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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안양풀 - 안양유원지 - 안양예술공원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풀 - 안양유원지 - 안양예술공원

경기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과거 안양 풀 또는 안양유원지로 불리우던 이곳은 성산과 관악산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고래로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붙잡아 풍류담과 더불어 많은 시문을 남기게 하기도 했으며 고려조의 명신 강감찬은 이 곳을 경기금강이라고 불리웠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의하면 태종 17년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를 안양유원지 계곡에서 열었는데 강권하던 소주를 못 이겨 김 문이 갑자기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전까지 보고된 이 사고에 대한 태종의 수습책은 의외로 간단해서 "술을 권하는 일은 고래의 미풍이지 악습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큰일이니 관련자들을 파직하라"는 명쾌한 판결로 매듭을 지었다고 한다.
안양유원지 계곡은 관악산의 여러 골짜기 중 수량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부터 여름철 피서지였으며 1930년대 이후 70년대까지 전국에 명성을 알렸다.
공식적인 안양유원지의 출발은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 당시 1,500원의 예산으로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을 만들어 안양풀이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된다. 그 당시 만든 풀장의 둑과 탈의용 계단의 형태는 1990년대 중반까지 보존되어 있었으나 안양유원지 재개발 사업을 하면서 원형들이 모두 훼손됐다.
다만 암반위에 새겨진 일본어 명문만이 남아 있다. 지금도 안양예술공원 입구 주차장을 지나 오른쪽 도로를 따라 100미터쯤 오르면 삼성천으로 계단을 내려서면 자연석으로 된 거대한 초석에는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일본 연호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책임자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초석의 3분의 2 가량이 1977년 대홍수 후 보의 붕괴를 우려해서 만든 콘크리트 보조 둑에 덮여버려 마지막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안양 풀과 유원지계곡은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이후 6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명소여서 여름 한철 하루 약 2만 명의 유람객이 찾은 것으로 금천지는 기록하고 있다. 안양 역에서는 행락철에 한하여 유원지입구에 간이역을 설치했고, 이 곳에서 풀장까지 임시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인파가 많이 몰렸던 곳이 바로 안양 풀이었다.
관보를 보면 1966년 여름피서철인 8월 6일-28일까지 토요일.공휴일에 경부선 안양 풀 임시승강장(시흥~안양역, 안양풀입구)이 운영됐으며, 1967년에는 7월 14일부터 8월 20일까지 여객을 받는 등 안양 풀 임시승강장은 1969년에도 운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안양지역 원로인 변원신(78) 선생은 1933년 안양 풀이 생기자 당시 "일제가 서울에서 안양풀행 철도를 운영했다"도 증언하고 있어 안양 풀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해방 이후 서울과 수도권 시민들의 피서지로 이어져 1967년 7월29일자 <매일경제>에 안양유원지에는 하루 평균 4만여명(일요일 10만)의 피서객이 몰리고 서울에서 당일코스로 40원이면 왕복할 수 있고, 기차도 매시간마다 입구에 정차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1963년 7월17자 <동아일보>에는 국립도서관이 피서객을 위해 안양유원지 풀장에 7월26일부터 8월14일까지 임간문고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1968년 6월8일자 <동아일보>에는 체신부가 6월10일부터 8월30일까지 안양우체국 임시출징소를 운영한 기록도 있다. 1976년 3월25일자 <경향신문>에는 안양유원지에 해마다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자 입장료를 받기로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안양출신의 수필가인 이 용구 씨는 '양짓마을 까지소리'란 그의 수필집에서 일제시대인 '30년대 안양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가면 학년을 불문하고 무조건 안양유원지로 갔다고 하면서, 유원지계곡이 일찍부터 안양사람의 휴식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이나 수원 지역 사람들도 봄부터 가을까지 즐겨 찾던 명소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용구 씨는 이 안양 풀 때문에 서울에서 친척과 학우들이 매년 한 번씩 찾아왔고, 자신은 매해 그들의 안내자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어 이 씨는 '30년대에는 유원지 입구 좌우에 수박, 참외, 토마토 밭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50년대에 발간된 '금천지'에는 큰 포도밭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 것으로 봐서, 그 사이 유원지에 안양포도라는 명물이 탄생한 것을 알 수 있다.이 안양포도는 오끼,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기 시작함으로써 탄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양포도는 포도농사에 더없이 좋은 기후와 토양이 거름이 되어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로 알려져서, 서울 시중 어디서나 장사치들이 "안양포도요! 안양포도" 하면서 자신 있게 외치고 다닐 정도로 성가를 누렸다.
