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최병렬]안양은 한국 영화의 산실이자 메카였다(2017.03.20)

안양똑딱이 2017. 3. 20. 00:20

 

안양하면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1960년대 안양시 석수동에 자리했던 동양최대의 종합영화촬영소인 안양영화촬영소가 한국 영화사에 있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헐리우드로 불리워질 만큼 근대 한국영화의 메카로 지역사 연구는 물론 한국영화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1954년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를 안양시 석수동에 설립한다. 당시 기공식에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로 대단했던 이 촬영소는 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며 3만평의 대지 위에 각각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 수중촬영장 등을 갖추고 촬영, 편집, 현상, 미술, 음악, 사진, 소품, 분장 등 모든 분야의 제작이 가능한 시설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첨단 영화기계를 도입해 명실상부한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 최대의 촬영소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영화의 부흥과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시대를 여는 중심이었던 수도영화사는 당시 웨스트렉슨 사운드 시스템 일체와 미국의 미첼영화촬영기 3대를 도입해 우리나라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이강천 감독이 김말봉 원작의  '생명'을 시작으로 홍일명 감독의 ‘꽃도 생명이 있다면’ 촬영 이후 안양촬영소 음향이 좋다는 소문과 함께 제작이 늘면서 1980년까지 약 8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됐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당시 흥행감독이었던 신상옥 감독이 1963년 안양촬영소의 인수를 추진한다. 그는 명칭을 신필름(신필림)으로 바꿔 1966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15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등 충무로의 패왕으로 군림한다.
신상옥(1925년생) 감독은 함경북도 청진 출생으로 영화제작자, 감독, 촬영기사였다. 경성중학교와 일본의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후 1952년에 ‘악야(惡夜)’로 감독 데뷰했으며 2006년 타계한 한국영화계 '거장(巨匠)'이자 큰 별로 신상옥프로덕션, 서울 영화사, 안양영화, 신아영화, 신필림, 신필름 등 다양한 이름으로 통칭되어 온 '신필름'을 운영해 오는 등 한국 영화의 제작, 투자, 배급 등을 아우르는 영화 기업화의 모태였다.
그가 신필름에서 제작한 영화를 보면 젊은 그들(1956), 무영탑(1957), 연산군(1961·제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제1회 대종상감독상 수상), 성춘향(1961), 빨간 마후라(1964), 벙어리 삼룡이(1964)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들이 무수히 제작됐다.
신필름의 등장은 한국영화 중흥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당시 신필름이 소유하고 있던 촬영소는 2개의 스튜디오(320평), 2개의 녹음실(178평), 편집실(88평), 영사실(12평) 등을 갖추고 있었고, 부설 연기자 양성기관까지 마련해 두고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등 신필림의 전속배우들이 직접 배우양성에 나섰고 신성일, 태현실 등 1970년대 주로 활동했던 영화배우들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연기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안양에서는 신 감독 작품은 아니나 한양영화사의 권영순(1923-1992) 감독이 1962년 안양 일대 야산에 만리장성 세트를 지은 100분짜리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컬러 작품은 당대 톱스타 김진규ㆍ김지미ㆍ김승호ㆍ박노식 등이 출연한 대작이 촬영되기도 했다. 기록을 보면 5000 여명의 엑스트라와 세트장 건설, 출연자 의상비만도 엄청나 62년 당시 영화제작비 3500만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0억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되고 국도(서울)극장에서 개봉될 당시 당시 250만명이던 서울 인구중 8만여명이 이 영화를 봤다는 기록이다.
<씨네21>의 '50년 소품지기들, 충무로 소품사를 회고하다' 기사를 보면 영화관람료 70원 시절 엄청난 물량공세를 앞세운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영화가 시흥과 안양일대의 야산을 전부 야외세트로 뒤덮어 촬영됐다고 한다.
한국 최대의 영화사로 당시 정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지원을 받아오던 신필름은 「장미와 들개」(1975년)영화 개봉을 앞두고 사전 검열에서 삭제된 내용 3초짜리를 예고편에 집어넣어 상영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해 재정난을 겪기 시작했다.
그 짧은 3초 때문에 20년에 가까운 연륜의 거대한 영화사 신필름이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 신 필림은 회사규모를 줄인뒤 안양영화주식회사로 개명하고 전성기로의 복귀를 꾀해왔으나 재정난에 화재까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던 중, 1978년 1월 14일 그의 부인인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으로 납치된 지 6개월 후에 신상옥 감독 또한 북으로 가면서 주인 잃은 영화사는 1981년 문을 닫으며 안양영화 역사는 사라지게 된다.
현재 옛 안양영화촬영소 부지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관악현대아파트) 로 바뀌어 과거 한국영화의 산실이었던 영화촬영소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때 아파트 앞 도로를  '신필림로' 라 명명해 부르기도 했으나 새주소 체계로 바뀌면서 이 또한 없어지고 말았다.
 
