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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진]1970년대 말 안양 관악역앞 만안로 이전 공사

타임머신/옛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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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석수2동 국철 1호선인 관악역(冠岳驛. 석수2동 241)에서 안양역(남쪽) 방향으로 본 동네 풍경이다. 사진 우측 뒷쪽으로 보이는 큰건물이 당시 신상옥 역화감독이 운영하던 영화촬영소인 신필름(현재 안양로 532번길 현대아파트)이다. 큰 건물 2동중 왼쪽옆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학교로  안양영화예술학교(현재 안양로 510번길 무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속 풍경은 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으로 수도권 전철1호선이 개통(1974년)한 이후 전철옆을 지나는 만안로(옛 국도 1호선)의 석수동 안양육교( 현 연현오거리)에서 안양유원지 입구인 안양교 사거리까지의 곡선 도로 선형을 직선화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사진 좌측 전봇대옆 긑자락에 보이는 가로수가 서 있는 방향이 사진 우측으로 오면서 동네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음을 보면 알듯이 당시 도로는 안양유원지 입구에서 만안교(옛 고려석면 공장앞- 현재 영화아이닉스아파트)에서 삼성교를 지난후 도로 선형이 좌측으로 걱어지면서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해 현 석수주유소 삼거리에서 철길을 따라 이어지다 안양육교(1960년대 중반까지 땡땡땡 철길)를 건너 시흥(현 금천구)쪽으로 이어졌다. 

현재 안양시내(현 만안구)를 남북으로 관통해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만안로, 안양로, 경수대로 등 3개 도로가 있으나 1970년 중반 까지만 하더라도 2차선의 만안로(당시 국도 1호선) 하나밖에 없었다.  

 

안양 석수2동에 대한 이야기

석수2동은 동(東)으로 석수1동, 서(西)로 석수3동, 남(南)으로 박달동, 북(北)으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동 및 광명시 일직동과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취락으로 꽃챙이(花倉洞). 벌터(坪洞), 신촌(新村), 연현(鳶峴) 등이 있다.
안양 서북단에 위치한 석수2동은 지금의 안양육교 일대가 예전에는 산세가 높고 후미진 곳이어서 서울로 가는 과객이나 보부상 등이 이곳을 지나치자면 산적이나 강도들에게 수난을 겪을만큼 험준한 곳이었으나 구 한말에 경부선의 철도부설로 고개가 낮추어졌고, 이어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교통의 편리로 점차 취락이 발달되기 시작한다.
특히 안양육교는 1905년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5일 후인 동년 11월22일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안양출신 원태우(元泰祐) 지사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명시 일직동과 접경한 벌터마을은 1960년대 초에 경기도종축장이 들어서면서 폐동되었으나, 경기도종축장이 1970년대에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전되자 폐허화 되었으며, 안양천변과 만안로변에 자리잡은 신촌은 1956년 수도영화사에 의해 안양촬영소가 설치되어 한 때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본 고장으로 각광을 받던 곳이다. 또 꽃 재배지로 유명했던 꽃챙이 마을은 아파트단지와 주택지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었다.
석수동(石水洞)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쌓인 안양유원지 일대에 석 (石工)이 많아 石手洞이라 하였으나, 1932년 안양풀(과거 안양유원지 - 현 안양예술공원)에 개설된 수영장이 石水洞水泳場 으로 불리면서 石手가 石水로 바뀌게 된다.

 

영화의 산실이었던 안양영화촬영소에 대해 좀더 알아볼까요.

안양하면 교과서에도 실렸던 안양포도가 유명했다. 또 안양하면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안양 석수2동에는 1960년대 동양최대의 종합영화촬영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4년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를 안양시 석수동에 설립한다. 당시 기공식에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로 대단했던 이 촬영소는 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며 3만평의 대지 위에 각각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촬영, 현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을 일괄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동양 최대의 시설이었다.
그러나 수도영화사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신상옥 감독이 1966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한 후 신필름(신필림)을 이름을 바꿔 1970년대 중반까지 15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등 충무로의 패왕으로 군림한다.
신상옥(1925년생)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작자, 감독, 촬영기사였다. 경성중학교와 일본의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후 1952년에 ‘악야(惡夜)’로 감독 데뷰했다.
그가 신필름에서 제작한 영화를 보면 젊은 그들(1956), 무영탑(1957), 연산군(1961·제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제1회 대종상감독상 수상), 성춘향(1961), 빨간 마후라(1964), 벙어리 삼룡이(1964)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들이 무수히 제작됐다.
신필름의 등장은 한국영화 중흥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당시 신필름이 소유하고 있던 촬영소는 2개의 스튜디오(320평), 2개의 녹음실(178평), 편집실(88평), 영사실(12평) 등을 갖추고 있었고, 부설 연기자 양성기관까지 마련해 두고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등 신필림의 전속배우들이 직접 배우양성에 나섰고 신성일, 태현실 등 1970년대 주로 활동했던 영화배우들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연기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 최대의 영화사로 당시 정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지원을 받아오던 신필림은 「장미와 들개」(1975년)영화 개봉을 앞두고 사전 검열에서 삭제된 내용 3초짜리를 예고편에 집어넣어 상영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해 재정난을 겪기 시작했다.
그 짧은 3초 때문에 20년에 가까운 연륜의 거대한 영화사 신필름이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 신 필림은 회사규모를 줄인뒤 안양영화주식회사로 개명하고 전성기로의 복귀를 꾀해왔으나 재정난에 화재까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던 중, 1978년 그의 부인인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으로 납치된 이후 신 감독 또한 북으로 넘가면서 신 필림은 문을 닫고 촬영소 부지는 매각돼 현재 관악현대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또 석수2동에는 국내 최초의 영화전문교육기관이 있었다. 파란곡절의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1966년 신필름 옆에 세운 영화전문교육기관 '안양예술학교'으로 1978년 1월14일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이후 문을 닫았으며 현재 이 자리에는 무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1980년 안양3동에 안양예술고등학교 개교하고 문을 닫은 안양예술학교 출신들과 동문회 등으로 연을 이어건다. 우연하게도 이 학교 교장의 성함이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같다. 그러다 보니 안양예고를 영화배우 최은희씨 연관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안양예고 재단과 영화배우 최은희씨와는 관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