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377

[임부성]수리산 문둥바위와 독구(dog)

[03/04/16]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독구(dog)" 천지였다. 당시 개이름 랭킹을 보면, 독구-메리-쫑-베스-캐리-워리 순이었다. 길을 가다가 어떤 개가 사납게 덤벼들 때, 우린 이렇게 불렀다. "독구, 메리, 쫑, 베스, 캐리, 워리~" 그러면 십중 팔구는 꼬리 내렸다. 왜? 자기 이름 불러주니까... 왜? 자기를 아는 척하니까... 왜? 혹시 주인집 아드네미 친구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지금 이 발음을 그대로 쓴다면 무지 웃기겠다! "핫.독.구".. 우리 집 멍멍이가 "독구"였다. 크기는 엄청 큰 놈이 몸 전체가 윤기나는 검은 색을 뒤집어썼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인지 나랑 비슷한지 암튼 "독구"는 우리집에서 몇 대째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얘..

[문원식]몽당(蒙堂)선생 한항길(Ⅲ)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6.25사변은 안양직물공장을 운영하면서 기업가로서 순탄한 길을 가던 선생의 인생에 또 한번의 전기가 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시흥군의 민보단장(民保團長)겸 군촉탁(軍囑託)이었던 선생은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계시던 호계리 본가 뒤꼍에 땅굴을 파고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땅굴생활로 얻은 더부룩한 수염을 구태여 깍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계속해서 기르게 되는데, 이 수염이 이후 선생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에 선생은 수염과 관련하여 “부산 피란시절 기자로 재직할 때나 혹은 기술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때도 수염 때문에 한결같이 남의 이해를 받은 바 있고, 또한 외형이 두드러져 나쁜 일을 하다가는 남의 눈에 잘 띄게 되므로 행동거지에 조심하고 근신하게 되어 후진들..

[임종득]치열했던 모락산.수리산 전투

특별기고- 6.25전쟁,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 51년 1월 유엔군이 대규모 반격작전 중 일어난 전투 전적기념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주민들도 모르고 있어 글을 시작하며 2003년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6.25전쟁은 북한 공산정권이 한반도의 적화를 위해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 발발하였다. 이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힘을 합쳐서 공산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였다. 6.25전쟁 이후 지난 50년간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가 속출한 대변혁기였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이던 소련이 70년 역사를 끝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져갔다. 이로써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는 붕괴되었고, 우리와 줄곧 적대관계를 이뤄왔던 중국과는 국교정상화..

[문원식]몽당(蒙堂)선생 한항길(Ⅱ)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3.1 독립만세운동은 선생의 전 생애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간 가슴속에 응어리진 반일감정을 한꺼번에 쏟아 학생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대가로 3년간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고, 출옥 이후에도 요시찰인물로 낙인 찍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사소한 사회활동조차 일경의 감시·감독 하에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더하여 심리적 압박과 좌절감은 신경쇠약증을 골수에까지 깊게 해 거의 폐인이 될 지경이었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 품었던 청운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허탈에 빠진 나는 오랜 동안의 정신적 방황을 해야만 하였다”고 이때의 심경을 유고집에서 토로하고 있다. 결국 자기완성과 경제적 자립만이 실의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는 자..

[자료]수도.안양.신필림과 근대 한국영화사 이야기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3 - 이필우 (1) + 열여덟에 일본으로 건너가 촬영과 현상기술 익혀, 한밤 촬영소에서 도둑실습도 이필우(1897∼1978)는 최초의 한국인 촬영기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촬영·녹음·현상·편집에 두루 걸쳐 있는 그의 이력에서도 살필 수 있는 것처럼 개척기 한국영화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공헌자이다. 열여섯살부터 우미관에서 영사기술을 익혔고, 열여덟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사카(小阪) 촬영소에서 촬영과 현상기술을 연구했다. 영화산업의 기초가 세워지고 있던 일본에서 닛카쓰(日活), 쇼치쿠(松竹)의 신인기사로 활동했다. 귀국 직후인 1924년에 제작한 은 감독만 ..