신필름과 안양영화예술학교 그리고 현재의 안양예고 관계
 
석수2동에는 국내 최초의 영화전문교육기관도 있었다. 파란곡절의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1966년 신필름 옆에 세운 영화전문교육기관 '안양예술학교'다. 1966년 고교과정으로 정식인가를 받아 1967년 3월 1일 개교한 안양영화예술학교는 연기분야의 실기와 이론을 주로 가르쳤다. ‘신필름’은 용산에서 사무실을 운영할 때부터 신인배우 양성을 위한 ‘연기실’을 설치해 신인연기자를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노력을 계속했는데, 안양영화예술학교는 그 같은 과정을 제도화한 것이다.
초대 교장으로는 문교부 예술과장 출신인 남상영 씨가 맡았고 그 뒤를 이어 여배우이자 신상옥 감독의 부인인 최은희 씨가 1969년부터 납북되던 1978년까지 약 10년간 교장으로 재직했다. 하지만 이 학교는 1978년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이후 문을 닫았다. 현재 이 자리에는 무림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1981년 안양3동에 안양예술고등학교(현 안양예고) 개교한다. 우연하게도 이 학교 교장의 성함이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같다. 그러다 보니 안양예고를 영화배우 최은희씨 연관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욱이 안양예고 동문회가 안양영화예술학교 출신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보니 두 학교가 같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현 안양예고와 영화배우 최은희씨와는 관련이 없다.
안앙예술학교 연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6년 12월 31일 안양영화예술학교 설립인가(안양 석수동) / 1981문을 닫은 안양예술학교 출신들과 동문회 등으로 연을 이어간다. 년 1월 10일 안양예고 신축교사 기공(안양3동 산 42-1)/ 1982년 1월 14일 학교법인 연암학원 인가 / 1982년 12월 17일 안양예술고등학교 인가
 
안양시, 영화도시로 부활을 꿈꾸었으나 '일장춘몽'
 
