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1주년을 맞아 ‘안양김중업박물관’의 역사성을 조명한다.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 조성현/ 김중업박물관 뮤지엄패밀리
KBS 대하사극 「정도전」이 지난해 6월 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안양시민의 일원으로서 사극에서 사료를 토대로 당시의 국가 왕실사찰인 '안양사(安養寺)'를 단 한번도 조명하지 않은 점은 여간 아쉬운 대목이다. 개혁을 주도하며 ‘역성혁명’의 과업완성으로 조선건국의 기틀을 다졌던 삼봉 정도전(鄭道傳)과 때로는 당여(同志)로 또는 정적(政敵)으로 얽히며 섥혀 함께했던 구도 속에서 드라마 속 주요등장 인물들이 문헌 속 ‘안양사’에 속속~ 등장한다. 드라마 정도전과 동시대를 함께 풍미하며 한때는 동지가 되고 상황이 바뀌면 역적이 되는 혼란과 격동기 속에서 드라마 속 주요인물들은 고려안양사와 관련된 흔적을 남겼다. 기록 속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로는 최영장군과 고려국왕인 우왕, 도은 이숭인, 조선 좌정승 하륜, 조선태종(이방원)으로 당대 고위인사인 실세들이다. 삼성산과 삼성천을 차경(借景)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과 같은 좋은 환경에 터 잡은 옛,유유부지의 김중업박물관 일원은 문헌 속 ‘고려안양사’가 역사적인 실체로 지역에 실존했던 지역으로 ‘극락(極樂)’과 같이 맘이 편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는 3월 28일부로 개관 1주년을 맞은 ‘안양김중업박물관’을 찾아 역사성과 정체성을 살펴본다.
여말 선초의 과도기, (목은)이색 문하생들의 엇갈린 정치적 행보
문인, 유학자, 사상가, 정치인으로 호가 삼봉(三峯, 三峰)인 정도전(鄭道傳)은 고려 말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 삼봉은 역성혁명을 꿈꾸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함께 조선조 건국을 주도하며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 반열에 오른다.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문하에 있던 인물이다. 이색(충숙왕15~태조5)은 1377년 공신으로 인정받아 고려 우왕(禑王, 1374∼1388재위)의 사부가 될 정도로 고려를 아낀 인물이다.
여말 선초의 과도기속에서 학문과 정치발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생들로 정치적인 선택과 입장은 달랐다.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 하륜(河崙), 윤소종(尹紹宗), 권근(權近) 등은 조선왕조 창업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KBS 사극 ‘정도전’ 속 등장인물과 고려안양사
KBS 인기 사극 '정도전' 의 시대적 배경인 여말~선초 왕조가 바뀌는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도 안양사(安養寺)는 실존하며 지역과 함께 했다.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 초입 ‘김중업박물관(고려안양사지박물관)’을 찾으면 안양사명문암키와('안양사'라고 적힌 기왓장), 전탑의 축소모형, 매장출토유물(와전류 등) 등 진열된 유물과 유구 및 전시된 사료 등을 통해 문헌 속 태조왕건(王建, 877~943)이 창건에 관여한 고려안양사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사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 말 최영(崔瑩)장군은 태조왕건이 세운 ‘안양사칠층전탑’을 중건했다.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禑王)은 안양사칠층전탑의 중수(重建)를 축하하며, 환관(內侍) 박원계(朴元桂)를 통해 축하물품으로 안양사에 향(香)을 하사했다. △이숭인(李崇仁, 陶隱, 1349~1392)은 그가 저술한 산문(散文)집인 도은집(陶隱集, 권4)속에 ‘금주안양사탑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를 글로 남겼다. ‘안양사탑중신기’는 태조왕건이 세운 칠층전탑의 중건(리모데링)과 관련된 일체의 기록이다. 