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433

[자료]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가축위생검사소)

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가축위생검사소)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앞마당 화단에 꾸며져 있는“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히 잠드소서. 1969년 10월 20일”이라고 씌여진 충혼비를 우선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동물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을 하게 되는데 결국 이 동물들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 시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관계자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가상한지 알 수 있다. 꽃 피는 철에는 붉은꽃으로 에워싸이는 화단은 어찌 보면 이 연구소 구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가축의 전염병 및 기타 질병의 예방 연구 기능을 하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지상 3층 건물로 T자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자료]안양지역 행정구역 변천과정

[자료]안양지역 행정구역 변천과정 [행정구역의 변천] 안양지역의 모체인 시흥군은 고구려시대에 잉벌노현에 속했다가 934년 고려태조때 금주로 개칭되면서 衿川으로 불려왔다. 조선세조 원년인 1456년 과천에 병합되었다가 정조19년에 시흥으로 개칭되었으며 1895년 고종32년에 시흥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3월 1일 시흥, 안산, 과천의 3개군이 통합 시흥군이 되었다.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면서 안양은 전원도시로 발돋움해 오다가 급격한 도시발달로 1973년 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부천군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었고 86년 1월 1일 과천지구출장소가 과천시로, 반월지구출장소가 안산시로, 89년 ..

[자료]1919년 3월 의왕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의왕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아시나요? "수원군의 의왕면 고천리에서는 삼월 삼십일일 밤에 다수한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 경관주재소에 대하여 폭행을 함으로 수원주둔병대가 출동하여 해산시켰다는데 주모자로 인정할 만한 자 46명을 체포하였다가 그 이튿날 41명만 태형에 처하여 방송하였다더라."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 주민 800여명(당시 의왕 주민 수는 2천여 명에 불과했다)은 의왕면사무소(현 고천동주민센터)에 모여 고천경찰관 주재소(현 고천약국 부근)와 지지대 고개까지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주민들과 함께 기독교인들과 천도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와 일본군 육군성에서 1920년 12월 30일 발행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를 보면 일제 경찰은 군대를 불러 시위..

[자료]안양지역의 천주교 역사

안양지역의 천주교 역사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1887년에 한불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선교가 시작됐다. 이 후 경기도에서도 본격적으로 성당들이 건립되었는데, 1888년에 화성군 '갓등이'(현재의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에 세워진 예배처가 경기도 최초의 성당이다. 일명 '갓등이 성당'이라고 불리던'왕림성당'을 모 본당으로 하여 '미리내성당'(1896년 설립, 경기도 안성)과 '하우현성당'(1900년 설립, 경기도 의왕시)이 차례로 건립됐다. 당시 '하우현성당'을 모 본당으로 하여 안양의 첫 성당인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이 건립됨으로써 명실공히 안양 지역에도 한국 천주교의 계보를 잇게 됐다. 안양지역의 천주교 유례를 보면 '장내동성당'이 건립되기 전에 '하우현성당'에서 관할하던 수리산 공소가 있었던 ..

[자료]경인교대 경기캠퍼스에 읽힌 이야기

경인교대 경기캠퍼스에 읽힌 이야기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는 경기도로부터 안양시 석수동에 위치한 삼성산 자락의 석산부지6만5천여평(21만9천566㎡)와 시설비 899억원을 지원받아 2003년 12월 착공한 지 2년여만인 2005년 3월1일 개교했으며 전체 학생수는 2천여명에 달한다. 경기도가 학교 부지와 시설비까지 지원하고 나선 이유는 경기도에 교육대학이 없으나 법률상 수도권에 대학교 설립이 불가능하자 경인교대 캠퍼스 유치에 나선 것으로 도는 2001년 '경기교육대학 설립 1천만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의 노력 끝에 2003년 경기도가 대학 설립예산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경기캠퍼스 설립을 승인받았다. 경기캠퍼스 건축연면적은 51,735㎡(15,650평)로 2003년 12월23일 착공식을 가졌으며 ..

[자료]과천.군포.안양.의왕의 엣 경관 이야기

과천.군포.안양.의왕의 엣 경관 이야기 제1절 토지이용의 변화 한국의 근대화 또는 산업화에 대해서는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반에서 계속 새로운 논점이 제기되고 있으며, 여기에 지역별 접근도 가세되면서 논의가 점차 고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 또는 산업화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산업화의 지역적 전개 과정은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어서 그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도 단위에서는 경기도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급격하게 그 변화를 맞이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산업화가 진행되면 여러 부문에서 변화가 포착되지만, 지리학의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토지이용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자료]민간 항일운동 포문 연 안양 출신 원태우지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멩이 던진 원태우의사 대한민국 사람 중에 1909년 중국 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 기차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1905년 11월 22일 경기 안양에서 열차를 타고 가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기막히게 날려 부상을 입힌 안양 출신의 원태우 의사와 민간 항일 운동의 효시라 할수 있는 거사의 현장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많다. 1905년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이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조약 체결을 한 후 5일후인 22일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하고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

[기록]22명의 여성노동자가 숨진 안양 '그린힐' 화재

22명의 여성노동자가 화재로 숨진 그린힐 봉제공장 1988년 3월 25일 안양시 비산1동 그린힐 봉제공장(비산종합상가 빌딩 3층)에서 화재가 났다. 일에 지쳐 기숙사에서 곤히 잠을 자던 소녀 스물 두 명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간 비국적인 사건이었다. 화재 원인은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불법 기숙사 운영과 무허가 공장을 숨기기 위해 출입문에 쌓아놓은 제품이 인화성 물질 역할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출입문에는 철재 셔터로 닫혀있고, 지상으로 연결된 화장실 창문에는 쇠창살이 달려있어 불 속에서 소녀들은 살기 위해 화장실에서 몸부림치다가 켜켜이 쌓여 타 죽고 만다. 당시 여성 노동자 28명중 22명이 화재로 사망했다. 이 여성 노동자들은 3.7평의 방에서 5~8명씩 새우잠을 자면서 이을 했는데 폭력배들이 들어올지..

[자료]안양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2)

안양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2) ■수푸루지(林谷洞, 林川) 비산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 이곳은 조선조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 ?∼1644)이 그의 부친인 심간(沈諫. 1560∼1624. 청풍군수 역임)이 죽자 이 마을 뒷산에 예장한 후 그의 후손인 청송 심씨가 묘하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그 뒤 수원 백씨, 고령 박씨, 곡부 박씨,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 하여 ‘수푸루지(林谷洞)’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林川)’라 부르기도 하였다. 수푸루지는 1978년 대림대학(비산동 526번지의 7호)이 건립되고, 이어 비산동 신시가지가 형성되면..

[자료]안양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1)

안양의 역사 및 각 동 지명유래(1) ●역사 문헌상에 등장하는 안양의 역사는 율목군이라는 행정명칭이 있으나 이전의 원삼국시대와 선사시대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989년 평촌지역 문화유적 조사시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근거를 알수가 있으며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에서, 백제 근초고왕(346-375)때에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고구려 장수왕(394-491)때 한강연안 및 경기도 전지역이 고구려 남쪽의 영토가 되었다. ●지명유래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