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9229

[자료]의왕 부곡역은 철도의 메카이다

[11/27 시민연대]건축사 최승원 교수 보존 제안 "도시와 건축도 생명체처럼 생노병사한다. 의왕시 부곡역은 철도의 메카이다." 건축사로 안양지역 문화찾기와 보존에 관심을 갖고 역사적 사료 발굴과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최승원교수(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겸임)는 "건축의 나이도 60살이 되면 축하해 주자"며 부곡역 주변의 철도 (구)관사의 보존을 제안하고 나섰다. 부곡역 관사촌은 해방동이(1945년)로 태어나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야생초처럼 살아 남아 있다며 태어날 때는 넓은 대로변 좌우로 건축 되었는데 도로 폭을 줄이고 난 개발로 인하여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모습이라고 느낌을 피력했다. 또한 오래된 건축이지만 시멘트 몰탈벽이 깨끗하고 복원이 가능하다며 "건축도 60살이 되면 수리도 해 주고 주변에서 칭찬..

[임부성]안양5동 찬우물에 얽힌 전설

[11/15 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찬우물"에 얽힌 새로운 전설이 있어 소개합니다. 안양5동=냉천동, 찰冷자, 샘泉자를 써서 냉천동이 된 것은 왜정때 이야깁니다. 당시, 대륙침탈을 위한 교두보로써의 이땅을 강점한 쪽바리들이, 수리산의 정기(병복안 끄트머리, 채석장)를 죄다 퍼다가 부산까지 쫘~ 악, 수리산의 정기를 깔아놓는 한편, 순 한국말로 된 동네 이름을 죄다 한자어로 바꿉니다. ex)양지쪽 해가 잘드는 마을, 양짓말을 陽地동(안양3동)으로, 토성 안쪽에 있다하여 담안인데,이를 장(담牆)내(內)동(안양4동)으로, ※가끔 이를 담장장자가 아니라, 장미薔자로 쓰리는 어르신 계신데, 죄송합니다만, 담안에는 밤나무와 포도나무만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 갈까요? 찬우물이 ..

[문원식]안양사(安養寺)

[10/24 안양시민신문]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일반적으로 안양(安養)이란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안양사(安養寺)는 AD900년 경 고려 태조 왕건의 명을 받은 능정(能正)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년, 1530년)은 전하고 있다. 당시 20대의 젊은 장군 왕건은 궁예의 명으로 조공을 약속하고도 바치진 않던 남쪽의 3개 주(광주, 충주, 청주)를 정벌하러 이 곳을 지나던 중, 산기슭에 어리는 오색영롱한 서기 속에서 늙은 스님 능정을 만나게 되는데, 서로 뜻이 맞아 안양사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절 마당 남쪽으로 7층 전탑을 함께 세웠는데, 아래층의 규모는 둘레가 열 두간인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바, 벽마다 부처, 보살, 천인(天人)의 상을 그려 넣었으며 밖으로는..

[자료]문화재.예술품의 보물창고 (주)유유산업

[10/22 시민연대]안양유원지는 안양시민의 고향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에 자리한 (주)유유는 1941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제약회사로 1953년부터 의약품 제조업무를 시작, 1957년 10월 유유산업주식회사으로 회사명을 변경한 데 이어 1959년 5월 현재의 중초사지 절터 부지에 안양공장을 준공한 데 이어 2002년 5월 (주)유유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2001년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였다. ▲ 안양유원지 내 자리한 (주)유유 전경 ㈜유유의 안양공장이 매각되어 주거단지가 조성될 경우 그동안 안양시가 추진해 온 안양유원지 개발 계획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뿐 아니라 공장내 문화재의 훼손 우려와 산업건축물로 주목받아 온 공장 건물과 예술 작품들도 한순간에 사라질 수 밖에 없어 대책마련이 시급히 요구되..

[자료]안양유원지 역사와 유원지 개발 계획의 현주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 하루 약 2만명의 행락객이 찾아와 유원지 입구에 간이기차역이 설치되고 풀장까지 임시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던 안양유원지에는 길목의 넓다란 안양포도밭과 함께 제1.2풀로 불리우던 자연풀장과 상류쪽에 인공형태의 대형풀장, 만안각수영장, 맘모스수영장, 안양관광호텔 수영장들이 자리한 가운데 안양을 대표하는 수도권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해 왔다. 특히 안양학연구소(소장 문원식. 성결대 교수)에 따르면 안양유원지는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의하면 태종 17년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가 계곡에서 열리는 등 오랜 역사성뿐 아니라 1930년대이후 70년대까지 안양지역 초등학교들의 소풍지로 안양사람의 휴식처이며 서울이나 수원 등 ..