시공초월, 인터넷 통해 보는 1960년대 안양모습

[03/02/28 시민연대] 인터넷통해 태평양 건너온 1960년대 후반 안양모습 미국인이 개인홈페이지에 올린 사진, 시공초월 확인 석수동과 안양역.유원지.안양시내 등 생생한 기록들 남겨 ▲Neil Mishalov's씨의 홈페이지 메인화면 60년대 후반 안양시 석수동에 자리한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미군병사가 우편전령으로 서울과 인근 도시를 오가며 찍은 당시의 풍물과 생활상이 담긴 수백여장의 사진을 인터넷을 통해 소개하고 있어 시공을 초월해 지난 과거의 흔적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Berkeley)에 거주하는 닐 미샬로프(Neil Mishalov)씨의 개인홈페이지(http://mishalov.com)에 담겨있는 이 사진들은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1968-69년 근무지에서..

[문원식]신교육의 요람, 낙영학교(樂英學校)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안양지역에서 서당식 한문교육이 아닌 서구식 근대학문을 최초로 가르친 교육기관은 호계동 호계도서관 바로 앞에 있던 낙영학교(樂英學校)이다. 낙영학교의 설립시기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 안양초등학교의 설립시기인 1926년보다 17년이나 앞서고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교육구국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설립된 사학(私學) 중의 하나였던 낙영학교는 구한말 참판을 지냈던 조 용하 선생의 사랑채에 설립되었다. 당시 설립된 사학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약 3,000에서 5,000여 학교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의 사학들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가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후에 부천대학의 설립자가 된..

인터넷에 담긴 과거, 시흥군의 그때 그 시절

시흥군의 역사 1895.5.26 - 1988.12.31 93년만에 폐군 서울시 6개구, 안양.군포.의왕.과천.시흥.부천.광명.안산시 등 포함 지금은 서울시의 6개구와 안양, 군포, 의왕, 과천, 시흥, 부천, 광명, 안산시 등 경기도의 8개시로 나뉘어 뿔뿔이 흩어졌지만 1895년 5월 26일 탄생해 1988년 12월 31일 93년만에 폐군되기까지 거대한 행정구역 시흥군으로 존재해 오던 100여년 가까운 지난 시절의 모습이 담긴 빛 바랜 사진들이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고 있어 눈길을 끌고있다. 시흥시 홈페이지(www.shcity.net)에 마련된 "사진으로 보는 시흥 100년"에 접속하면 다양한 주제별로 시흥시뿐 아니라 안양, 군포시 등 시흥군 시절의 100년간의 지도, 역사, 문화, 행정, 인물 등 다양한..

군포 수리산 산신제 500년 전통을 잇는다

매년 정월과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던 군포 수리산 산신제가 3일 외곽순환고속도로 산본 나들목 인근 수리산 산신제단에서 열려 5백년 전통계승을 잇는다. 수리산 산신제는 정확한 고증이 어려우나 구전에 따르면 16세기초 안양군의 4대인 옥담(玉潭)이 이곳에 낙향, 광정이란 정자를 짓고 선조들의 묘를 지키고 살면서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켜주는 수리산에 대한 산신제를 올리면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광정리 주민들은 마을과 가깝게 위치해 있는 수리산의 산새가 좋고,진산은 아니지만 마을 뒷편에 우뚝 솟은 태을봉이 마을의 안녕을 지켜 준다며 매년 음력 1월과 7월초에 금기를 엄하게 지키고 주민들의 공동부담으로 제물을 준비해 제사를 지냈으며 주민들은 이러한 산신제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기원을..

[자료]안양 역사 및 옛 자연마을 지명 유래

▶ 명칭유래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만안구 석수1동 산 2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하였다. 조선시대에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짐작한다.또한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