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 최영장군이 전탑을 중건(보수) 후 준공행사인 낙성 시 축하물품으로 왕실(고려 우왕)에서 안양사에 향(香)을 보내 하사했고, 승려(道僧) 1,000명이 불사(佛事)를 올렸으며, 시주(布施)한 각계의 인사가 무려 3,000명이라고 밝히고 있어 왕실사찰로서의 사격(寺格, 사세)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선조에 이르러 △이방원(조선태종)은 안양사를 여러 번 찾았는데 한번은 탕목(湯沐)을 하기 위함이고, 또 한 번 찾았을 때에는 △좌정승 하륜(河崙)등이 어가(임금 수레)를 기다려서 향연을 베풀고자 했다. 이방원은 조선이 안정을 찾아가자 한때는 동지였지만, 상황이 변해 안타깝게 정적이 되어 제거된 최영장군을 그리워하며 그가 아끼던 전탑(塼塔, 벽돌로 만든 탑)이 있던 삼성산 안양사를 찾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태종실록에 관료인 과천현감 윤돈이 교대되어 한양으로 갈 때 안양사에서 전별식 향연을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양사는 지방 관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시기에도 안양사는 건재하며 사세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사료(史料)를 통해 볼 때 여말 선초 정치적인 혼동과 난세 속에서도 안양사는 국가왕실 및 신하 등의 사랑 속에 지역과 함께했음을 알 수 있으며, 안양시 석수동 김중업박물관(안양사지전시관)을 찾으면, 문헌 속 안양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문헌 속 고려안양사(安養寺)
문헌 속의 고려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4년(900)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궁예의 수하로 있을 때 지역을 정벌하러 가다가 삼성산 자락에서 우연히 신라계 실존인물인 능정(能正, 교종계열)스님을 만나 뜻이 같아 의기투합하여 창건된 사찰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패권을 다투던 후삼국의 격동기 속에서 왕건의 안양사의 창건은 백성들에게 위안을 주며 삶의 안식을 제공했다. 태조 왕건은 고려건국(918~943 재위)에 앞서 고려왕국을 극락정토(極樂, 불국토)와 같은 이상향의 살기 좋은 국가건설을 염원하며 지역에 고려안양사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중초사지당간지주(보물, 제4호)의 서쪽 지주 측면의 명문기록(幢竿記)으로 살펴볼 때 통일신라 중초사(中初寺)는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원년(826)창사 이래 사명(寺名)을 바꿔가며 고려시대 안양사로 변모하고 법등은 조선조까지 유지된다.
기록 속 ‘고려안양사’는 태조왕건 창건 이래 조선태종(이방원), 최영장군, 조선의 좌정승 하륜, 고려문신 김극기, 과천현감 윤돈, 내시 박원계 등과 같이 국왕, 신하, 귀족, 관료 등 당대 거물급 지배계층을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등 유명승려들이 스쳐 지나간 흔적이 있는 유서 깊은 사찰로 사격이 높은 우량 사찰이다. 한편 고려안양사는 일정한 시설과 재정적 부가 축적된 사원으로서 사찰 본연의 종교적 수행공간 제공이외에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지역의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 피운 것으로 분석된다. 고려안양사는 사료 및 출토유물과 유구를 분석하면 사찰초입의 당간지주, 치미(鴟尾)와 취두(鷲頭)를 갖춘 대형 건물지, 기록 속 승병(승군), 푸른 연못(벽담, 碧潭), 안양루, 능정스님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 도제불상(부처의 두상 곱슬머리, 도제나발편 출토), 사찰초입의 돌다리, 중문, 금당, 강당, 승방, 좌우회랑, 고려삼층석탑과 태조왕건이 세운 전탑(면회칠한 12변형의 구조에 난간으로 에워싸고, 연봉장식물로 치장) 등 이 있는 불교신앙공간으로 파악되고 있다. 태조왕건은 고려건국 후 부처가 돕는 다는 설로써 간여하는 차 있어 그 말을 채용하여 전국에 탑(塔)과 불묘(佛廟)를 많이 두었는데 안양사의 (전)탑도 그중의 하나라고 한다.
