노병들에게 그들이 50년 전 이름 모를 산하와 국민들을 위해 대가없이 싸워 흘린 피의 의미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감사와 보은의 박수로 답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수리산은 태을봉(488m), 슬기봉(451m), 관모봉(426m) 및 수암봉(395m) 등과 같은 영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 정상에 오르면 군자 앞 바다와 소래 염전 및 인천, 수원의 시가지까지 볼 수 있다. 또한 수리산 자락에서 솟아나는 물은 계류이거나 샘물이거나 모두 수질이 좋아 섬유산업과 제지산업이 안양에서 일어나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군포시와 안산시와 함께 수리산을 공유하고 있는 안양시는 수리산의 전체면적 3,099㏊ 중 약 44%에 달하는 면적을 점유하고 있는 관계로 34%의 군포시를 제치고 3개시 중 제1의 수리산 점유율을 나타내고 있다.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 중환(李 重煥, 1690-1756)은 당쟁으로 벼슬을 잃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보낸 기록을 택리지(擇里誌)라는 인문·지리서를 통해서 남겼는데, 그 내용 중 수리산에 대한 기록이 있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충주의 서쪽은 경기도 죽산, 여주와 경계가 닿아 있다. 죽산의 칠장산은 경기도와 호서의 경계에 우뚝 솟았는데, 서북쪽으로 뻗치다가 수유현에서 크게 끊어져 평지가 된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 용인의 부아산이 되고, 또 석성산과 광교산이 된다.
광교산 서북쪽에서는 관악산이 되었다가, 곧바로 서쪽으로 가 수리산(修李山)이 되면서 바다로 스러진다.”고 하면서 수리산이 백두대간에서 파생한 광주산맥의 한 자락임을 밝히고, 아울러 수리산(修里山)을 또 다른 이름으로 수리산(修李山)으로도 불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택리지는 수리산이 서쪽으로 완만한 산세와 너른 품을 펼치고 있어서, 강화도의 마니산에서부터 당진 앞 바다의 대부도에 이르는 서해로 뻗어나간 산이나 섬들이 모두 수리산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산(山) 서쪽으로 간 가장 짧은 줄기가 안산 바닷가에서 멈추었고, 예로부터 서울 재상들의 조상묘소가 이 줄기에 많다고 하면서 수리산 자락에서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안양 쪽에서 본다면 수리산에서 동북방향으로 뻗어 내린 가파른 구릉지에 잇대어 있는 곳이 바로 안양 만안지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지역이 가파른 구릉지로 이루어져 상대적으로 경작할 논밭이 적었던 안양리나 양지마을 및 장내동 등의 자연부락들은 농경사회였던 19세기까지는 넓은 달안들을 배경으로한 호계동이나 귀인마을에게 지역중심지를 양보해야만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안양역사가 개설되고 국도 1호선이 또한 안양리를 지나가면서 산업화가 시작되자 농경사회의 중심지인 호계리에서 물류, 유통의 중심지요 시흥군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안양리로 자연스럽게 지역의 중심이 옮겨오게 되었다.
그리고 안양리 배후의 진산인 수리산의 지역내의 비중도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평촌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안양의 중심기능이 다시 평촌으로 옮겨가고 만안지구의 상대적 낙후성이 부각되고 있는 현실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도심기능의 변천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리산은 또한 관악산과 연결되는 역사적인 군사전략상의 요충이기도 하다. 특히 1.4후퇴로 평택, 여주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을 눈앞에 두고 수리산과 관악산 및 모락산을 잇는 방어진지를 구축한 북한군에 대하여 치열한 공세를 펼쳤는데, 최근 국방부 산하 전사편찬연구소가 간행한 '한국전쟁사'에 그 내용이 자세히 정리되어 나왔다.
당시 북한군 8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수리산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는 주로 터키여단이 담당했다. 1951년 1월 29일 수리산 서남단에서 시작된 공격부터 약 1주일간 터키여단은 올려다보며 싸우는 지형지세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용감하게 싸워 산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2월 3일, 미 제 25사단 35연대가 수행한 수리산 정상 탈환작전에서는 미군이 성공적으로 태을봉과 관모봉을 되찾도록 도왔다.
이 전투의 승리는 당시 안양을 점령하고 있던 중공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지리상의 이점을 제공했고, 이어 2월 12일에는 관악산 마저 탈환하는 교두보가 되어 국군이 한강으로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용맹을 떨친 한국전쟁 참전 터키여단의 병력 수는 연인원 약 1만 5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이 20대 초반에 참전했다해도 모두 70대의 노인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무공을 드날린 터키여단 장병들과 안양지역 전투에 참전했던 미 제 25사단 참전용사들 중 일부나마 초청하여 당시의 은공에 보은하는 잔치를 계획해 보는 것은 어떨까.
환영행사에 참석한 노병들에게 그들이 50년 전 이름 모를 산하와 국민들을 위해 대가없이 싸워 흘린 피의 의미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감사와 보은의 박수로 답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2003-06-07 13: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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