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677

1962년 8월15일 17주년 안양 광복절 행사

1962년 8월15일 17주년 안양 광복절 행사 ‪#‎안양‬ ‪#‎기록‬ ‪#‎기억‬ ‪#‎역사‬ ‪#‎골목‬ ‪#‎광복절‬ ‪#‎읍민관‬ ‪#‎1962년‬/ 광복절이 올해(2016년)로 7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광복' 단어 그대로 "빛을 되찾다"라는 뜻. 즉, 광복절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빛을 되찾은 날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죠.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에서 벗어나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1949년 제정되었는데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이지요. 사진은 1962년 8월 15일 안양 장내동(현 2001아울렛사거리) 읍민관 앞에서 열린 17주년 시흥군 광복절 행사 모습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당시 시흥군과 안양읍내의 기관 행사들은 물론 영화관으로 이용됐던 건물로 읍민관이라 불렀는..

1959년 8월15일 14주년 안양 광복절 행사

1959년 8월15일 14주년 안양 광복절 행사 ‪#‎안양‬ ‪#‎광복절‬ ‪#‎시흥군청‬ ‪#‎815 #‎이재형‬/ 광복절이 올해(2016년)로 7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광복' 단어 그대로 "빛을 되찾다"라는 뜻. 즉, 광복절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빛을 되찾은 날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죠.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에서 벗어나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1949년 제정되었는데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이지요. "달성하자 국민정신 선양하자 민족정기" "조국통일 성취는 8.15광복으로" 사진은 1959년 8월 15일 시흥군청(현재의 안양1번가)앞에서 열린 14주년 광복절 행사로 당시 4대 민의원이던 이재형(李載灐) 국회의원(경기 시흥군)이 단상에 올라 축사를 하고 있는 장면으로 큰 책상 ..

1972년 안양 남부시장 진입로 포장공사

1972년 안양 남부시장 진입로 포장공사 ‪#‎안양‬ ‪#‎기록‬ ‪#‎기억‬ ‪#‎역사‬ ‪#‎원도심‬ ‪#‎동네‬ ‪#‎골목‬ ‪#‎1970년대‬ ‪#‎남부시장‬ ‪#‎남부동‬ ‪#‎안양1동‬/ 안양시로 승격되기 이전인 시흥군 안양읍 당시인 1970년대 초반의 안양 남부시장 풍경으로 시장 진입로의 도로 포장 공사가 한창입니다. 사진 좌측에는 는 당시 야채와 청과를 트럭에 싣고 지방에서 남부시장으로 올라와 하차하던 운전사, 중간상인들은 물론 남부동 주민들이 애용했던 제일목욕탕(지금도 굴뚝은 남아 있음)이 보이고 사진 우측은 72년 무렵 개업한 장안약국의 간판이 보이는데 지금은 그자리에는 약국(장안사약국)이 운영중에 있지요. 다시 장안약국을 운영하던 분은 안양에서만 40여년 약국을 경영해 약국업계의 대모..

1970년 안양의용소방대와 사이렌탑

1970년 안양의용소방대와 사이렌탑. ‪#‎안양‬ ‪#‎기록‬ ‪#‎기억‬ ‪#‎역사‬ ‪#‎원도심‬ ‪#‎동네‬ ‪#‎골목‬ ‪#‎1970년대‬ ‪#‎행정타운‬ ‪#‎중앙동‬ ‪#‎안양1동‬ ‪#‎안양경찰서‬ ‪#‎안양의용소방대‬/ 안양시로 승격되기 이전인 시흥군 안양읍 당시인 1970년대 초반의 안양일번가 풍경입니다. 사진속 골목은 현재의 주소지로 볼때 장내로 139번길로 오른쪽 3층 건물은 제일양복점(현 KFC), 사진 왼쪽은 안양경찰서에 속해있던 안양의용소방대 건물(현 피자헛 안양점)로 뒤로 보이는 철탑은 당시 전화가 귀했던 시절 화재가 나면 울리던 싸이렌과 경찰 무선 안테나가 설치돼 있었지요. 현재 60만 안양시민의 방범과 치안, 지역 교통을 책임지는 안양경찰서는 만안과 동안경찰서 2곳으로 1시..