[기억-박찬응]생경한 풍경 생경한 추억이야기

[08/09 스톤앤워터 관장] 촌넘이 1970년도에 안양땅을 밟았을적에 딱 신기한거이 두가지였다. 안양천물은 왜 커피색일까? 안양천물은 왜 남에서 북으로 흐를까? 왜 북으로 흐르는지는 아직 30년 넘게 풀지 못하는 숙제로 남아있고 그당시 물이 왜 커피색이었는지 안다. 안양에 와서 첫여름을 만났다. "멱 감으러 가자"는 말에 솔깃해진 나는 무심코 반 아이들을 따라 나섰다. 안양대교 밑으로가서 옷을 벗는다. 홀딱 다리밑은 물이 깊었다. 프림을 석지 않은 검으틱틱한 커피색물에 풍덩 풍덩 자맥질을 하는 친구들을 보고 난 선듯 옷을 벗지 못햇다. 분명 온몸이 검게 염색이 들것 같았다. 연신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친구들을에 끌려 '남한강 물개'의 폼나는자맥질 솜씨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과 찌는듯한 더위가 옷을 벗겼다...

[안양사]안양시의사회 창립당시와 80년대 초반

[안양시의사회 25년사에서] 안양시의사회 창립당시 의료계 상황과 80년대 초반까지의 주요 사항들 전문의 자격시험이 1973년부터 의료계 주관단체인 의협으로 이관돼 실시되었다. 1951년 9월 25일 제정 공포된 국민의료법에 따라 1952년부터 전문의제도가 도입된 이후 1958년초까지 초창기 7년 동안은 전문의자격 중앙심사위원회를 두어 서류심사만으로 전문의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당시 전문의심사자격규정은 '보건사회부장관이 인정하는 종합병원에서 만5년 이상 수련한 자'에 한하여 전문의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많은 개원의사들의 자격취득이 어렵게 되자 의협은 '1952년 12월 25일 이전에 개원한 사람 중에서 동일과목 개원 년한을 배수로 환산하여 인정한다'는 편법을 마련하여 당국의 승인을 받아..

[안양사]시흥군의사회 시절과 안양시 의사회 창립

[안양시의사회 25년사에서] 1974년 창립된 안양시의사회의 모태는 1949년 설립된 시흥군의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흥군의사회는 사회복지증진 및 국민건강 향상과 회원 상호간의 친목,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이형래(李衡來), 이쌍용(李雙龍), 김원필(金源必) 등 5-6명의 회원에 의해 결성된 후 존속돼 왔다. 행정구역상 시흥군으로 편입돼 있었던 때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안양읍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흥군의사회는 1973년 7월 1일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에 따라 안양시의사회는 1974년 7월 22일 시흥군의사회에서 분리, 회원 29명(개원의 16명, 봉직의 12명, 휴직의 1명)으로 정식 출범하게 된다. 해방후 초대 시흥군의사회 회장을 맡았..

안양 상공에서 숨진 이근석 장군

고 이근석 장군은 1917년 1월 17일 평안남도 평원 청산에서 출생하였다. 1949년 공군 독립 당시 공군사관학교장을 역임하였고, 공군 창설 7인 간부 중 한 사람이며 6·25 한국 전쟁 당시 초대 공군 비행단장이었다. F-51 편대를 직접 지휘하여 맹활약 이근석 대령은 전쟁 초기 우리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L-형 및 T-6 경항공기로는 남하하는 적 전차(T-34)를 파괴할 수 없다고 판단, 미 극동공군사령부로부터 F-51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여 일본 이다쯔게 기지에서 F-51 기종 전환 훈련을 받고서 동년 7월 2일 이다쯔게 기지에서 F-51 전투기 10대를 인수, 직접 지휘하에 현해탄을 건너 대구 기지까지 공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구 기지에 도착한 이근석 대령을 비롯한 F-51 전투기 조종사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