안양 풀이 쇠락의 계기를 맞은 것은 1960년대 말 상류에 대형풀장, 맘모스풀장, 만안각 풀장 등 인공풀장이 들어서고, 또 행락객들이 버린 오물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서 자연하천인 삼성천이 오염되어 자연풀장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터다. 이처럼 인파와 행락객이 몰리면서 관악산과 유원지계곡의 오염이 심화되자 당국에서는 이러한 명소의 심층적인 관리가 필요해 졌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건교부의 전신인 교통부에서 '69년 1월 21일에 국민관광지로 지정한다. 이 때부터 입구에 아치모양의 철구조물로 '안양유원지'라는 표찰이 붙고, '안양 풀' 대신 '안양유원지'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으며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입구에서 매표를 하게되고, 입장수입으로 유원지를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19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발길이 뚝 끊긴다.더욱이 230명의 인명피해를 낸 1977년의 안양 대홍수는기존 안양유원지 계곡의 경관을 참혹하게 파괴하고 지나갔다. 이로인해 안양 풀은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와 자갈, 대형 바위돌로 메꾸어지고 휩쓸리며 완전히 자취를 감춰서 결국 잊혀져 버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교통부는 1984년 11월 28일 국민관광지 지정을 취소하였으며 이에 안양시는 조례로서 1900년 비지정관광지로 지정해 입장료와 쓰레기수거료를 1900년까지 행락철에 한해 받으며 관리해왔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잃어버린 안양유원지는 이후 계곡을 넘칠 정도로 풍부하던 수량도 줄어들면서 인적이 끊긴 유원지로 전락하자 결국 교통부는 1984년 11월 28일 국민관광지 지정을 취소했으며, 이에 안양시는 조례로서 1990년 비지정관광지로 지정해 입장료와 쓰레기수거료를 행락철에 한해 받으며 관리하며 안양유원지의 번창과 영화는 지난 추억의 이야기가 됐다.
유원지의 황폐화가 이처럼 계속되자 안양시는 1994년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경제활성화 및 지역개발 차원에서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4년 3월 28일에 승인된 '2011년 안양시도시기본계획'에서 안양유원지를 도시공원에서 제척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1995년 3월 6일에는 도시계획을 재정비 입안하며 공원지구를 해제했으며, 이어 경기도에서도 경기도고시 제 462 호로 공원해제를 고시했다. 1995년 지방자치의 실시로 민선시장체제가 출범하면서 선거 때마다 유원지 정비 및 개발계획은 주요 공약의 하나로 등장해 1996년 말 안양유원지를 그린벨트지역 내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하면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고, 안양시는 유원지개발기획단이라는 상설기구를 설치하여 유원지 개발을 위한 실천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6년 안양시가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의뢰해서 만든 '안양시 산업발전계획'에 유원지개발계획이 들어 있었으나 실시되지는 않았으며, 안양시가 국토연구원에 발주해 2000년 8월 발표한 '안양비전 21'에서는 안양유원지를 인근에 산재한 역사유적을 포함해 안양의 자연경관. 역사경관으로 선정해 발굴해야 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특정목적 및 지구단위 사업 투자의 평가기준별 사업순위에 있어 안양유원지는 시급성은 중장기적사업으로 후 순위일 뿐 아니라 평가구분에 의한 사업의 용이성 역시 보통, 수익성은 비수익, 기대효과는 높음으로 관리 및 정비차원의 사업이 우선적으로 가능할 것이나 평가 절하된 채 안양유원지 정비는 2006년 이후로 밀렸으며 더욱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벤처기업 유치 등의 우선 순위에 뒷전이 된다.