1973년의 안양읍 당시의 안양일번가

1973년의 안양읍 당시의 안양일번가. ‪#‎안양‬ ‪#‎기록‬ ‪#‎기억‬ ‪#‎역사‬ ‪#‎원도심‬ ‪#‎동네‬ ‪#‎골목‬ ‪#‎1970년대‬ ‪#‎행정타운‬ ‪#‎안양1동‬ ‪#‎안양경찰서‬ ‪#‎시흥군청‬ ‪#‎안양읍사무소‬ ‪#‎중앙동‬/ 안양시로 승격되기 이전인 시흥군 안양읍 당시의 안양일번가 중앙통로 거리풍경으로 사징 위쪽으로는 중앙로이며 그 뒤로는 새시장(현 중앙시장)과 이어지는 중앙통 거리로 당시에는 이 곳을 안양 중앙동이라 불렀답니다. 현재 이 거리는 안양의 대표적 젊음의 거리이지만 당시 중앙동은 구시장(시대동)과 새시장(장내동)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으로 시흥군청, 안양읍사무소, 안양경찰서, 의용소방대 등 관공서가 양쪽으로 쭈욱 있었고, 주변에는 제일양복점, 칠성제화 등 양화점과 다방..

1970-1990년대 안양유원지로 피서온 사람들

#안양 #기록 #안양풀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여름 #피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서지요. 피서 풍습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지만 일상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한다는 의미는 변함이 없답니다. 안양유원지 계곡에는 물이 참 많았답니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말에는 관료들의 피서지였고,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는 계곡을 돌로 막아 안양풀이라 명명하고 유원지입구 철길에는 임시역이 만들어지고 열차가 정차할 정도로 역사도 참 오래되었으며, 1970년대 초에는 한해 여름 100만 인파가 안양유원지로 피서올 정도로 수도권의 대표적인 피서지였지요. 안양유원지 계곡 초입에는 제1풀, 제2풀 공짜풀장이 ..

1970년대 입장료 받던 안양유원지 매표소

#안양 #기록 #안양풀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여름 #매표소 #국민관광지/ 1970년대 100만 인파 몰렸던 안양유원지 매표소 풍경으로 현재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진입 다리(삼성2교) 오른쪽의 산자락입니다. 안양유원지는 1969년 1월 21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안양풀 대신 안양유원지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열차가 서는 임시 안양유원지역 입구에는 아치모양의 철구조물에 '안양유원지'라는 간판이 나붙고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유원지 관리를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19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발길이 끊깁니다. 더욱이 1977년 사상 유례없는 안양 ..

안양유원지의 어제와 오늘(1997년11월18일자 동아일보)

#‎안양‬ ‪#‎안양유원지‬ ‪#‎안양풀‬ ‪#‎동아일보‬/ 1997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안양풀이 개장했던 1932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는군요. 「경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승지(勝地)는 많은데 수영장은 별로 없다. 안양은 곳곳에 녹음이 무성하여 하기(夏期)는 각 학생의 림간(林間)학교 피서지로 유명할 뿐더러 추기(秋期)에는 관풍습률(觀楓拾栗)의 승지로 이름있는 곳인데 겸하여 수영장이 완성되면 금상첨화로 안양 일대는 관악산 아래에 낙원지가 되어 지방 발전은 더욱 번영하리라고 한다」. 1932년 7월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안양유원지 관련기사이다.

안양풀장에 인파(1935년8월16일자 동아일보)

‪#‎안양‬ ‪#‎안양유원지‬ ‪#‎안양풀‬ ‪#‎동아일보‬/ 1935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안양풀의 옛 모습과 함께 1935년에는 매일 안양 거주 인구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수천명의 피서객이 찾으면서 한달도 안돼 2만8700여명이 찾는 등 삼성산 계곡에 안양풀이 생기고 난후 매년 피서객이 늘어나고 있다는 글도 실려 있네요. 참고로 안양의 인구 변천사를 보면 최초의 인구 자료는 영주 35년(1759년)의 호구조사인데 현재의 안양의 석수동, 박달동을 제외한 나머지 안양지역에 속한 하서면의 인구가 1515명이고, 1912년에는 3412명, 1925년 6165명, 동아일보 기사가 실렸던 1935년 당시에는 8957명, 1941년(안양면 승격) 10000명, 1949년(읍 승격) 20021명, 197..

안양풀장 개장 기사(1932년7월21일자 동아일보)

‪#‎안양‬ ‪#‎안양유원지‬ ‪#‎안양풀‬ ‪#‎동아일보‬/ 1932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의 안양 석수동에 안양풀이 개장한다는 기사입니다. 「경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승지(勝地)는 많은데 수영장은 별로 없다. 안양은 곳곳에 녹음이 무성하여 하기(夏期)는 각 학생의 림간(林間)학교 피서지로 유명할 뿐더러 추기(秋期)에는 관풍습률(觀楓拾栗)의 승지로 이름있는 곳인데 겸하여 수영장이 완성되면 금상첨화로 안양 일대는 관악산 아래에 낙원지가 되어 지방 발전은 더욱 번영하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