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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안양면사무소' 복원에 대하여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석수동과 박달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재 안양지역은 일제시대 초기까지 안양천을 경계로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두 개의 면이 합쳐서 서이면(西二面)으로 행정명칭이 변화된 시기는 1914년 3월 1일에 시행된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해서 인데이 때의 서이면사무소는 호계 2동 방죽말에 있는 구 교육청 자리 앞쪽에 있었다. 서이면사무소는 1917년 7월 6일 자로 현재의 안양 1동 사무소 옆 안양옥 자리로 옮겨오게 된다. 면사무소의 이전은 서이면의 중심지가 호계리에서 안양리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데, 1905년의 안양역사 개설로 인하여 인구와 물자이동의 중심축이 안양리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이 곳은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된 이후에..

[문원식]우리가 언제부터 '안양사람'이라 했을까?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99년 봄 100여명의 민방위교육생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할 때, 안양이란 말만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본 적이 있다. 이 물음에 손을 든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20세 이상 안양 시민 중 토박이의 비율과 일치하여 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 기억에 난다. 이처럼 코끝이 찡해진다는 느낌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지역주민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 살고자 하는 것을 이르는 정주의식(定住意識)이란 말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주의식이 지역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은 주민들이 많아질 때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지게 될 것이고, ..

[문원식]21세기 안양의 과제와 비전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과천 공로변에 위치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지역을 산업사회로 이끈 일대 사건은 1905년 1월 1일 자로 개통된 경부선 철도와 그로 인한 안양역사의 개설이었다. 안양역사의 개설은 그때까지 불과 10여 호에 불과하던 안양리 일대의 인구를 30년만에 역전을 중심으로 3,000명 이상이 모여 사는 도시로 만들었고, 이후 안양리가 인근지역의 정치·행정 및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안양의 산업화시대를 이끈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은 1932년 현 대농단지에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된 일이다.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시작된 안양의 산업화는 섬유와 제지산업을 중심으로 하여 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순탄하게..

[문원식]산업화과정을 통해 본 안양시의 도시성장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경기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들인 수리산, 관악산, 청계산, 모락산 등에 둘러싸인 안온한 분지 속에 자리잡은 안양시가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은 발굴된 유적이나 역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역대로 과천에 속한 하부 행정단위였던 안양시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본래 마한과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南征)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율목군(栗木郡)이라 칭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율진군(栗津郡)이 되었다. 이어 고려조로 넘어오면 다시 과주(果州)로 고쳐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금천현(衿川縣)과 통합하여 잠시 금과현(衿果縣)이라 불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과천현(果川縣)으로 부르다가 고종 32년(1895)의 행..

[문원식]안양의 산업화 과정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1932년 서이면 안양리, 현 대농단지 약 1만평의 부지 위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라는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이 설립되었다. 섬유공업에 적합한 공업용수를 찾아 전국의 물을 조사해 본 바, 박달동 일대에서 채집한 안양천의 수질이 최상이라는 판정을 얻은 결과였다. 덧붙여 안양리 일대의 풍부한 노동력과 서울에 인접한 교통상의 강점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8.15 광복 직전, 4개에 불과하던 제조업체 수는 6.25사변 직전까지 약 14개 업체에 종업원 수 1,068명에 이를 정도로 안양은 순탄한 도시화 및 산업화의 길을 걸어 왔다. 여기서 초기 안양의 산업화에 기여한 업종을 조사해 보면 양질의 공업용수가 있어야 가능한 산업 즉, 방직공업과 제지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

[문원식]탈공업화시대의 안양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1932년 현 대농단지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안양의 산업화는 90년대 초 수도 서울의 배후 침상도시로 평촌 신도시가 건설되자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평촌 신도시가 건설되기 이전까지의 안양의 산업화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단계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사가 개설된 1905년부터 조선직물주식회사가 들어선 1932년까지로 불과 십여 호에 불과하던 안양리에 3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고, 학교와 시장 및 교회 등 도시 기본시설들이 만들어지던 시기로 '도시형성기'라 부를 수 있다. 2단계는 1932년부터 1961년까지의 기간으로 '전기산업화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당시 안양을 대표했던 공..

[문원식]안양지역의 기독교전파(2)/ 삼막골교회

행정학 박사, 성결대 교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분 선교사들이 1885년 4월에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딘 후 10년이 지나면 안양지역에도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초기 기독교 선교루트는 주로 간선도로를 끼고 이루어졌다. 안양지역의 기독교 전파과정을 돌이켜봐도 덕고개교회(1895, 안양시 호계동), 초평교회(1897, 의왕시 초평동), 학현교회(1904, 의왕시 학현마을), 부림리교회(1910, 현 인덕원 동은교회)는 과천 공로상으로 전파된 교회들이고, 무지내교회(1895, 시흥시 무지동), 범고개교회(1896, 안양시 박달동), 삼막골교회(1901, 안양시 석수1동)는 시흥-안양간의 도로를 타고 차례로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흥-안양간의 도로주변에 세워졌던 안양지역 교회 중 범고..

[문원식]안양지역의 기독교 전파(Ⅰ)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인덕원에서 경수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수도권 순환도로에서 호계동 신 군포사거리 사이에서 구릉지 같이 약간 솟은 지점을 지나게 되는데, 이 곳이 바로 '덕고개(德峴)'이다. 덕고개 주민과 갈미, 인덕원 주민들이 과거 구 군포사거리 근처에 있던 군포장(軍浦場)을 보러가기 위해서는 이 곳을 반드시 지나야 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덕이 온다고 해서 덕고개라고 칭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덕고개는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당시 현재의 모습으로 낮추어져, 지금은 자동차로 주행할 때 고개의 흔적 정도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덕고개에서 신 군포사거리를 향하여 진행하다가 오른편으로 약 200미터 못 미친 지점이 바로 과거 안양지역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되었..

[문원식]구시장(舊市場)의 부침과 안양의 상권변화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서이면 안양리에 최초의 공설시장이 들어선 것은 1926년 1월 28일, 안양 1 동 구시장 자리에 안양시장이 5일장으로 개장되면서부터이다. 안양시장은 시흥군의 중심이라는 위치상의 강점과 기차와 자동차로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상의 이점 및 당시 안양리 지역의 비약적 경제성장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안양시장은 1929년, 안양지역 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이고, 정기적인 씨름대회나 서커스 공연 등이 열리는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선거유세나 각종행사 등 지역정치의 발원지이기도 하였다. 또한 시외버스 정류장이나 맛이 좋은 국밥집도 모두 안양장터에 있을 정도로 번화했던 옛 안양 1 번가였다. 이처럼 영화를 누리던 안양시장은 하천변에 위치한 저지대였던 관계로..

[문원식]정조의 화산능행(花山陵幸)과 안양(Ⅰ)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조선왕조 제 22 대 정조(正祖·1752-1800, 재위기간·1777-1800)임금은 훌륭한 학자요, 뛰어난 개혁정치가이면서도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다. 학자로서 정조임금의 진면목은 최근 정조시대를 연구하는 30, 40대 소장학자들의 모임인 '문헌과 해석'을 통해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정조임금이 친히 지은 시문과 어록으로 구성된 홍재전서(弘齋全書)는 임금의 문집으로는 역사상 비교할 바가 없는 100책, 184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며, 또한 194종의 책을 정조 자신의 주도하에 규장각 신하들과 함께 편찬하고 있다. 정조대에 편찬된 문헌목록집인 군서표기(群書標記)에 의하면 활자본과 목판본이 83종 644책, 필사본이 112종 3,460책이어서 도합 194종 4,00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