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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안양역의 변천과정과 숨은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7. 3. 26. 01:54

 

안양역의 변천과정과 숨은 이야기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오렴
- 김대규 시인의 엽서 -
 
경부선 개설과 함께 1905년 1월 1일 문을 연 안양역은 2001년 12월 14일 최신시설의 민자역사로 탄생됐으며 전동차를 포함 새마을호, 무궁화호, 화물열차 등이 경유하고 있으며 하루 출퇴근시간대만 최대 4만여명이 이용하는 것으로 안양역 측은 집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양역은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을까.
100년 전 안양역의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독일인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산더(1868∼1945)가 1906년부터 1년여간 러일전쟁의 흔적을 조사하는 여행길에 기차가 정차한 1906년 9월의 '안양역 풍경'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난 과거를 되돌아 보게 한다.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시장에서 전시되었던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여행'전에 선보인 안양역의 풍경은 어찌보면 현존하는 사진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안양지역의 모습으로 격변기를 살았던 선조들의 모습, 풍속, 역사적 현장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안양역이 처음 생긴 것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자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다. 부연하면 경부선 1구간 역 중 하서면 안양리에 개설된 역사의 명칭이 공교롭게도 하서역도 명학역도 아닌 안양역으로 결정된 것이다.
안양역이 개통되기 이전에 안양지역의 경제와 행정의 중심지는 호계사거리였다. 당시 서이면사무소가 현 호계도서관 인근에 있었으며 조선시대부터 군포장이 안양.군포.의왕.과천.안산.고잔. 시흥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가 안양역이 개통되면서 지역경제와 행정의 중심이 안양으로 이전하고 이때부터 호계리와 군포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지역대표성은 안양역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발전하는 안양리에 그 자리를 내준 것이다.
특히 안양천의 풍부한 수량으로 안양에는 섬유와 제지공장들이 들어서고 일본인들이 대규모 농장(오끼농장)도 만들고 이때 부터 포도농사도 시작된다.
1898년 군포 궁례동에서 안양리로 시집 온 고 강주희(1883년생) 여사도 시집올 당시 안양행궁 주변으로 집들이 십여 채에 불과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을 2005년 말 작고한 고 장배순(1921년생, 전 안양시시정자문위원장) 옹이 생전에 증언한 바 있어 안양역 개통이 근대 안양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안양역은 이후 역사의 노후로 1938년 8월 공사비 4만원(당시금액)으로 건평 88평에 목조콘크리트 스레트식으로 착공하여 2개월만인 10월 21일 정오에 신축 낙성식을 가졌으나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1월 26일 1.4후퇴 당시 완전 소실되었다가 1956년 6월 17일 공사비 1천3백여만환(당시금액)으로 건평 95평의 준공하였고 1974년 8월 15일 전철개통과 동시에 선상역사를 증설했다.
1970년대 여름철이 되면 안양풀장(현 안양예술공원)으로 놀러오는 피서객들이 늘어나 안양역에서 하차하는 인파가 많았으나 역에서 안양유원지까지 운행하는 당시 몇대 없는 미니합승버스의 한계로 줄 서있기에 지친 피서객들이 걸어서 안양풀장까지 오가곤 했다.
이런 불편이 계속되자 당시 철도청은 당시 안양유원지 입구(현 전철 전력분배함 설치자리)에 임시역을 개설하였으며 당시 열차에서 내린 수많은 인파가 유원지입구 1번국도에서부터 안양유원지까지 걸어가는 행렬이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피서철인 여름에 안양유원지 입구에 기차가 정차했던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은 당시 발행된 신문에도 기록돼 있으니 안양유원지는 당시 한양 사람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았다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웹사이트 검색에서 안양유원지를 통해 기술하고자 한다)  
이후 안양역은 2001년 12월 13일 민자역사 개통식을 갖고 재탄생해 다음날인 14일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안양민자역사와 철도청이 모두 1천100억원을 들여 안양1동 88의1 일대 2만8천47㎡ 부지에 지난 95년 착공해 지하3층 지상9층 규모의 현대식 복합건축물로 LG건설이 시공했으며 역무시설은 지하 3층 지상 4층 연면적 8천693㎡ 규모로 시민편의를 위해 대합실과 개찰구.승강장으로 이루어졌다.이와는 별도로 역무시설 바로 옆에 롯데백화점. 골프연습장. 문화센터와 769대 수용 규모의 주차장 등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9층, 연면적 7만8천14㎡ 규모의 부대건물이 2004년 완공됐다.
한편 성결대학교 문원식 교수는 "안양시 지명의 뿌리가 1천100여 년 전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에서 발원한 것이 역사적인 유래이긴 하지만, 현재의 안양시 지명이 경부선 철도 개설 당시 역사(驛舍)의 명칭을 안양역으로 명명한 데서 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국정토를 뜻하는 안양이란 말을 공식적인 지명(地名)으로 사용한 기록은 조선 영조 시대에 제작된 여지도서 금천현도(영조 35년·1759)와 정조 13년(1789)의 호구조사 기록 등이 있다.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의 안양리(安養里)와 과천현(果川縣) 하서면(河西面)의 안양리(安養里)가 자연부락 지명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또 안양이란 지명을 활용해 작명한 기록은 정조 임금의 화산능행(花山陵行)을 위해 안양리에 건립한 안양행궁(安養行宮)이 있다. 행궁은 임금이 임시 머물 목적으로 건립한 별궁을 의미하며 정조 18년(1894년)에 지어져 지금은 표석만이 안양일번가에 남아 있다.
문 교수는 안양리에 대한 기록 중 일제가 1895년에 제작한 군사지도에 논밭과 십여채 정도 올망졸망한 가옥 표시 부호로 안양촌(安陽村)이 명기돼 있으며 이처럼 규모가 작은 자연부락에 불과한 안양리를 변모시킨 일대 사건이 1905년 안양역사 개설이라는 것이다.
이는 1902년부터 부분운행에 들어간 경부선 1구간 역 중 하서면 안양리에 개설된 역사의 명칭이 안양역으로 결정되면서 호계리와 군포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지역대표성은 안양역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발전하는 안양리에 자리를 내줬다는 설명이다.
이와관련 당시 행정구역이던 서이면은 1941년 10월 안양면으로 개칭되면서 27년간의 공식 활동을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후 안양면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1949년과 1973년 각각 읍과 시로 승격한 후 현재 인구 63만에 달하는 수도권 대도시로 성장했다.
안양시 인구변화를 살펴보면 19세기 말 3천여명에서 1912년 3천412명, 1925년 6천165명, 1935년 8천957명, 1940년 1만명 등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한때 63만명을 넘겼다가 2017년 현재 인구는 62만명이 넘는다.

 

1930년대 안양역

 

1968년 안양역사 -닐미샬로프

 

1930년대를 재현한 안양역 일대 모형

 

1930년대를 재현한 안양역 일대 모형

 

1930년대를 재현한 안양역 일대 모형

 

1930년대를 재현한 안양역 일대 모형

 

1980년대 안양역 주변 풍경

 

2007년 8월 안양역 광장