안양시는 북으로 갔던 최은희. 신상옥 부부가 198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인 지난 2002년 시 소유 건물(안양8동의 옛 안양경찰서)을 성결대와 예술교육 실천을 위한 전략적 협정을 맺은 최은희.신상옥 부부에게 임대해 '안양신필름인스티튜드'를 개관하고 지난 2002년 11월 추억의 영화 회고전을 열면서 과거 한국영화의 영광과 부흥을 기대하면서 영화도시로의 부활을 꿈꾸었다.
당시 ‘아트 시티’를 표방하고 안양시의 문화적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 고심하던 신중대 안양시장은 신 감독 부부가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를 절호의 찬스로 여겨, 부산영화제에까지 내려가 그들을 만나고 ‘한국영화의 메카’로서의 꿈을 재현시키기에 합의했다.
이에 신 감독은 안양시와 공동으로 석수동 석산 일대의 '징기스칸' 촬영세트건설, 안양아트센터의 '셰익스피어극장' 운영계획, 영화박물관 건립 등을 구상하는 등 ‘영화도시 안양’의 재건을 위한 설계도는 참으로 웅대했었다.
당시 신필름아트센터와 산학협정을 맺은 안양 성결대는 연극영화학부를 신설하고 신상옥.최은희 부부를 명예교수로 위촉하기도 했으나 신필림아트센터는 입시 사설학원으로 전락하면서 특혜 시비가 불거지며 시의회와 시민사회의 비판과 더불어 운영난에 봉착하면서 문을 닫고 만다. 이는 안양시가 '아트시티 측면에서 과거의 영화도시적 후광을 되살리기 위해 신 감독 부부를 영입했으나 젊은 영화감독들이 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시대변화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영화도시로의 장기적인 종합계획 수립도 하지 않고 일을 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내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김정일의 영화고문 겸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직을 맡아 북한을 탈출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소금(1985), 심청전(1985), 불가사리(1985) 등 7편의 영화를 만드는 등 영원한 현역 영화 감독으로 머물고 싶어했던 신 감독은 2002년 '겨울이야기'를 만들었으나 개봉하지 못했으며 말년의 꿈이었던 '칭기즈칸' 역시 제작하지 못한 채 2006년 삶을 마감한다.
지난 2006년 4월 신상옥 감독이 타계하자 시인 김대규씨는 '아~신상옥 감독 !' 제목의 글에서 인생무상이라고는 해도 일국의 대감독·대스타의 말로가 이처럼 불행하게 되었다면 그 소재지의 시민들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 신상옥 감독 !'인 것이다. 내 자신의 역불급(力不及)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신필름로'라고 작명한 것으로 안양시.시민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라고 안타까운 연민을 피력했다.
지난 2004년 8월 17일에는 영화업에 종사하거나 영화를 사랑하는 20~30대 젊은이 30여명이 안양문예회관 국제회의장에 모여 안양 독립영화협회 창립식을 갖고 상업적 영화제와 차별화된 독립영화의 기치를 내세웠다. 이들은 2005년 제1회 안양변방(邊方)영화축제를 개최하여 350여편의 단편.독립영화가 응모해 31편의 본선 진출작과 안양영화촬영소 회고展을 안양시내 극장에서 상영했으나 2006년 2회 영화축제는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골목길에 자리한 다소 낯설고 자그마한 라이브공연장에서 초라하게 가진데 이어 3회 행사는 열리지도 못해 이들의 장미빛 영화 그림은 지워지고 말았다.
2011년에는 지역언론사가 대종상영화축제를 유치를 추진해 안양시가 2억원의 예산을 지원하는 등 8억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평촌중앙공원에서 행사를 개최했으나 정작 당초 홍보했던 전야제 대신 몇편의 한국영화 상영에 그치는 졸속 행사로 시민들로 부터 외면당해 예산만 낭비했다는 비난을 사는 등 안양시의 정책적 판단 오류는 계속돼 왔다.
 
 
안양 일대 야산이 온통 영화 세트장?... 불록버스터의 효시
 
우리나라도 엄청난 물량과 돈이 소요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촬영하고 개봉되며 그 효시라 할 수 있는 한편의 영화를 안양 일대의 야산을 온통 영화세트로 꾸며 찍었다는 당시 영화 소품스탭으로 활동한 원로 영화인의 증언이 나와 안양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씨네21 '50년 소품지기들, 충무로 소품사를 회고하다' 기사를 보면 영화관람료 70원 시절 엄청난 물량공세를 앞세운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영화가 시흥과 안양일대의 야산을 전부 야외세트로 뒤덮어 촬영됐다고 1960년대 소품 스탭으로 활동한 이들이 말한다.
 
