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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그림]시흥환어행렬도에 그려진 의왕 사근행궁

안양똑딱이 2019. 4. 2. 04:17

 

조선 시대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년)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서울 창덕궁에서 아버지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 현릉원까지 약 60㎞.의 길로 13번의 원행길에 나섰다.

원행길에는 임금이 잠시 들러 머물던 곳 행궁(行宮·임금이 지방에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곳)이 있었는데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은 화성행궁을 비롯 노량행궁, 과천행궁, 시흥행궁, 안양행궁, 사근행궁, 안산행궁 등이 있었다.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해 숭례문, 노량진, 용양봉저정을 거쳐 남태령을 넘고 과천행궁에 머물렀다가 군포로 진입하는 '과천길'을 이용하다가 환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원행에 나섰던 1795년을 기점으로 창덕궁에서 시흥행궁과 대박산과 만안교를 건너고 안양행궁을 거쳐 군포로 들어가는 '시흥길'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과천길은 연로한 어머니와 행렬이 지나가기에 지형이 협소하고 언덕이 많았다. 대신 넓고 평탄한 시흥길이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 길은 이후 1번국도이자 만안로이며 시흥대로이다.  

정조는 시흥길을 지나며 시흥행궁과 안양행궁, 사근행궁 등에 머물다 간 것으로 전해지지만 아쉽게도 이들 행궁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만다.

금천구청이 발간한 '시흥행궁 복원 및 활용을 위한 학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관련 사료가 거의 없다 보니 시흥행궁이 현재 금천구 시흥동 일대에 자리했을 거라는 추측만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안양행궁도 안양1번가 상가 건물앞에 '안양행궁지'라는 작은 표지석으로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표지석이 있는 곳에 큰 기와집이 있었고 '대궐터'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안양4동 담안(중앙성당 인근) 등을 얘기하는 등 안양행궁의 정확한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안양행궁이 없어진 이유로는 시흥행궁에 불이 나서 이를 보수하는데 안양행궁 자재를 갖다 쓰면서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또한 기록이 없어 사실이라 말할수 없다.

그나마 위치가 확실한 것은 사근행궁이다. 사근천이 흐르는 옆에 자리한 사근참행궁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한양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가는길목이자, 과천길과 시흥길, 안산길의 갈림길로 교통의 요지로 역대 왕들이 자주 이용했다.  

기록을 보면 현종(재위 1659∼1674)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 온천을 자주 다녔는데, 이때마다 이곳에 머무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원행에 나선 1795년에는 사근행궁에서 함께 식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근행궁은 일본 강점기인 1937년 3월까지 의왕면사무소로 사용되면서 기와지붕 모습으로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수원군 일형면과 의왕면이 통합돼 일왕면이 설치되면서 수원에 면사무소가 새로 짓는데 이때 사근행궁은 새 면사무소를 짓는데 돈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일왕면협의회 결의를 거쳐 철거되고 만다.

당시 면협의회 기록을 보면 의원 중 한 명이 "전 의왕면사무소(사근행궁)는 조선 시대 행궁이므로 고적(古蹟)으로 보존하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제시했으나 의장인 면장은 "유지가 곤란하다. 매각 외 방법이 없다"고 반대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사근행궁터에서 기단으로 쓰인 돌과 기와들이 일부 수습됐지만, 이후 방치되다가 인근에 택지가 들어서면서 아예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현재 사근행궁터였던 의왕시청별관 입구에는 지역유지 모임인 백운회에서 1989년에 세운 사근행궁터비의 존재가 이곳이 과거 임금들이 머물던 행궁터 였음을 전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의왕시의 고천동지역 재개발 계획에 의해 사근행궁터 일부가 새 도로에 포함되어 남아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