이와는 별도로 안양시는 그동안 유원지 개발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고 여러 종의 계획을 세워온 가운데 그동안 추진해 온 안양시의 유원지개발계획을 살펴보면 지역의 특성에 적합한 토지이용계획 수립, 기존 공간의 성격에 적합한 시설물을 배치해 토지이용의 효율성 도모, 주변 자연환경이나 문화유산 및 비산도시자연공원과의 조화를 이루는 효율적인 개발 추구 등을 지향하며 총 사업비 155억 원을 투여 물을 중심으로 자연과 문화가 교류하는 공간조성을 목표로 2005년 7월까지 3단계의 계획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안양유원지란 6개동 195만 평에 달하는 비산도시자연공원 내에 있는 안양 2동과 석수 1동 일원의 5만4천평에 달하는 삼성천변의 계곡을 말하며 향후 도시의 기능 및 미관의 향상, 공공 편의시설의 입지로 인한 시민편의의 증진, 주민 소득증대와 지역경제활성화 및 세수확대, 주거환경 개선효과 및 수도권 남부지역의 새로운 명소 탄생 등을 기대하고 있다. 1단계인 1999년까지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주거환경개선계획고시('97. 12, 안양시고시 제 104 호), 시유지불하('98. 6), 유원지 내 건축허가 중지(보류) 통보('99. 4), 안양유원지 명소화 추진을 위한 기본방향 설정('99. 6), 삼성천 상류 서울농대 수목원 내 소형저수지 설치 타당성 용역발주('99. 7), 주변공원조성계획 용역발주('99. 10), 도시설계구역지정 공고('99, 11), 삼성천 용수확보 댐 설치 타당성 조사용역 준공('99. 12) 등이다.2000년부터 시작된 제 2 단계 사업은 2001년까지 개발제한구역이 완화될 때를 대비한 관계법규를 재검토하는 작업과 기본계획을 확정하고, 도시설계작성(2000. 3), 도시설계완료(2000. 10), 기반시설 설치 및 확보와 건축물 개량(2001), 수익시설 수용 등이며 마무리단계인 3단계(2002-2005)부터는 비산도시자연공원과 연계한 유원지개발을 가시화 하여 수도권의 명소로서 거듭난 안양유원지를 만들어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안양유원지 입구 낙원마을은 입구에 장승 및 솟대를 설치하고, 양반집, 초가집, 공방, 주막 등의 전통가옥과 그네, 씨름, 농악놀이마당 등을 갖춘 전통 한옥마을로 조성하는 한편 부대시설로는 민속예절관을 건립하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각종 다채로운 이벤트를 진행하며 낙원마을 뒤편의 구릉지대에는 안양포도단지와 포도광장을 화심천과 연계하여 조성함으로써 향토문화를 구현할 수 있는 마을마당을 만드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삼성천 유원지계곡 주변의 144개의 점포와 주택은 먹거리와 관련한 카페마을로 조성한다는 계획으로 이미 불하를 끝낸 상태로 무분별한 건축에 대비해 건물의 층수, 지붕의 형태, 색상 등에 이르기까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자연환경에 적합한 재료와 색상이 선정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기능과 청소년의 놀이기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추진한다는 전략이다. 이외 야외콘서트를 열 수 있는 벽천광장, 음악분수와 터널식 분수를 갖춘 분수광장 등 2개의 대형광장을 만들고, 복합행정지원센터와 같은 복지회관 건립, 유원지내 차량통제에 대비 기존 유원지입구의 주차장 주변부지를 추가 매입해 주차용량을 늘리는 한편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를 개발하고, 낙원마을의 민속놀이와 연계한 화심천 우물축제, 벚꽃축제, 젊음의 축제와 등산대회 등 자연을 이용한 다채로운 이벤트 행사를 개최한다는 방침이다.
이와함께 안양유원지를 둘러싸고 있는 비산자연공원에는 자연체험장, 서바이벌게임장, 조각전시장, 다목적운동장 및 전망대 등을 유원지와 연계하여 설치함으로써 푸른 숲, 맑은 물, 젊음이 역동하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러나 안양시 국장급이 단장으로 자리해 진두 지휘했던 안양유원지 개발계획단은 해체상태와 다름없는 형태로 축소되었으며 단지 형태로의 조성이 아닌 기존 144개의 유원지 계곡 주변 점포와 주택의 무분별한 불하, 계곡의 산자락을 훼손하며 만든 우회도로의 개설, 하천 범람과 홍수방지를 우려한 하천의 콘크리트 직벽화 등은 자연이 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유원지의 모습을 꿈꾸던 시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점점 시민들의 곁에서 멀어졌다.
안양유원지 재개발 사업은 1999년 3월부터 2004년 말까지 모두 235억원을 들여 관악산과 삼성산 사이 안양유원지 일대 17만9천㎡에 도로, 상.하수도, 하천 등 도시기반 시설 정비와 안양유원지 상류에 용수확보 소형댐을 건설하고 하천변 음식점과 주택 등을 말끔히 정비하였다.이 과정에서 안양유원지에 조성하려던 조각공원 계획이 안양유원지 예술공원 조성사업으로 진화되는 사건이 생긴다.
이는 유원지 일대 20만9천㎡에 휴게광장, 산책로, 전망대, 인공폭포, 야외무대, 전시관 등의 설치와 국내외 작가의 작품 90여점(영구작품 50점 포함)이 전시 및 설치되는 208억원(프로젝트 29억 포함) 규모의 방대한 사업이다.
안양시는 2005년 APAP(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안양유원지를 단순 휴식공간 차원을 넘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 거기에 예술까지 결합된 국제적 명소로의 완전 탈바꿈을 시도했으며, 명칭공모를 통해 2006년 '안양예술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하지만 2000년 안양유원지 정비사업 과정에서 보존보다는 개발에 치중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안양 풀의 둑과 계곡 양 측면으로 조성된 돌계단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는 우를 범하며 옛것은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