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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55]안양2동 좋은집.석수지구대(2014.09.13)

안양똑딱이 2018. 8. 4. 18:10

 

[탐사55]안양2동 좋은집.석수지구대 주변
2014.09.13/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탐사대 #안양2동 #55차 #기독보육원 #해관보육원 #좋은집 #근대문화유산 #나혜석/ 안양기억찾가탐사대가 여름방학을 끝내고 후반기 첫 탐사를 통해 다시 골목 탐사에 나섰네요. 장소는 안양2동 경수산업도로의 관악장애인종합복지관 앞 육교에서 출발하여 안양예술공원 사거리까지의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주변 동네로 동네 한쪽에는 5년째 재건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아파트들이 있는데 빈집의 유리창은 깨지는 등 삭막한 가운데 일부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네요. 골목길에는 유난히 예쁜 대문을 가징 집들이 있고요, 화초를 마름답게 가꾼 집들도 보입니다.
이날 돌아온 지역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안양유원지 가는 길 열으로 포도밭이 있던 곳이지요.

 

근대문화유산 숨어있는 좋은집

안양시 안양2동 안양천변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처음 설립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입니다. 이곳에는 1930~1950년대 지어진 옛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복지시설 좋은집은 한국인 최초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운영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해방 후 한국 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의사 면허 보유자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오긍선 박사가 설립한 복지시설이지요.
1918년 12월 어느 날 세브란스병원에 7명의 고아가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서 시작한 경성고아원(1922년 재단법인 경성보육원으로 개칭)은 1936년 9월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은집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안양 기독보육원 자리는 일제 강점기 드넓었던 일본인 소유의 오끼 농장중 일부로 경시기독보육원 설립자인 오긍선 박사가 8만평을 매입해 원아 숙소와 농장 등을 지으면서 터를 잡았는데 6.25전쟁으로 경남 가덕도로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와 1954-56년 무렵 미군과 선교사 등의 지원 등을 받아 숙소를 짓고 다시 둥지를 틀었지요.
1960년대 말경에는 기독보육원 일부가 매각돼 1974년에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와 양명여고가 개교했는데 지금도 양명고 뒷쪽에는 1950년대 주한미군이 보육원에 지어준 의무실과 사무실, 예배당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목조 건물로 지어진 예배당은 1960년대 안양사람들의 결혼식장 등으로도 이용되기도 했는데 1980년대 초 철거된 후 그 자리에 학교 테니스장이 들어서 지역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사라져 아쉽기만 합니다.
한편 기록을 보면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집과 바로 옆의 양명고(과거 기독보육원 땅) 자리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오끼이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토호 오끼이는 1930년대 안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안양2동 대부분이 그의 농장이었을 정도로 그 면적 어마어마 했다고 합니다. 과거 안양포도가 유명했는데 사실, 오끼이,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를 갖고 있지요.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기원의 묘가 좋은집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 대동보에 「과천 서이면 안양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비산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씨 문중에 따르면 1930년대 경성보육원(현 안양기독보육원) 공사 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분묘이장공고까지 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자 당시 보육원 측에서 이장했는데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재일교민 시사정보지 [아리랑] 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긍선(경성기독보육원 설립자)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