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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53]안양 석수2동 관악역 주변 동네(2014.07.13)

안양똑딱이 2018. 8. 4. 13:35

 

[탐사53]석수2동 관악역 주변 동네
2014.07.13/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탐사대 #석수2동 #53차 #관악역 #1번국도 #안양로 #만안로/ 안양기억찾기탐사대 제53차 탐사 여정으로 찾아간 곳은 안양 석수2동 관악역 뒷편으로 안양시내를 관통하는 안양로와 만안로가 만나는 삼각주 형태의 동네입니다.
1950년대 말 바로 옆에는 안양영화촬영소, 1번국도와 철길, 삼막천 건너편에는 미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던 관계로 안양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동네이다 보니 오밀조밀한 옛 골목길도 있고,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의 기와지붕을 얹은 옛 주택도 있고 관악역사 뒷편으로는 허스름한 건물에 석수다방, 무지개다방과 색이 바랜 간판들이 보이고 역사 또한 오래된 연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골목길 이곳 저곳에는 예쁘게 텃밭도 있고요. 특히 이 동네에는 광장격인 오거리 골목길이 있는데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골목에서 마주 보이는 집들 대문 앞에 화분들이 놓여져 있고 집 가림막 효과까지 나타내 아이디어가 돋보이기도 합니다.

이날 탐사 코스는 안양로 관악역버스정류장-일우아파트-동아제약물류창고-송임아파트-안양로532번길-관악치안센터-안양로548번길-안양로532번길-안양로570번길-대진아파트-안양로-석수주유소삼거리-만안로-관악역-안양로532번길-끝

 

신촌(新村) - 석수2동
관악역(冠岳驛) 서쪽으로, 만안로(萬安路) 노변(路邊) 옆에 있는 마을.

조선조 말엽까지만 해도 대부분 농경지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새로 주택이 들어서자 「新村」이라 칭했다. 이곳은 1956년 7월에 수도영화주식회사(首都映畵株式會社)에 의해 대규모 촬영소인「안양촬영소」(대지 2만2천여평)를 건설하여 한국의「허리우드」로 불리워질 만큼 한 때는 한국영화의「메카」(Mecca)였었다. 천연광선이 충분하고 우량(雨量)이 적은 곳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이곳을 적지(適地)로 택하게 된 것이다. 신촌마을은 1956년 수도영화주식회사가 설치된 후, 안양예고 등의 교육기관과 1974년 관악전철역이 건설되자 관악아파트, 무림아파트, 산정연립 등이 건립되어 급격한 성장 추세를 보였다. 이곳에는 안양문화의 상징인 만안교(萬安橋)가 1980년대에 이전, 복원되었다.

석수2동은 동(東)으로 석수1동, 서(西)로 석수3동, 남(南)으로 박달동, 북(北)으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동 및 광명시 일직동과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취락으로 꽃챙이(花倉洞). 벌터(坪洞), 신촌(新村), 연현(鳶峴) 등이 있습니다.
안양 서북단에 위치한 석수2동은 지금의 안양육교 일대가 예전에는 산세가 높고 후미진 곳이어서 서울로 가는 과객이나 보부상 등이 이곳을 지나치자면 산적이나 강도들에게 수난을 겪을만큼 험준한 곳이었으나 구 한말에 경부선의 철도부설로 고개가 낮추어졌고, 이어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교통의 편리로 점차 취락이 발달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안양육교는 1905년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5일 후인 동년 11월22일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안양출신 원태우(元泰祐) 지사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광명시 일직동과 접경한 벌터마을은 1960년대 초에 경기도종축장이 들어서면서 폐동되었으나, 경기도종축장이 1970년대에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전되자 폐허화 되었으며, 안양천변과 만안로변에 자리잡은 신촌은 1956년 수도영화사에 의해 안양촬영소가 설치되어 한 때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본 고장으로 각광을 받던 곳입니다. 또 꽃 재배지로 유명했던 꽃챙이 마을은 아파트단지와 주택지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었지요.
석수동(石水洞)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쌓인 안양유원지 일대에 석 (石工)이 많아 石手洞이라 하였으나, 1932년 안양풀(과거 안양유원지 - 현 안양예술공원)에 개설된 수영장이 石水洞水泳場 으로 불리면서 石手가 石水로 바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