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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51]안양 석수2동 만안교 주변 동네(204.06.14)

안양똑딱이 2018. 8. 3. 15:19

 

[탐사51]석수2동 만안교 주변 동네
2014.06.14/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탐사대 #석수2동 #만안교/ 제51차 탐사로 찾아간 곳은 안양 석수2동 여섯번째 여정으로 이날 탐방 코스는 석수전화국앞버스정류장-석수전화국-석천로-안양로468번길-석천로198번길-경일아파트-석천로212번길-석천로-석천로197번길-석수2동주민센터-안양로500번길-석천로211번길-만안교-끝
석수2동은 동(東)으로 석수1동, 서(西)로 석수3동, 남(南)으로 박달동, 북(北)으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동 및 광명시 일직동과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취락으로 꽃챙이(花倉洞). 벌터(坪洞), 신촌(新村), 연현(鳶峴) 등이 있습니다.
안양 서북단에 위치한 석수2동은 지금의 안양육교 일대가 예전에는 산세가 높고 후미진 곳이어서 서울로 가는 과객이나 보부상 등이 이곳을 지나치자면 산적이나 강도들에게 수난을 겪을만큼 험준한 곳이었으나 구 한말에 경부선의 철도부설로 고개가 낮추어졌고, 이어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교통의 편리로 점차 취락이 발달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안양육교는 1905년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5일 후인 동년 11월22일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안양출신 원태우(元泰祐) 지사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광명시 일직동과 접경한 벌터마을은 1960년대 초에 경기도종축장이 들어서면서 폐동되었으나, 경기도종축장이 1970년대에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전되자 폐허화 되었으며, 안양천변과 만안로변에 자리잡은 신촌은 1956년 수도영화사에 의해 안양촬영소가 설치되어 한 때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본 고장으로 각광을 받던 곳입니다. 또 꽃 재배지로 유명했던 꽃챙이 마을은 아파트단지와 주택지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었지요.
석수동(石水洞)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쌓인 안양유원지 일대에 석 (石工)이 많아 石手洞이라 하였으나, 1932년 안양풀(과거 안양유원지 - 현 안양예술공원)에 개설된 수영장이 石水洞水泳場 으로 불리면서 石手가 石水로 바뀌게 됩니다.
이날 석수2동 만안교 주변 동네는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고, 골목길 이곳저곳에는 서너명의 할머니들이 모여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정겹기만 합니다.

 

만안교에 대해 알아볼까요.
만안교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虹霓石橋)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38호입니다.
정조 임금은 1789년 아버지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모두 13번에 걸쳐 화성을 방문하는 능행 거둥길(임금의 나들이길)에 나서 처음에는 남태령과 과천을 지나 안양의 인덕원을 지나는 과천로를 이용하다가 즉위 20주년을 맞는 1795년 6차 원행부터 시흥과 안양 석수동을 거쳐 구 군포사거리를 지나는 시흥로(현 만안로)를 이용합니다.
당초의 참배 행렬은 궁궐을 떠나 용산에서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고 노량진, 과천, 수원을 경유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다리가 많고 남태령이라는 험한 고갯길이 있어 행차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 과천에 영조를 부추켜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묘가 있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시흥 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여 안양을 지나가게 된 것이요.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으로 안양천에는 원래 다리가 없었습니다. 왕의 행차 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화성으로 원행를 떠날 무렵 안양천을 편히 건너도록 하기위해 만안교를 축조했다고 전해집니다.
1795년(정조 19년) 당시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전국의 석수쟁이들을 불러 모으고 인근 삼성산 일대의 돌을 채취하여 단 3개월의 공역 끝에 길이 31.2m, 너비 8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깔아 축조한 돌다리를.완성합니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는 만안교는 홍예가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며 만안교처럼 홍예가 7개인 다리는 만안교가 유일합니다.
다리 앞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쓴 만안교비가 있는데 만안교의 이름 또한 정조가 직접 지었다고 합니다. 만안교의 의미는 만년 동안 백성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즉 만안교는 왕이 효를 행하되, 만백성이 또한 고루 이로움이 있게 지은 다리라고 볼 수 있지요.
정조 임금의 원행은 대단했습니다. 1795년 정조 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화성으로 떠난 능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보면 5천여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동행한 사람은 1807명이고 말이 796필이었으며, 행차의 전 과정에 동원된 사람은 5661명, 말이 1417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 분들이 잘 알지 못하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현재의 만안교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원래 만안교는 안양예술공원 지하차도 들어가는 교차로에서 서울방향으로 약 20미터 지점(현 영화아파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번 국도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 약 200미터 북쪽의 안양시 석수동 260번지 석수교회앞 삼막천 위로 옮겨 다시 축조한 것이지요. 1972년에 촬영한 기록 사진을 보면 당시에는 교각의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고, 다리위에 난간이 추가 설치돼 변형됐음을 보여주는데 현재의 다리보다 더 길었습니다.
제 어릴적 기억으로 과거 기존 만안교 다리 뒷쪽으로 하얀 건물의 공장(주, 벽산 창고)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만안교가 안양천을 건너기 위해 놓여졌을텐데, 현재의 안양천 물줄기와 맞지를 않는다는 점이지요. 안양천 물줄기가 언제 바뀌었는지 앞으로 연구해야 할 숙제입니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다리 축조의 중요성을 지닌 만안교를 무지몽매하게 이전함으로 역사적 현장을 훼손한 것은 너무 안타깝기만 합니다. 만안교가 놓여져 있는 원래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길가 담벼락에 자그마한 표지석 하나가 놓여져 있습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시에는 왕의 숙박과 휴식을 위해 '행궁'을 짓기도 했다. 현재의 안양역 인근인 안양1번가 골목길에는 안양행궁이 있었는데 현재 그 터 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아주 자그만한 표지석만이 놓여져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