도은 이숭인의 안양사탑 중수기(기록)에 따르면 “절의 남(南)쪽에 탑(塔)이 있으니, 벽돌을 포개서 7층으로 쌓고 기와로 덮었고, 맨 아래층에는 빙 둘러서 12칸의 회랑(廻廊)을 만들고, 벽마다 불(佛)ㆍ보살ㆍ인천(人天)의 상을 그렸으며(면회채색 탑추정) 밖에 난간을 만들어 출입을 제한했다. 그 크고 화려한 규모가 다른 절에는 없었던 것(원문, 基爲巨麗가 他寺엔 未有也)”이라 하여 전탑의 위상과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문헌 속 ‘안양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정황상 사찰아래 자연스레 형성된 촌락인 사하촌(寺下村)인 ‘안양사 마을’이 있었고, 걸어서 다리를 지나 사찰에 이르렀으며 맑은 시냇물(淸溪)곁에 있는 사찰에는 푸른 연못(벽담, 碧潭)이 있었으며, 새벽에는 날이 밝음을 알리는 닭이 울고, 사객(寺客)들의 말(馬)이 정거했으며 부속시설로 능정스님의 영정이 있어 추모하는 공간인 조사당(祖師堂)과 안양루(安養樓)의 누각(누대樓臺, 망루)이 있던 걸로 추정되며, 현존 안양루는 큰 사찰에서 나타나는 시설인바, 안양사는 당대 규모 있는 유명사찰로 보인다.
우리안양(安養)의 도시명은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
태조 왕건이 창건한 사찰에 건탑(建塔)한 ‘안양사칠층전탑’있던 고려안양사는 안양시 지명유래의 뿌리이며 근본이다. 도시 ‘안양(安養)’의 지명은 태조 왕건이 창건에 관여한 고려안양사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시의 지명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極樂, 安養世界, 서방정토 피안의 세계)과 같이 안락(安樂)한 도시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우리 안양(安養)은 낙원(樂園)과 같은 평안한 곳으로 기독교의 천당, 도교의 무릉도원과 같이 이상향을 품은 살기 좋은 도시를 지향하며, 지명 그대로 따른다면 이러한 도시, 낙토(樂土)에 사는 안양시민은 행복하고 축복받은 시민이다.
사진자료로 보는 고려안양사의 유물과 유구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초입 옛,유유제약부지의 김중업박물관내에 있는 고려 삼층석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4호)과 통일신라 중초사지당간지주(국가보물 제4호)와 같은 불교유구로 살펴볼 때, 그리고 김중업박물관 건립에 따른 시∙발굴조사(2008~2011)에서 노출된 매장유물 등으로 살펴볼 때 선대 통일신라 '중초사'이래 기록 속 고려'안양사'가 지역에 실존했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좌측상단 사진은 전탑지의 전탑이 주저앉아 무너져 폐기된 전과 기와편들의 양상으로 전탑지 주변에서는 전탑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려백자(또는 분청자) 연봉(연꽃봉우리 장식물, 가운데 사진) 등 다량의 매장유물이 문화재 발굴 조사과정에서 수습되었다. 전탑지발굴과 함께 '안양사 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片,'안양사'라고 적힌 기왓장, 암키와, 우측사진)'의 발굴은 안양사가 역사적인 실체로서 지역에 실존했음을 증거하며, 동시에 안양시 지명유래의 정체성을 밝혀줄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안양시 석수동소재 김중업박물관(옛,유유제약부지)내 '안양사지관'을 찾으면 전시 진열된 사료 및 매장출토 유물 관람을 통해 고려안양사의 정체성과 실존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라 효공왕 4년(900) 왕건이 궁예의 수하로 있을 때 창건한 고려안양사와 통일신라 흥덕왕 2년(827)을 전·후 창사한 중초사(中初寺)의 관계성과 실존(寺勢)을 확인 할 수 있고, 두 사찰이 경주 황룡사와의 친연성(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정면 9칸(41.4m)에 측면 3칸(14m)의 대형건물지인 고려 안양사 강당지에는 설법단(說法壇)으로 추정되는 방형 구조물이 드러났으며, 이는 황룡사지의 강당지에서도 발견되는 유사 시설물로 중초사당간지주에 명기된 황룡사 주통(州統, 국통아래 승직, 관직)인 항창화상(恒昌和上)과 법사(法師)무리가 중초사에 머물렀다는 당간지주기록(幢竿記)내용에 비추어 두 사찰의 성격과 연관성을 알 수 있다. 고려안양사 강당지의 상부 자연석초석의 하부공간에서는 통일신라 원형형 하부초석이 출토되어, 선대 중초사의 사찰을 기반으로 고려안양사가 사역(寺域)을 조성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안양김중업박물관 개관의 의미와 발전발안