 이들은 남양주종합촬영소에 있는 소품센터의 주인공인 차순하, 김호길, 이태우, 김태욱, 이예호 등으로 1960년대부터 소품 스탭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이들로 '한국영화 소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40년 동안의 충무로 소품사를 듣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이와관련 '씨네21'은 인터뷰는 '근대의 풍경-소품으로 본 한국영화사'(차순하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2001)를 참조해 이뤄졌음을 밝힌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1961년 충무로의 적벽대전이라 불리는 홍성기의 '춘향전'과 신상옥의 '성춘향'맞대결을 시작으로 영화계에는 사극 붐이 일어 '칠공주' '인목대비' '대심청전' 등 대형 사극들이 1962년 한해에 쏟아지고 당시 블록버스터는 곧 사극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특히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에 참여했다는 차순하의 말을 들어보자. "스케일은 당시에 최고로 컸지. 근데 소품을 어디서 빌려올 수가 없다고. 제작된 게 없으니 왕관이든 의상이든 투구든 깃발이든 다 만들어야 했어. 200명 이상 나오는 군중신 경우엔 난데없이 연락을 해오니 밤샘 작업을 해야 했지. 지금이야 다 기계로 하지만 그때는 다 손이었다고. 두꺼운 마분지를 여러 겹 풀칠해서 몇 백개의 투구 ‘가다’를 만들어놓고 잠깐 눈을 붙인 적이 있는데, 쥐새끼들이 나타나서 다 갉아먹는 바람에 낭패를 본 적도 있고."
이와관련 자료를 좀 더 찾아보았다.
안양 일대 야산을 만리장성 세트로 연결하여 찍은 영화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권영순(1923∼1992) 감독의 100분짜리 컬러 작품으로 1962년 당대의 톱스타인 김진규ㆍ김지미ㆍ김승호ㆍ박노식 등이 총 출연한 대작이며 당시 영화 관람료는 70원으로 확인된다.
권영순 감독은 192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56년 '옥단춘'으로 데뷔해 1981년 '사향마곡'에 이르기까지 25년간 50여편을 연출하고 통속시대극, 역사극, 코미디, 액션, 멜로,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팔방미인으로 소개된다.
특히 충무로에서 최고로 작업속도가 빠른 기능인으로 하루 밤낮에 120컷을 촬영한 날도 있었다는 조감독들의 증언과 함께 영상자료원은 지난 2002년 12월 9-13일 서울 서초동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권영순(1923∼1992) 감독 회고전을 개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좀 더 자료를 찾아 보았더니 아주 흥미로운 안양 영화사의 기록이 눈에 띤다.
2002년 12월21일자 [문화일보] "한국 블록버스터 효시는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기사에서 한양영화사가 당시 3500만원을 들여 만든 이 작품이 우리 영화사의 블록버스터 효시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200억원이 넘는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갔다는 것이다.
당시(2002년) 보도된 [문화일보]를 들여다 보자.
우리나라 영화 중 블록버스터의 효시는 어떤 작품일까. 영화진흥위가 지난 1월 발행한 연구보고서 '한국영화산업 구조분석'에 따르면 '쉬리'를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초 작품이라 했다. 하지만 '쉬리'가 우리나라 블록버스터의 효시는 아니다.
'쉬리'가 31억원의 제작비(마케팅비 포함)와 초특급흥행(전국관객 약 580만명)이라는 기록을 남긴데다 강제규 감독이 이 영화로 100억원이나 벌었으니 한국형 블록버스터 하면 팬들이 먼저 '쉬리'를 떠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연구가 정종화씨의 주장은 다르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영화의 전성기였어요. 그 당시에 지금의 블록버스터에 해당하는 영화가 여러편 있었는데 권영순 감독의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초대형작품이죠. 한양영화사가 3500만원을 들여 만든 이 작품을 우리 영화사에서는 블록버스터의 효시로 꼽고 있지요."
정씨는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은 돈을 많이 들여 캐스팅하고 화려한 볼거리로 영화를 치장하며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와 함께 개봉관을 대량 확보했다"며 "이 영화는 단기간에 관객을 흡입해 흥행 기세를 폭풍처럼 몰아가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 전략을 구사했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그 근거로 여러가지 자료를 제시했다.
1962년 추석 흥행을 목표로 제작된 이 영화는 김승호, 김진규, 신영균, 박노식, 허장강, 김희갑, 김지미, 이빈화, 윤인자 등 그 당시 스타가 총출연한 화려한 캐스팅에다 엄청난 물량을 투입해 만든 세트장 등 블록버스터의 요건을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중국 만리장성을 경기도 안양의 산에 재현해놓고, 서울 뚝섬의 한양영화사 스튜디오에 웅장한 진시황제의 왕궁 등 건물을 지어놓은 후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정씨는 "장수들이 벌이 는 스릴 넘치는 마차 경기가 마치 한국판 '벤허'를 보는 것 같 았다"고 회고했다.
5000여명의 엑스트라와 출연자 의상비만도 엄청났다고 한다. 정 씨는 "62년 6월10일 화폐개혁으로 100환이 10원이 되었죠. 그때 영화제작비 3500만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0억원이 넘을 것"이라며 "그후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만큼 많은 제작비를 들여 만든 대작은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50만명이었는데 국도(서울)극장에서 개봉돼 8만여명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후 흥행실패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을 제작한 한양영화사는 재정이 바닥나 64년 문을 닫고 말았다.
국내에서 상영된 외국영화와 방화의 제목만 대면 감독, 배우와 줄거리를 총알처럼 쏟아내 충무로에서 '움직이는 영화사전'으로 불리는 정씨의 이같은 주장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신일하 연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