지난해 3월 28일 개관한 김중업박물관 일원(구,유유부지 일원)은 통일신라 중초사, 고려~조선안양사, 폐사이후 근대 포도밭 등 농지, 원두막, 마차길 및 샛길, 싸릿문 있는 초가집 등 생활시설, 근대 유유산업 안양공장(제약회사) 그리고 현대식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수 천 년을 지역과 함께 해온 유서 깊은 지역이다. '김중업박물관’이 있는 옛,유유부지일원은 지역의 문화해설가인 필자에게 매우 남다른 의미가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2004년 7월 23일부로 안양시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면서 부지의 역사와 건축에 대해 공부하며, 배우고 익힌 지식을 해설과 글로 나누는 봉사활동으로 지역민과 함께해 왔다. 또한 2014 개관이후에는 (재)안양문화예술재단 김중업박물관 뮤지엄패밀리(전시유물해설사)로서 박물관 전시유물 해설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스토리텔링으로 나눔으로서 지역에 대한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는 사회공익 활동에 참여해 오고 있다.
고려안양사를 창업한 태조 왕건 및 세계적인 건축가 고,김중업(金重業, 1922~1988)의 혼(魂, 정신)이 살아있는 부지 및 박물관은 필자가 아끼는 공간으로 절친한 친구이자, 동반자이며 인생의 소중한 벗이다. 박물관과 함께하면서 아쉬운 점은 부지 내, 석탑 이전 전 원위치 지점에 삼층석탑지에 대한 표지설치가 있었으면 좋겠고, 이지역이 안양의 명물 포도를 산출하던 포도밭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포도동산, 포도분수, 포도조형물, 포도공원 등 포도 관련 작은 인프라를 설치하여 지역의 정체성을 살렸으면 한다. 또한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 고려안양사지 출토 철제동물장식(철제마편, 鐵馬)등 다른매장 출토 유물 등도 순회하면서 진열하는 특별 전시코너가 있어 새로운 유물도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는 2015년 3월 28일 개관 1주년을 맞이하는 공립김중업박물관은 문화적인 욕구충족 및 삶의 휴식공간을 제공하며 지역에 뿌리를 내려 안착되어 가는 느낌이 든다. 안양의 천년 문화 전시관인 ‘김중업박물관’ 개관의 의미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천년을 준비한다는 의미도 품고 있다. 통일신라 중초사(中初寺)이래 고려 및 조선시대 문헌 속 안양사(安養寺)가 있던 사찰지(寺址, 절터)인 옛,유유부지일원은 안양시 지명(地名)유래의 발상지답게 천년역사와 문화의 은은한 향기가 풍겨 나오는 신비로운 지역이다. ‘안양김중업박물관’을 찾으면 라말 여초(羅末麗初)~조선조에 이르는 전시 진열된 사료 및 매장출토 유물(유구) 관람을 통해 지역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한국 근·현대건축의 거장 고,김중업선생이 설계하여 남긴 창의적이고 예술성이 돋보이는 건축유산과 그이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안양시 석수동 김중업박물관을 찾아 안양천년 유구한 역사의 향기를 음미하고, 또한 고,김중업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문화의 향연을 누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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